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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메모

심청정/청정심

by 방가房家 2023. 4. 25.

메리 더글러스의 <<깨끗함과 위험>>을 읽을 때, 책에서 다루어진 사례들은 아프리카 종교에서 나타나는 금기 개념과 유대교의 정결 개념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민간신앙의 깨끗함 관념, 그리고 제사지낼 때의 부정 등을 떠올리긴 했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깨끗함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불교에서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이야기를 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을 터인데, 그것을 단순한 수사(修辭)로만 생각했던 탓일까? 다른 종교의 깨끗함 관념을 논의할 때 이상하게도 전혀 연결시켜 생각해보지 못했다.


<<불교의 선악론>>(살림, 2006)을 보면서 불교에서 깨끗함이 수사 이상임이 대번에 들어왔다. 불교 가르침의 핵심에 자리잡은 관념이라는 것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마경>>의 한 대목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보살이 정토(淨土)를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 그 마음이 깨끗해짐에 따라서 불국토로 깨끗해진다. (45)
선악을 비롯한 속세의 다른 이분법들과 마찬가지로, 불교에서 더러움과 깨끗함의 분별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상황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양자는 경험 세계에서 보면 대립적이지만, 불이적 관점에서 보면 평등한 것이라는 가르침이 <<유마경>>에 나온다.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두 가지이다. 더러움(垢)의 실제 성질을 보면 깨끗함(淨)이 없듯이 형상(相)이 멸하는 데서 형상이 따른다. 이것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85)
둘이 다르지 않다고 해서 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분명 깨끗함과 더러움의 분별은 공(空)한 것이지만, 그것은 구분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것이지 깨끗함이 의미없는 것이라는 게 아니다. 깨끗함은 추구해야 할 상태이며, 그것은 청정심(淸淨心)이라는 윤리적 실천의 바탕이다.
무탐진치(無貪瞋癡)의 마음을 적극적/긍정적 술어로 표현하면 심청정(心淸淨) 혹은 청정심이다. 심청정은 초기불교는 물론 대승불교에서도 똑같이 강조되지만, 강조되는 내용과 서술의 방식은 동일하지 않다. 초기 불교에서 청정심은 육근수호, 자애, 사무량심 등으로 설명될 수 있고, 대승불교에서는 보리심으로 설명될 수 있다. (37)
<<깨끗함과 위험>>의 8장에서는 윤리와 정결 관념의 관계를 논한다. 그 논의에 따르면, 윤리와 정결 관념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다소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정결 관념이 윤리에 대한 보완 작용을 하는 사례들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세속의 정결 관념에서 전제하는 구분을 해체하고 윤리의 차원에서 깨끗함을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문화권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불교가 극복한 원래의 정결 개념이 어떤 것인지, 불교 사상에서 어떻게 다양하게 논의하는지에 대해서는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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