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고집스러움이 잔뜩 묻어 있는 이런 책이 좋다. 임석재의 <<서울, 골목길 풍경>>(북하우스, 2006)은 욕 들어먹기 딱 좋은 책이다. 그것은 저자가 책 처음부터 끝까지 주의를 하고 있는 “막연한 낭만주의와 철부지 감상주의”라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것이 얼핏 보면 소위 달동네라는 지역을 누비며 사진을 찍고 골목길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책에 대한 대부분의 어른들의 반사적인 반응일 것이다. 저자가 조사하러 다니면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도 그런 것이었으리라. 책에도 재개발이 되지 않고 골목길로 남아있는 것을 한스러워 하는 주민들의 반응이 적지 않게 담겨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굴하지 않고 그 자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간에 대한 살뜰한 애정을 담아낸다. 공간에 대한 애정은 미학적인 것인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것으로, 그 곳을 살아갈만한 곳으로 만들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골목길이라는 공간에 담긴 노력을 통해서, 저자는 우리가 “근대”를 받아들이고 나름의 방식으로 발달시킨 양상을 보여주고자 한다. 무거운 주제이고, 이론적으로 방어하려면 적지 않은 노력이 드는 주제이겠지만, 저자는 묵묵히 보여줌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한다.
내가 책에 빨려 들어갔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작업을 통해서 길이 말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길의 언어를 내게 알려준다. 인상적이었던 몇 대목을 메모해 둔다.
삼선1동의 조형적 특징은 계단이다. 쭉 뻗은 계단, 넓은 계단, 좁은 계단, 넓었다가 좁아지는 계단, 구불구불한 계단, 축대형 계단, 삐뚤빼뚤한 계단, 불규칙한 계단, 단숨에 오르는 계단, 쉬었다 가는 계단, 꺾인 계단, 휜 계단, 굽이치는 계단, 급한 계단, 완만한 계단, 긴장한 계단, 늘어진 계단, 전망 좋은 계단, 쥐어짜는 계단, 갈라지는 계단, 합치는 계단, 잇는 계단, 막힌 계단……(22)
해맞이길과 해맞이1길에서 아홉 갈래의 길이 안으로 들어가, 위에서 내려오는 일곱 갈래와 만난다. 가지치기부터 그렇듯 만남을 격식이 전혀 없다. 열여섯 갈래 모두가 제각각이다. 비스듬히, 꼿꼿이, 둥글게, 모나게, 세모지게, 원만하게, 모나게, 완만하게, 급하게, 종종걸음으로, 느긋하게, 속보로, 완보로, 애써 수고스럽게, 짐짓 편하게, 관대한 듯, 인색한 듯, 넓게, 좁게……무형식의 극치다. 길 생김에 들어맞는 형용사가 이렇게 많다는 것도 놀랄 일이지만, 웬만한 형용사를 갖다붙이면 신기하게도 모두 말이 되는 것이 더 놀랍다.(79-81)
삼선1동은 계단 자체의 형식이 다양한 반면 해맞이길 지역에서는 계단을 담는 골목길의 골격이 다양하다. 쭉 뻗은 길, 둔각으로 휜 길, 곡선으로 휜 길, 원으로 휜 길, 직각으로 꺽인 길, 예각으로 꺾인 길, 휘어 돌다 뻗어나가는 길, 뱀처럼 구불구불한 길, 지그재그길, ㄷ자형 길, ㅁ자형 길……(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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