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크라테스의 글을 그리 많이 읽은 편이 되지 못하지만, 가끔 철학에서 그가 다루어지는 방식에 불편함을 느길 때가 있다. 그는 분명 “철학의 아버지”이다. 하지만 간혹 우리는 그에게서 우리가 생각하는 근대적 철학자 이미지를 추출해내려고 강요하는 때가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그가 갖고 있던 신적인 영역에 대한 존중을 무시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때가 있다. 루이-앙드레 도리옹, 김유석 옮김, <<소크라테스>>(이학사, 2009)에서 그런 걱정에 도움이 되는 구절들을 옮겨 보았다.
소크라테스가 종교적인 차원을 담고 있음에 분명한 이 임무를 근거로 내세울 때마다, 그는 어떤 때는 자신이 신에게 강력한 도움을 제공하며 신에게 봉사하는 중이라고 주장하고(<<변론>> 23b, 30a), 또 어떤 때는 자신이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28e, 30a, 33c), 심지어 어떤 때는 자신을 신이 아테네에 보내준 선물이라고 주장한다.(30e, 31a) (99)
이 철학자의 글에 등장하는 종교적인 것, 신화적인 것들을 그저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는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그는 신적인 것을 이성에 종속시킨 사람이 아니라, 신적인 것과 이성을 조화시키려 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하게 말하면, 그를 계몽주의 시대의 무신론적인 철학자인 양 독해하는 것은 “도시의 신들을 믿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그를 고발했던 아테네인들과 비슷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종종 소크라테스를 자율적이며 이성주의적인 윤리학의 선구자로 소개해왔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이해하는 것과 같은 그런 철학이 오직 인간 이성의 요구에만 복종하는 행위라고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우리가 소크라테스의 입장을 정당하게 평가하길 원한다면, 우리는 그가 살아오며 겪은 일련의 사건 속에서 신적인 개입으로 간주했던 것에 대해 그가 취했던 태도 역시 마찬가지로 고려해봐야 한다.(101-2)
저자는 “영적인 신호(daimonion)”라는 단어를 사람들이 “다이몬”이라고 습관적으로 잘못 불러왔다고 주장한다. “daimonion”이란 단어가 일종의 신령인 다이몬으로 이해되는 것은 기원후 2세기 이후라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영적 신호가 개입하게 되는 근거에 대해서는 결코 아무런 물음도 던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도덕 이성의 한계 및 그 종속성을 잘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신적인 개입이 있고 나서, 그 의미를 발견해내고자 자신의 사유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그 개입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105)
저자가 베르그손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인용한 것이 논의를 잘 정리해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인용 뒤에 “순수 이성을 넘어선 듯 보이는” 것조차도 합리성의 영역 안에 머물며 지혜의 담지자인 신은 늘 이성적이라는 단서를 달아놓긴 했다. 현대인의 영역에서의 종교나 철학, 어느 한 쪽에 소크라테스를 무리하게 집어넣는 해석을 경계하는 것이리라.
“우리가 오늘날 그 말들의 의미를 따져보면, 그의 임무는 종교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명령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그것이 설령 완벽하게 이성주의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순수이성을 넘어선 듯 보이는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