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서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체계에 대한 반응을 보일 때, 일단 그것은 그들의 지적인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남인 계열 일부의 유학자들의 서학 수용은, 그들이 정치적으로 밀려나 있는 데 대한 불만에서 기인한 것인가? 천주교를 공격한 유학자들은 보수적이어서 새로운 사상(더 나아가 근대화)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한 것인가? 처음에 서학을 받아들였다가 이후 배교(背敎)한 성리학자들은 자기 한계를 벗지 못하여 철저한 기독교 신앙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일면적이고 잘못된 방향의 설명을 이끌어낸다. 단 베이커(Don Baker, "A Confucian Confronts Catholicism," <<Korean Studies Forum>> 6(1979-1980))는 연구 과정에서 한국 학자들의 위와 같은 식의 성의 없는 설명들에 맞닥뜨렸던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조선 성리학자들의 지적 맥락에서 그들이 천주교를 수용하거나 거부하였던 이유를 서술하는 작업을 했을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최기복(<조선조 천주교회의 제사금지와 다산의 조상제사관>, <<한국교회사논문집2>>(한국교회사연구소, 1985).)이 조상제사 금지 명령 이후 천주교를 떠났던 유학자들의 태도를 분석하는 대목이 주목되는데, 그것은 그가 유학자들의 신심이 철저하지 못했다고 기술해버리는 기존의 교회사 시각의 서술을 지양하고 당시 유학자들의 지적인 정황의 자리에서 기술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권일신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의 해석이 그러하다.(138-9)
조상을 섬기는 한 조목은 특히 그 학술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니, 제사를 예법대로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생일에도 제물을 올리는 것이 정례(情禮)에 합치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사판을 태워버린 사람은 어떤 책을 보고서 이처럼 패역스럽고 망령된 일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실로 이해하지 못할 바입니다. [<<정조실록>> 15년 11월 8일]
이것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신주를 해하지 않았음을 변론하는 자리에서 나온 발언이다. 권일신의 사정상 윤지충과 권상연의 훼사(毁祠)를 반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넘어갈 대목이다. 그러나 최기복은 이것을 단지 둘러대는 말이 아니라 그의 신앙 이해의 표현으로 파악한다. (물론 그러한 파악에는 다른 자료들과 정황의 뒷받침이 있다.) 최기복의 서술에는 신학자로서의 판단도 들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그는 토착화에 대한 긍정을 여러 대목에서 토로하고 있으며, 당시 교황청의 제사금지 명령은 잘못된 것이라는 판단 하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의 서술 구도에서 당시 서학을 수용한 성리학자들은 윗선의 잘못된 명령에 직면하여 자신의 지적 정직성에 의거한 결단을 내린 사람들로 묘사된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유보하더라도, 이러한 서술의 미덕은 당시 유학자들을 일관된 지적인 세계 내에서 움직임 사람들로 상정한다는 점이다.
서학에 대한 영남퇴계학파의 대응을 소개한 안영상의 글(안영상, <천주교의 천주(상제)와 영혼불멸설에 대한 영남퇴계학파의 대응양식>, <<시대와 철학>>16-1(2005))은 당대의 지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당시 성리학자들에게 서학(특히 마테오 리치의)이 던진 질문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게 해주는 데, 이보다 탁월한 설명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상제론과 귀신론 이해에 대한 성리학 전통 내적인 긴장에서부터 일목요연하게 서술하기 때문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과연 성리학의 어떠한 ‘급소’를 찔렀는지가 잘 이해된다. 단 베이커가 서학과 성리학이 기반을 둔 언어의 다름만을 이야기하고 그래서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는 다소 단순한 설명에만 그쳤다면, 안영상은 서학이 어느 지점에서 호소할 수 있었는지를 지성사적 맥락에서 설명을 해준다. 지금까지도 애매한 채로 남아있는 제사에서 귀신의 문제에 대한 안정복의 질문, “만약 [제사가] 효자 자손들의 사모하는 마음만을 생각해서 만든 제도라면, 그것은 거의 허깨비 장난에 가까운 일로서 너무나 불경한 일이 아니겠습니까?”는 영남학파의 강경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울림을 지닌다. (안영상 글의 다른 미덕은, 공서파로 분류되는 학자들에 대한 그 바깥의 시선을 보여줌으로써, 서학에 대한 찬반 모두가 서학에서 제기한 문제의 틀에 놓였다고 비판하는 다른 시각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싸움에서 적을 닮아가는 역설의 한 예이기도 한데, 공서파의 논쟁에 대한 꼭 필요한 시각을 제시해 주었다고 생각된다.)
제사의 귀신을 둘러싼 논의, 즉 귀신이 실재하는 것이냐 조상에 대한 추모의 마음의 표현이냐는 논쟁은 현재의 제사에서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기도 하지만(미신이니 아니니 하는 기독교인들과의 논쟁을 언급한 안영상의 결론부는 미해결 상태의 반영이기도 하다), 동시에 중세 기독교 신학에서 시작되어 개신교와 천주교의 대립으로 지속되고 있는 성만찬에서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 논쟁과도 유사한 부분이 많다. 논쟁의 구도 상, 서로 전유될 수 있는 용어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제사에 대한 다산의 관점을 서술하면서 ‘상징적’이라고 서술한 최기복의 글에는 기독교 신학 논쟁에서 사용된 언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조광의 <朝鮮後期 西學書의 受容과 普及>(<<민족문화연구>> 44호)을 읽다가 찾아본 천주교사 관련 자료들. 서학에 대한 유학자의 입장을 밝혀주는 핵심 자료들 중 링크가 가능한 것들을 찾아보았다.
우리나라의 서학책 보급 상황을 알려주는 대목으로,
“서양(西洋)의 글이 선조(宣祖) 말년부터 이미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명경 석유(名卿碩儒)들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제자(諸子)나 도가(道家) 또는 불가(佛家)의 글 정도로 여겨서 서실(書室)의 구색으로 갖추었으며”[안정복, <天學考>, <<順菴先生文集>> 17권.]
함께 있는 글인 <天學問答>도 중요한데 일부를 보면,
공자는 괴(怪)·력(力)·난(亂)·신(神)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으니, 괴란 드물게 있는 일이고, 신(神)이란 보이지 않는 사물이다. 만약 드물게 있는 일이나 보이지 않는 사물을 가지고 끝없이 말한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선동되어 모두 황탄(荒誕)한 곳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그 중에 큰 예를 들어 말하자면, 한(漢)의 장각(張角), 당(唐)의 방훈(龐勛)과 황소(黃巢), 송(宋)의 왕칙(王則)과 방납(方臘), 원(元)의 홍건적(紅巾賊), 명말(明末)의 유적(流賊) 따위가 모두 그러한 부류이다. 기타 소소한 요적(妖賊)들로는 미륵불(彌勒佛)을 일컬은 백련사(白蓮社)의 무리들이 곳곳에서 무수히 일어났으니, 사전(史傳)은 이를 엄정히 전하고 있는 것이다. [안정복, <天學問答>, <<順菴先生文集>> 17권]
이규경의 글도 중요하다. 이 글에 대한 분석으로는 원재연, <五洲 李圭景의 對外觀과 天主敎 朝鮮傳來史 인식: <西洋通中國辨證說과>과 <斥邪敎辨證說>을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제17집(2001)을 참조할 수 있다.
"금일의 가장 염려스러운 일은 서양(西洋)의 일종 사설(邪說)이 점차 맹렬히 번져가고 있는 데에 있습니다. 심지어 을사년(1785) 봄과 작년(1787) 여름에는 호우(湖右) 일대가 거의 집집마다 성경을 외고 전하며 한문으로 된 글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베껴써서 아래로 부인네와 아이들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스스로 공씨(孔氏 공자를 이른다)를 높이던 사람들이 경서를 이끌어 성인을 속이며 끝에 가서는 정(程)ㆍ주(朱)를 헐뜯습니다. 백성은 미혹하기는 쉬워도 깨치기는 어려운 법인데, 이제 삶을 괴로워하고 죽음을 좋아하는 말을 바람에 쏠리듯이 따라서 물로 씻고 죄를 자송(自頌)하며 갖가지 괴이한 행동을 하고 있으니, 이는 부수(符水)와 백련교(白蓮敎)의 유(類)입니다."
[이규경, <사교의 배척에 관한 변증설>,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3, 석전류3]
당시 천주교를 배척하는데 앞장선 홍낙안이 당시 돌렸다는 반천주교 찌라시에 나오는 내용. 당시 천주교에 대해 떠돌던 풍문들이 담겨 있다.
‘이전에는 나라의 금법이 무서워 어두운 골방에서 모이던 자들이 지금은 밝은 대낮에 제멋대로 다니면서 공공연히 전파하며, 예전에는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써서 겹겹으로 덮어 싸 상자 속에 넣어두었었는데 지금은 멋대로 간행하여 경외에 반포한다.’ 하였고, 또 ‘그 가운데 교주(敎主)가 바로 그들의 괴수이다.’ 하였고, 또 ‘빨리 천당에 돌아가는 것이 극락이 되고 칼날에 죽는 것이 지극한 영광이다.’ 하였고 [<<정조실록>> 15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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