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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잡기

터프한 미국 병원

by 방가房家 2023. 4. 18.

(2005.1.19)

한국에서 병원에 입원해 본 경험이 없다. 의료시설이 내 삶에 관여하게 될거란 상상을 별로 해보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는 게 별로 없다. 더구나 미국 의료 시설이란... 상상도 못했던 공간이었다. 어쩌면 미국 병원에 앞서 병원 경험 자체가 내게 생소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
2004년 12월 13일 저녁,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옆에서 튀어나온 자동차에 받혔다. 큰 사고였다. 솔직히 나는 그 날의 일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간혹 의식이 들면 경찰과 의사가 뭐라 씨부랑거리는 기억만 날 뿐이다. 그 날 나는 두 개의 수술을 받았다. 하나는 배를 크게 가르고 조직에 손상을 입은 작은 창자를 잘라낸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박살난 오른손에 스크류를 박고 기브스를 하는 것이었다.

2.
둘째날에 정신이 들었다. 누워있는 내 몸을 바라보며 그렇게 살아있는 것이 용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정신없는 학기말이었는데, 갑자기 낯선 휴식이다. 그런데 휴식치고는 좀 과하게 다쳤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끔 오는 간호원은 두 가지만을 확인하였다. 얼마나 통증이 심하냐는 것과 방구가 나왔느냐는 것. 통증이 있다고 하면 진통제를 놓고 갔다.
식욕은 없더라도 무언가 먹기는 해야할 때 간절해지는 것이 미음같은 음식인데 미국 병원에서 식사로 내온 것은 컵 네 개였다. 물 한 잔, 포도 주스, 우유, 짜고 맛없는 스프 약간. 대접이 너무 투박하다. 주스만 약간 마시고 물린다.

3.
셋째 날엔 몸을 조금 가누기 시작한다. 한참 애쓴 덕분에 몇 발짝 앞에 있는 화장실에 가 용변을 볼 수 있었다. 손님들이 찾아오고, 보호자 자격으로 의사를 만난 선생님 덕분에 내가 무슨 수술을 받았는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전엔 내 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설명을 들을 길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대각선 방향 침대(내 방은 4인실이었다)에 환자가 들어왔는데 쇠고랑을 차고 있다. 옆에서 경찰 두 명이 밤새도록 환자를 지켰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 병원은 신원이 불확실한 사람, 가난한 사람, 범죄자들을 처리하는 곳인 것 같다. 하긴 갑자기 사고가 났을 때 의식불명인 외국인인 나를 경찰이 호송해온 곳이니 그런 시설에 데려왔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4.
넷째 날, 몸을 더 가눌 수 있게 된다. 의자에 앉는 게 좋다고 하면서 간호사가 나를 침대 옆 의자에 앉힌다. 그러고는 아예 침대보를 몇 시간동안 빼 놓았다. 띠발, 진통제 맞아 졸려 죽겠는데... 만신창이의 몸으로 의자에 앉아 몇 시간을 졸 수밖에 없었다. 저녁엔 처음으로 걸어다니기도 했다. 병원에서 신겨준 (슬리퍼가 아니라) 양말을 신고 복도를 한바퀴 돌았던 것.
이 날 처음으로 방구가 나왔다. 간호사에게 말하니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를 한다. “그럼 내일 퇴원할 수 있겠구만.” 처음에 이 정도 중병이라면 우리나라 병원에서는 최소 3주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흘만에 방구 하나 받아내고 퇴원이라니... 하지만 나도 퇴원이라는 말이 반가웠다. 그동안의 병원의 터프한 취급에 지쳐있었기 때문에. 집에 가서 편히 쉬면 훨씬 빨리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5.
다섯째 날, 이제 방구가 나왔으니 정상 식사를 해도 된다고 한다. 아침에 빵 몇 조각과 우유와 시리얼과 주스를 갖다주었다. 목에 넘어갈 리가 없다. 주스만 좀 마시고 물린다. 점심은 더 환상적이었다. 그릇 한복판에 커다란 닭다리가 놓여있다. 재미삼아 껍질 좀 뜯어보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에 퇴원을 했다. 간호사가 간단히 안내를 해준다. 며칠 있다가 전화해서 배의 스테이플 뽑을 약속을 하라는 것. (미국 병원에서는 수술을 하고 꼬매는 것보다는 스테이플을 박는 것을 선호한다. 내 배에는 커다란 스테이플이 30개 가까이 박혔다.) 처방해준 약은 진통제와 소화촉진제였다. 낫게 해주는 약이 아니라, 적게 먹을수록 좋은, 그런 성격의 약이다.

6.
며칠 후 전화를 하긴 했는데, 약속한 목요일에 가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했다. 몸이 아파 움직이기 힘들고, 차를 태워달라 할 친구들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였다. 대답은 간단했다. 다음주 목요일에 오라는 것. 다음주 목요일날 가서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렸는데, 그 날 급한 사고가 생겨 의사들 일정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다음주 목요일날 오란다. 그렇게 해서 3주 후에야 의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한 일은 간단했다. 내장이 어찌되었는지는 관심이 없었고, 좋아보인다면 핀셋으로 배의 스테이플만 뽑아내었다. 대수술의 마무리치고는 싱거운 종결이었다.
내가 경험한 미국 병원이 보통 병원과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저소득층을 위한 시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내가 느낀 것은 환자를 강하게 키우는 병원이었다는 것. 병원 치료를 최소화하고 개인의 능력에 많은 것을 맡긴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가졌던 개념과는 매우 다른 병원 문화를 하나 체험하였다.
(미국 병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불가피하게 투병일기 형식이 되어버렸다. 이런 식으로 개인적인 사정 늘어놓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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