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24)
나는 지나칠 정도로 몸과 마음의 상관성을 긍정하는 사람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어떤 일에 짜증을 내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면 나는 그 이유를 내 배 속에서 찾는다. “어, 내 성질이 왜 이러지? 배가 고파진 건가? (혹은 먹은 게 잘못된건가?)” 이런 식이다. "기분이 안 좋아보여"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배고파서 그래"라고 답하기 일쑤이다. (이런 유물론적 사유를 남에게 적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예를 들어, 이전에 연애할 때 여자 친구가 나에게 성질을 부리는 날에 “얘가 배가 고픈가?”라는 식으로 어설프게 대처했다가 낭패본 적이 좀 있었다.)
내 몸에 먹을 것, 영양가가 충분히 공급되었는지가 최우선의 고려대상이다. 그게 해결되지 않고서는 평소의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나의 학습계획은 식사계획에 종속된다. 오늘 어디서 무얼 먹는다는 것이 확정되고 나서야 그 사이에 어디서 무슨 공부를 할 수 있겠다는 계획을 짤 수 있다. 언제 밥 먹을건지 정해져 있지 않으면 책이 잘 안잡힐 정도이다.
밥은 내 생활과 사유의 중심이다. 밥에 대한 내 개똥철학은 꽤 일치감치 형성되어 있어서 (이런 생각은 김지하 시인의 글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대학 초기부터 난 “밥을 사랑하는 아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별명의 주된 동기는 내 개똥철학보다는 내 식성에 있었다. 내게 밥을 사주었던 선배들은 내가 무아지경에 빠져 밥을 먹는 모습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밥에 열광하는 모습이 그들에겐 인상적이었나 보다. 그리하여 나는 “방원일이 아니라 밥원일”이라고 불리게 된다. 솔직히 밥 잘먹는 인간이야 어디가나 있기 마련인데, 내가 그런 별명을 얻은 것은 내가 그 정도로 특징이 없는 인간인 동시에 그 방면의 재능이 뛰어났다는 뜻이 되겠다. (글 내용과는 상관없지만, 다른 분야의 내 별명으로는 “방원일이 아니라 방창식”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밥을 많이 먹고 먹은 만큼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 내 삶의 양태라고 믿고 살아왔다. 때로는 그런 삶의 양태를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기도 하고. 밥 제대로 안 먹고 비실비실하게 산다고 생각되는 후배를 보면 그렇게 무기력하게 살지 말라고 갈굴 정도였으니, 나도 참 간섭 심한 선배였음이 분명하다. 밥을 생활의 중심에 놓고 활기차게 살아가려는 것은 나쁜 생각일리 없겠으나, 문제는 상대방의 몸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 몸이 사유의 조건이라면 그 조건이 다양함을 인정해야 할 터인데,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이상한 강요를 하기도 했던 것. 이제 내 몸 자체가 변하면서 옛 일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전에 내가 지금 그리되었던 것처럼 장이 짧은 여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었다. 그 때엔 그저 지나쳤던 디테일들이 지금 와서야 이해되는 것들이 있다. 삶의 전제조건을 잊고서 눈에 보이는 것만 갖고 사고했던 일들을 반성하게 된다.
수술을 받고 장이 짧아졌다.
소화하는 주기가 달라졌다. 두고봐야 알겠지만 먹는 양도 줄어들어 이전의 밥원일의 영화를 회복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다. 이전처럼 한꺼번에 많이 먹는 패턴이 아니라 자주 조금씩 먹는 패턴으로 변하지 않을까 싶다. "조금 먹고 가볍게 살아요"는 내가 가장 경멸하던 표어였는데 이젠 내가 거기에 조금 가까이 살게 된 것이다. 내 몸의 변화, 먹는 양과 패턴의 변화, 그래서 밥에 대한 개념의 변화. 이것은 내 사유의 변화이며 나 자신의 총체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내 소화 능력이 완전히 자리잡는데는 몇 달 정도 걸리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몇 달 사이에 내 인격도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다. 나는 다른 인간이 될 것이다. 어떻게인지는 감을 잡을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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