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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잡기

대통령 토론회로 애리조나가 들썩이다

by 방가房家 2023. 4. 18.

(2004.10.14)

오늘 하루 우리 동네가 들썩거렸다. 애리조나 주립대학 대강당에서 케리와 부시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통령후보 텔레비전 토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신문 지상에까지 아마 우리학교 이름이 거론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미국 대선에서 텔레비전 토론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선거 판세를 크게 뒤흔들기에 초미의 관심이 집중되는 행사이다. 실제로 이번 선거에서도 토론을 통해 케리가 선거전세를 역전시키고 있다. (언론에서는 이제 박빙이 되었다고 보도하지만 내가 보기엔 대세가 넘어왔다.) 일주일 전부터 각지에 경찰이 배치되어 삼엄한 경비를 했고,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애리조나인으로서는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한 큰 행사이기에, (나를 포함해) 이 곳 촌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흥분하였다. 미국 와서 대통령이 내가 사는 동네를 스쳐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진짜로 이게 가장 큰 사건인지는 잘 모르겠다. 몇 년 뒤에 슈퍼볼 결승전이 이 곳에서 열린다고 하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판단이 엇갈릴 문제다.) 오늘 수업이 취소되었기 때문에 여유 있게 돌아다니며 사람들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물론 토론은 집에 가서 텔레비전으로 보았지만...

학생회관 앞, 낮부터 애들이 몰려 있다. 열심히 피켓 들고 후보들 응원한다. 애리조나는 부시가 강세인 지역이다. 하지만 대학교인 만큼 케리의 지지도도 만만치 않다. 내 느낌에는 학교 안에서는 케리가 좀 앞서는 것 같다.

도서관 뒤에는 CNN에서 방송부스를 설치하였고, 여기에도 많은 애들이 진작부터 몰려 자기 후보를 열호하며 방송을 듣고 있다.

선거 때 쓰는 버스인가 보다. "CNN Election Express"라고 적혀 있다. 그냥 신기해서...

토론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가지가지의 복장을 한 학생들이 몰려온다. 후보의 대형 인형, 카니발같은 이상한 복장, 그리고 여러 가지 재미있는 문구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확 눈길을 끌었던 것은, 스트리킹 비슷한 퍼포먼스를 벌인 애들이다. 한 떼의 남녀들이 국부만 살색 옷으로 가린 채 몸에 “No More Bush”를 쓰고 소리치고 다녔다. 사진을 공들여 찍었어야 했는데, 보시는 분들께 좀 미안하다. 사정이 여의치 않고 또 수줍은 성격 때문에 과감하게 카메라를 들이밀지 못하고 지나가다 흔들리는 사진 하나를 찍었을 뿐이다.

정치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지 않았고, 또 미국 사회에 대해 아는 게 적고, 게다가 토론을 능히 들을 정도의 영어 실력이 안 되어서, 내 이해는 극히 제한적이다. 특히 미국 국내 문제를 다룬 오늘 토론은, 여러 분야의 전문 용어들이 총망라되어 따라가기 힘들었다. 게다가 레드 삭스와 양키스의 야구 경기와 번갈아 보느라 진득하게 보지도 못했다. 나는 미국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거의 파악하지 못한다. 다만 여기저기서 느낀 “감”을 근거로 든 생각들을 적어 본다.

나는 케리의 승리를 확신하는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케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케리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이야기한다. 국제 정치, 경제, 여성 문제 등 다양한 부문에서 그 이유들을 명확히 밝히고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반면에 부시를 지지하는 이들은 명확한 근거를 대지 못한다. 그저 부시의 강력함과 케리의 신뢰할 수 없음을 말한다. 대개 정서적인 지지이다. 당선되어야 하는 뚜렷한 이유를 갖기 못한 부시의 한계는 점점 부각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케리의 당선을 낙관하는 편이다.
그동안 토론 덕분에 부시의 얼굴을 장시간 보아야 하는 고역을 겪었는데, 그가 하는 이야기는 거의 하나의 내러티브로 모아진다. 미국은 테러리즘의 위협을 받고 있으며, 그래서 자신은 아프가니스탄전과 이라크전을 통해 그 위협을 성공적으로 제거하였다는 것. 위험한 후세인까지 잡지 않았느냐는 것... 미국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강한 지도력이 요구된다는 것. 오늘도 안보 이야기가 나오자 여지없이 그 레파토리가 재생되어 나온다. 이라크에 대량 살상무기 제조가 없지 않았느냐는 반론에도 아랑곳없다. 그에게 후세인은 아직 테러를 저지르지 않았어도 언제나 그럴 ‘의지’가 있는 악의 존재 이므로... 외교에 대한 공방이 벌어진 2차 토론회에서 주로 이라크 이야기가 많이 언급되었지만, 북한 이야기도 좀 언급되었다. 북한 역시 이 내러티브의 소재이다. 왜 그런지는 못 들었는데, 북한에 대해서도 잘 했다고 우긴다. 클린턴이 망쳐 놓은 대북 관계를 자신이 제대로 해놓았다고 말하는 뻔뻔함+무식함에 소름이 돋는다. 그의 내러티브는 “테러리즘”이라는 애매한 언어에 근거하고 있다. 실체 없는 위협을 가상하고 그 공포를 자기 정치의 자산으로 삼고 있다. 많이 보았던 수법이 아닌가, “빨갱이”의 실체 없는 공포를 기반으로 한 정치 아래 자랐고, 지금도 막강한 정치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에서 온 내가 아닌가.

우리나라 보수층의 천박함과는 분명히 다른 세련된 형태이지만, 보수층의 논리들은 어딘지 많이 닮아 있다. 부시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앞에서 말했듯이 그의 강력한 이미지에 있고, 영어로는 흔히 "리더쉽"이 있다고 표현된다. 케리를 반대하는 이유는 반대로, 그가 미덥지 못하고 지도자로서의 믿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전후 사정은 잘 모르지만, 케리의 베트남 참전 때의 불분명한 행위가 회자되는 바람에, 이런 이야기가 먹혀 들어가 케리가 한동안 지지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이었다. 리더쉽(leadership), 이 역시 기만적인 개념이다. 부시의 강짜를 강함으로 착각하는 미국인들은 박정희 향수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네 어른들과 오십보백보이다. 케리가 리더쉽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우리식으로 하면, 그는 대통령“깜”이 못된다는 것이다. 이 역시 많이 듣던 이야기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기까지 맨날 언론에서 들은 이야기이며, 아직도 많은 국민들의 마음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 ‘그는 깜이 아니야.’
부시가 토론 때 케리를 공격하는 주된 레파토리는 당신이 지금 이 정책을 주장하는데, 옛날 상원의원할 때 다른 법에 찬성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런 사례들을 열심히 조사해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이 역시 케리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이미지를 심기 위한 노력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로 “말바꾸기”를 잘한다는 것이다. 우리 대통령이 늘상 들었던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솔직한 사람이라 그런 공격에 대해 상황에 따라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누누이 해명하는 바람에 더욱 수세에 몰리곤 했는데, 케리의 경우엔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 같다.
요즘 부시는 케리의 정책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중산층의 세금을 올릴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중산층의 불안감을 조성하고 다닌다. 수도 옮기면 서울 집값 폭락한다고 떠들고 다녀 톡톡히 재미를 본 이회창 후보를 벤치 마킹이라도 했나 보다. 시스템이나, 언론, 학계가 조직된 측면들을 보면 미국 정치는 확실히 선진적이다. 시민들의 반응도 훨씬 안정되어 있고 성숙하다. 하지만 정치적 술수의 세계, 잔머리 차원의 논리는 그게 그거라는 생각이 든다.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원시인의 사유와 현대 과학의 사유의 차이는 돌로 만든 도끼와 쇠로 만든 도끼의 차이라고 말했다. 사고 능력의 차이, 사유의 질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유가 적용된 재료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잔머리의 사유의 질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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