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뮐러, 종교학의 회고

by 방가房家 2023. 4. 16.

F. Max Müller, "Science of Religion: A Retrospect," <<The Living Age>> 219-2843 (Dec 31, 1898): 909-913. 파일: Muller-Retrospect.pdf

막스 뮐러의 말년(그는 1900년에 사망한다)에 신문에 기고한 글로, 그가 반세기 가까이 선도해왔던 종교학의 흐름에 대한 정리가 담겨 있다. 1865년 들었던 종교학 강의에 대한 회고로부터 시작해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개별적인 종교사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일반적인 종교로, 추상으로서의 종교를 도출하려는 노력으로 발달되어갔다는 것이다. 헤겔의 예를 들면서 종교 기원에 대한 설명이 이러한 이론화의 노력으로서 제시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문제점은 남아있다. 그런 이론들이 자료로 뒷받침된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는 많은 이론들을 갖게 되었지만, 잘 입증된 사실들은 거의 갖고 있지 않다.”(911)

당시 그의 경쟁자였던 타일러의 애니미즘류의 이론들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된다. 그 이론들의 문제는 믿을만하지 못한 자료를 사용한다는 점이 아니다. “모든 이런 시도들에 공통된 잘못은 종교를 하나로 다루려고 했다는 것, 그리고 한 종교의 원리를 모든 종교들의 원리로 인식하려고 했다는 것이다.”(912)
개별과 보편 사이의 층위가 혼돈된다는 이 지적을 바꾸어 말하면, 비교의 원칙이 제대로 설정되지 않았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흥미롭게도 글의 마지막 부분은 비교연구에 대한 주장으로 채워진다. 그의 논지는 비교종교[학](Comparative Religion)이라는 이름에 대한 불평으로부터 시작된다.

때로는 이 학문이 비교종교(Comparative Religion)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처럼 분명한 종교 관념을 형성할 수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비교 종교를 생각할 수 있을까? 뼈에 대한 비교연구(comparative study of bones)는 비교 해부학(comparative anatomy)이라고 불리지 비교 뼈(comparative bones)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종교에 대한 비교연구가 왜 비교종교라고 불려야 하는가? 차라리 비교 신학(comparative theory)이라든지 종교에 대한 비교연구(comparative study of religion), 혹은 간단히 종교과학[종교학](Science of Religion)이라고 불려야하지 않을까? 우리 시대의 학문 대부분은 비교라는 이름이 붙지 않는다 하더라고 비교 연구를 하게 되었다. 모든 학문이 사실의 비교에 기반하고 있듯이, 종교학 역시 불가피한 신화적 출발로부터 후대의 철학적 고양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럽게 종교들의 비교를 포함할 것이다.(912-13)

그는 비교가 상사(homology), 즉 같은 기원을 가진 것끼리의 유사성에 기반한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한다. 이것은 현재 조너선 스미스의 비교 이론, 즉 비교는 유사(analogy)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과 정확히 반대된다. 그는 상사/유사라는 구분을 갖고 있지는 않다. 역사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우연한 유사성’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기 때문에(즉 유사(analogy)는 불가능하다는 것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구조적인 유사성을 말하는 요즈음의 비교에는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 신학에서는 비교 철학과 마찬가지로 그 출발점은 항상 동종의(homogeneous) 혹은 유기적으로 관련된 종교들—셈족의, 아리안족의, 오스트레일리아의, 아메리카의, 그리고 아프리카의 종교들—을 비교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같은 기원을 가질 수 없는 종교들 간의 일치성을 수집하는 것 역시 가르쳐주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우연한 유사성은 종교들이나 언어들이 계통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연결된 적이 있음이 증명되는 경우에만 진정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913)

글의 마지막은 뮐러 자신의 이론을 매우 순화되고 일반화된 형태로 요약해서 제시한 것이다. 그는 이런 입장이 학자들의 동의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 애써 이야기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당시 학문 현실과는 다른 것이었으리라.

만약 널리 인정받고 있듯이 신화가 자연의 가장 중요한 현상을 시적으로 해석한 첫 시도였다면, 우리는 ‘사물의 모든 원인들’을 알고자 하는 이러한 노력들로부터 ‘사물들의 원인’을 알고자 하는 더 고차원적인 노력으로의 평이한 전환이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아리안족의 말의 특성이 행해진 일이 아니라 행위주체(agent)—즉 행위자(doer)—만을 우선 표현한다는 것임을, 즉 비가 아니라 비가 내리게 하는 이를, 번개가 아니라 번개가 치게 하는 이를 우선 표현한다는 것임을 기억한다면, 어떻게 해서 위대하면서 상시적인, 현존하는 자연의 드라마의 행위주체들이 결국에는 만물의 창시자이자 지배자인 궁극적인 행위주체(Supreme Agent)로 통합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진지한 학자들은 이 점에 대해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분적인 지점에서는 차이가 나고, 실제로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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