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ller, F. Max, "Westminster Lecture on Missions," <<Chips from a German Workshop>> (New York: C. Scribner, 1876), 4: 238-266. PDF 파일: Muller_on_mission.pdf
종교학의 아버지 막스 뮐러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선교를 주제로 한 강연. 이 강연에서 선교사와 친함을 유난히 강조하는 뮐러의 언술은 그만큼 친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으리라. 종교학이라는 불온한 학문을 잉태하려는 학자인 그가 기독교인들에게 환영받았을 리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현실적으로 비서구세계 지식의 채널이 되었던 선교사들과의 유대가 필요했다. 그리고 신앙인으로서의 진정성이 기저에 있는 것도 물론이고.
그는 이 강연에서 세 가지 선교를 이야기한다. 첫째는 부모로서의 선교 상대방을 문명화시켜 기독교인으로 키워낸다는 문명선교의 개념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대화를 통해 설득하여 개종시키는, 우리가 생각하는 선교. 셋째가 뮐러가 강조하는 독특한 관점인데, 그는 기독교 전파 이후 기존의 종교 전통들이 변화(reform)되는 것을 선교의 효과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브라모 사마지’ 같은 힌두교 개혁운동 같은 것. 그는 근대에 의한 종교의 변화를 미신이 정화되고 고대의 순수함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본다. 기독교 선교의 자극으로 다른 종교들도 이른바 진리(여기서 뮐러가 말하는 진리는 하느님의 진리라는 신학적인 의미이다)에 가까운 형태가 된다는 것. 학자 입장에서도 선교사 입장에서도 위험하고 또 유쾌하지 않은 주장을 뮐러는 거침없이 전개한다.
도대체 종교가 개혁되어서 진리에 가까워지면 기독교의 진리와 만나는 것이라고 뮐러가 믿었던 것인지, 아니면 선교사들에게 호소하고자 전략적인 접근을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확실한 것은 여기서 뮐러가 이상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야기에 깔려 있는 것은 찬성하기 힘든 초기 다원주의적 논의라는 것.
눈에 띄는 표현이 하나 있었다. 토착화 은유의 사용이다.
[그들의] 목적은 가능한 한 기독교를 영국에서부터 인도로 통째로(in full integrity) 옮겨심는(to transplant) 것이다. 다 큰 나무를 옮겨심듯이 말이다.(261)
1960년대 우리나라에서 토착화 논쟁의 핵심적인 쟁점이 되었던 은유가 이 당시에 이미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라르도는 이 토착화 은유가 당시 유행한 사회진화론을 배경으로 한 것임을 지적한다. 이러한 옮겨심음의 표현은 혼혈(混血)에 대한 경계심과, 상호섞임을 통해 발전을 도모한다는 인식을 동시에 갖고 있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담론이었다는 것이다. (Norman Girardot, <<The Victorian Translation of China>>, 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