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사_자료/문헌

바이넘, <성스러운 잔치와 성스러운 단식>, 10장

by 방가房家 2023. 4. 16.

아랫글에 이어서 <성스러운 잔치와 성스러운 단식>의 10장 번역문이다. 중세 상징 사용에 대한 핵심적인 분석이 들어있는 부분이다. 남녀의 성차에 따라서 상징 구사 방식이 달라지는 내용을 흥미롭게 분석하였다.
Caroline Walker Bynum, <<Holy Feast and Holy Fast: The Religious Significance of Food to Medieval Women>> (Berkel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7), chap. 10.

ch10. Women's symbols, pp.282-296

남자들의 여성 상징 사용

중세 후기 남성의 저작을 볼 때 우리는 상징적 이분법과 그것의 전도가 그 핵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자들은 남성/여성의 차이성(아버지 대 어머니, 선생님과 훈련자 대 양육자, 강함 대 부드러움 등)을 강조하기 위하여, 여성의 약함을 비난하거나 낭만화하기 위하여 남성/여성의 이분법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다른 곳에서 증명하였듯이, 남자들은 성(性)을 상징으로 사용할 때조차도, 분명히 구분되는 사회적이고 생물학적인 특성들을 각 성에 연관짓는 경향이 있고, 이들 특성들의 짝들을 대립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이그니의 게릭(Guerric of Igny, 1157년 사망)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신랑(그리스도)은 사랑 넘치는 친절이라는 명성과 의무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 가슴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는 자연적인 창조의 측면에서, 그리고 가르치는 권위의 측면에서 볼 때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또 애정과 양육의 온화함에서는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한 무명의 프란체스코회 수사는 프란체스코와 헝가리의 엘리자베스(Elizabeth of Hungary)를 작은형제회(the friars minor)의 부모님으로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아머지이고 그녀는 어머니입니다. 그는 아버님처럼 작은형제회를 이끌어주시고, 그녀는 어머니처럼 먹여 주십니다.” 자신들의 상징적 우주 내에서, 남자들은 남성/여성의 이분법을 권위/양육, 영/육체, 율법/자비, 강함/약함 등의 상징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영혼, 신성과 인성, 사제와 평신도간의 대조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더 넓은 의미에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중세의 남자들에게 하느님은 (긴 기독교 전통을 통해 대부분의 경건한 사람들에게 그러했듯이) 은유적으로 남성―아버지나 판관, 신랑이나 친구―이었고, 영혼은 (부분적으로는 아니마anima의 언어적 성별 때문에) 흔히 여성으로 상징화되거나 묘사되었다. 게다가 남자들의 저작에서 볼 수 있는 성 이분법들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속에 포함된 다른 성 이분법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남자들은 음식의 공급하는 자였고, 여자들은 음식을 준비하고 만들어내는 자였다. 남자들은 사제이고 여자들은 평신도였다. 남자들은 의식(office)이나 서품(ordinance)에 의해 권위를 갖게 되었고, 여자들은 영감이나 에스터시 체험에 기인한 종교적 힘을 가졌다.
이러한 이분법들 근저에 어떤 다른 유형들이 놓여있다 하더라도,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만약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정신과 육체의 관계, 음식 공급자와 음식 생산자, 성직자와 평신도, 의식(office)과 영감, 율법과 자비, 신성과 인성의 관계와 같다면, 그렇다면 남성으로 상징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이나 생물로부터 벗어난, 문화의 생산물이다. 그래서 여성이 영감 대 의식 육체 대 정신을 모두 상징한다고 하는 것은, 얼핏 보기에는 일관되지 못하고 심지어는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 조합들 뒤에는 일관된 이분법이 놓여있다. 근본적인 대립은 (1)자연과 반대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세워진, 법률, 유형, 형태의 구성물들과 (2)더 본능적이고 내면적이고 생물적인 ‘인간 본성’ 사이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육체는 자연적이고 영적인 것은 문화적이다. 마치 예언자의 영감이 내적이고 주관적이고 자연적인 반면에 사제적 권위가 인격적 도덕과 경험적 자격으로부터 독립적인, 외적이고 문화적 구조인 것처럼 말이다.
최근에 구조인류학자들은 그러한 이분법이 인간의 상징 체계의 기본적인 대립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왔다. 나는 그들의 도식, 특히 세리 오트너(Sherry Ortner)의 도식에 영향을 받았지만,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오크너의 이론의 문제점, 즉, 여성과 같은 한 사회의 하위집단들이 지배 문화 집단에 의해 사용되는 상징 이분법에 대해 다르거나 심지어는 반대되는 견해를 취할 가능성을 무시하는 식의 바람직하지 못한 보편주의로 경도될 수 있다는 위험을 지적한, 그녀에 대한 비판자들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문화/자연의 이분법이 남성과 여성 간에 객관적으로 타당한 이분법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그것이 1200년과 1500년 사이 남성들의 저작과 종교적 신행에 만연한 유형적 상징임을 지적하고자 할 뿐이다.
남자들에게 그러한 상징 유형은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교회를 성직자로 보고, 자신들의 성을 하느님의 신성에 대한 상징으로 보고, 사제의 중개를 하늘과 땅 사이의 다리를 놓는데 필수적인 것이라고 보았던 동일한 남성 작가가, 그들 역시 타락한 인류의 몫을 함께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설교한 것을 알았다. 그들의 경건함은 그러한 모호함을 반영한다. 점차 그들은 하느님의 권위보다는 예수의 접근가능성을 강조하였으며, 심판의 날이나 부활보다는 친구를 위해 자신의 삶을 내버린 한 남자를 강조하였다. 그들은 평안과 조언을 위해 여성 환시가들에 의존하였고, 자신들이 더 이상 직접적인 영감을 받을 수 없는지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분명히 부차적인 주제이지만 그럼에도 매우 논쟁적인 주제로서) 예수를 어머니로, 자신들을 여성으로 말하였다.
어떤 때는 자신들을 여자라고 부르면서 남성 작가들은 여자를 욕설의 용어로 사용하였다. 푸로아드몽의 엘리난도(Helinand of Froidmont)는 다음과 같이 그의 형제들을 욕한다. “하느님이 남자들을 여자들에 비교하신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것도 그냥 여자가 아니라 월경중인 여자에!” 그러나 그들은 여자를 하느님에 대한 의존의 상징으로 더 빈번히 사용하였다. 자신들을 하느님에 의해 사랑받는 것으로 묘사하는 방법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세속적 권력과 명예를 포기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방법으로서 말이다. “모든 신도들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all the Faithful)에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덕스러운 수사를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덕스러운 수사야말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형제이며, 어머니입니다. 그의 신실한 영혼이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와 합치될 때 그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마태복음 12장 50절)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그의 형제입니다. 그리고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에 의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과 몸에 들이고, 모범으로써 남을 깨우치는 선한 행동을 통해 그를 태어나게 할 때, 우리는 그의 어머니입니다.

선교지에 세 명이나 네 명씩 무리를 이루어 가는 수사들에 대해 말하며,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 중 두 명은 어머니로 행동해야 하며, 나머지 둘 혹은 한명은 그들의 아이로 행동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마르타의 삶을 살아야 하고, 다른 두 명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머니인 수사들은 외부자들을 멀리하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아들인 수사들은 어머니나 상급자(custos)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수소(Suso)는 스스로를 장미를 줍는 하녀, 어머니의 가슴에 코를 비비는 아기로 보았다. 루이스부뢰크(Ruysbroeck)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남자의 본성은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남성 작가가 다른 남자를 여자로 묘사했을 때나(예를 들어 보나벤투라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에 대해 말할 때) 한 남자(예를 들어 리차드 로엘(Richard Rolle)이나 수소)가 자신을 그런 식으로 묘사했을 때, 그는 상징의 전도(顚倒)를 사용한 것이다. 남자는 ‘남성적’ 권력, 권위, 지위의 상실이나 포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은유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여자가 되었다. 에크하르트가 말했던 대로, 남자는 하느님을 안에 잉태하는 능력, 다산성을 표현하기 위해 여자가 되었다. 그러한 전도는 그 핵심에 역설과 성육신, 즉 ‘하느님이 인간이 되심’이 자리한 종교에 필수적인 것으로 보인다. 타울러(Tauler)가 하느님 앞에서의 완전한 자기비하, 완전한 발가벗김과 비움의 상징을 찾았을 때, 그는 단지 마태복음 15장 21-8절의 불쌍한 가나안 여인―자신을 개보다도 비천하다고 했던―만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환시를 받아 창조와 창조주 사이의 모든 매개물들이 소거된 상태에 있었던, 그래서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지옥에 가라는 저주를 받아들이겠노라고 하느님 앞에 울부짖은 동시대의 여자들을 또한 인용하였다. 그러한 설교에서 ‘여자’는 전적으로 경멸받는 이, 속죄받은 이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복음의 핵심에 있는 위대한 전도, 즉 경멸받는 이가 속죄를 받는다는 사실에 대한 상징인 것이다.
(앞 장에서) 살펴본 음식과 육체 이미지는, 앞서 설명한대로, 상징의 전도의 특별한 사례이다. 중세 후기 사제의 역할과 그리스도 본받기(imitatio christi)의 신학의 많은 부분이 성에 대한 문화적 전제의 전도와 관련되어 있다. 물론 한편으로는 주어진 상징 유형에서 사제는 ‘남성’이고 성체 수령자는 ‘여성’이다. 잘 알려진대로, 보나벤투라는 사제권, 신의 권위는 남성에 의해 상징되어야 하기 때문에 여자가 사제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내가 증명한 대로, 다른 의미에서 하느님의 죽는 몸은 여성―낳고 젖먹이는 어머니―이고 사제 역시 여성이다. 사제는 성모였다. 왜냐하면 그의 손 안에서, 성모의 자궁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가 화육하기 때문이다. 그는 음식의 준비자이며 그것을 먹는 수령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자였다. 미사의 핵심적인 순간에, 남성 집전자는 인간 아이들의 복리를 위해 아버지-어머니 하느님으로부터 제공받은 천상의 음식, 상하기 쉬운 성체를 돌보고 분배할 준비를 하기 위해 기다렸다.
도상학적인 증거들에 의해서도 미사가 성적 전도를 함축한다는 점이 제시된다. 중세 후기에는, 최후의 만찬 때 음식을 나누어주고 손님들의 발을 닦아주는 그리스도의 그림들이 왕이나 사제로서 그리스도를 형상화한 것보다 많았다. 그러한 그림들에서 그리스도는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의 역할, 즉 음식의 준비자와 봉사자의 역할로 묘사된다. 울름에 있는 15세기 병풍화(retable)에서 그러한 전도를 볼 수 있다. 바깥 날개(닫혔을 때)에는 봉사자와 음식 분배자로서의 그리스도가 (많은 여성 신비가들이 가짜 사제를 시험하는 것처럼) 유다를 성체로 시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열렸을 때 병풍화에는 성찬이 성배에 담긴 성체와 방앗간에서 갈린 밀가루의 두 가지로 표현되어 있다. 성모와 네 복음서 기자들이 곡물을 깔대기에 집어넣고(즉, 집전하고) 있다. 사도들은 크랭크를 뒤집고 있다. 교회의 고위성직자들, 그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수령인으로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그리하여 중세 말기 남성 작가들, 예술가들, 숭배자들, 사제들은 날카로운 상징 이분법을 사용하였고, 그들의 가장 심오하고 호소력 있는 이미지는 상징의 전도였다. 게다가 남자 자신의 삶의 이야기들이 갈등과 회심의 이야기가 되는 경향이 있었다. 스스로를 발가벗기우며(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아버지 앞에서 했던 것처럼), 아이, 거지, 여자에게 옷을 벗어주며(리차드 롤이 수도처에서 했던 것처럼), 부, 영향력, 부인을 갑작스럽고도 극적으로 포기하고 청빈과 순결을 택하면서(요한 콜롬비니가 했던 것처럼), 그들은 상징으로 사용한 전도를  실현하였다. 1장에서 지적한 바대로, 중세 여자보다는 중세 남자들이 더 많이 사춘기에 삶의 스타일의 갑작스런 변화를 겪었다. 권력과 가족의 부에 더 잘 접근할 수 있었기에, 남자들은 더 갑작스럽고 현란하게 그것들을 떨쳐버릴 수 있었고, 세계를 등진다는 충동에 사로잡힐 때에도 소년들이 소녀들보다 평균적으로 오랫동안 사로잡히는 것으로 보인다.
남자들이 대조, 대립, 전도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구조 인류학자들은, 강함/부드러움, 남성/여성, 율법/자비, 이성/비이성의 이분법적인 이미지들이 강한 부계 계승의 유형의 문화에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고 때때로 주장한다. 그런 사회에서 여성은 (출산을 위해 필수적이긴 하지만) 파괴적인 힘, 법률과 구조 바깥의 힘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설명은 그럴 듯하긴 하지만 중세 말기 심상의 미묘함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분법을 설명하기는 해도 전도를 설명해주진 못한다. 심상을 사회 구조에 연관시키는 다른 설명 방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것은 단지 중세 말기 지위의 단계들이 대부분 남성 지위의 단계들이었음을 주목하는 것이다. 12, 13세기 저술들을 특징짓는 지위와 역할의 복합성을 차츰 알아나가는 것은 순전히 남성 역할의 복잡성을 깨달아가는 것이다. 조르주 뒤비가 지적하였듯이, 여성은 중세 사회의 ‘세 위계(three orders)’, 즉 기도하는 자, 싸우는 자, 밭갈이하는 자의 바깥에 위치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수녀들은 어떤 의미에선 ‘성직자’이긴 했지만(즉, 그들은 ‘규율을 지켰고’ 서약을 했다), 다른 의미에선 모든 여자들이 평신도였다―즉, 서품(orders) 바깥에 있었다. 1장에서 말한 대로, 여자들은 흔히 규율과 서약을 피하면서 고도로 구조화된 제도적 형태들을 회피했다. 그리고 여자들에 대한 남성들의 특성 분류는 통상 결혼이나 성적 지위―과부, 처녀, 유부녀―에 따른 것이지 제도적 소속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들과 똑같은 의미에서의 역할과 지위의 사다리 ‘위에’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역할 전도, 권력과 지위의 전복이라는 복잡한 심상들―바보가 왕이 되고, 꼬마가 교황이 되고, 남자가 여자가 되거나 여자가 남자가 되는―이 남자들에게 더 호소력이 있었던 것은 놀랍지 않다. 그들에게는 정확한 사회의 단계들이 자명해서 주기적으로 풀어줄 필요가 있는 심리학적 무게를 지녔던 것이다.
남자들이 이분법과 전도를 선호한 것에 대해서 심리학적이고 신학적인 이유도 있다. 몇 명의 이론가들이 최근에 지적할 대로, (중세든 현대든 서구 사회에서) 소년의 성숙은 근본적인 자기 이미지의 단절을 요구한다. 소년은 자아의 최초의 투사이자, 첫사랑이고, 첫 모델인 어머니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소년의 성장은 여성이 아닌 다른 것이 되는 것을 배우는 것이고, 그것은 그의 욕망과 자기규정을 전도하고 여성을 ‘타자’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남성이 영적인 성장에 대해 사유하고 상징화함에 있어 전도와 회심이 중심이 되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게다가 남자들이 생산한 상징적 이분법의 속성에는 자체로 전도의 압력을 포함한다. 비천하고, 낮고 ‘가장 나중에 오는’ 자가 결국에는 가장 먼저 오게 되고, 그래서 남자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과정을 말할 때 전도된 상징(예를 들어, 여자, 아이, 바보로서의 영혼)을 찾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 신학만이 아니다.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있다고 스스로를 지칭한다는 점에서, 문화적 구성물인 남성 상징들 자체가 반대편의 것에 대한 인식을 강제하는 것이다. 남자들은 자신들이 단순히 ‘신성’, ‘성직’, ‘영적임’, ‘권위’인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상징들이 ‘남성’을 문화와, 즉 인간의 본성 ‘이상의 것’ 그리고 본성과는 ‘다른 것’과 연관시키기 때문에, 이 상징들은 남자가 인간의 본성을 갖기 위해서는 남성이 상징 내에서 자신의 반대의 것을 취해야 함을 함축하고 있는 셈이다. 남자들 자신에 의해 남성다움에 연관지어진, 특정 집단의 문화적 활동, 책임, 그리고 상징들은 대조되는 것과 전도를 함축하고 있다. 동일한 방식으로 여성다움과 연관된 일련의 활동, 책임, 상징들은 반대편을 함축하지 않는다. 여성다움이 상징하는 것―양육, 육체, 평신도, 인성, 내적 영감―은 사람됨을 이루기 위해 다른 것들―예컨대, 권력, 영적인 것, 의식, 신성―을 요청하지 않는다. 사람됨을, 됨됨이를, 주어진 종교적 의미를 이루기 위해 전도가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만 함축된 것은 아니다. 기독교에서 여자들은 이미 주어진 종교적 의미이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사실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구 전통에서 남성/여성 주위에 형성된 이분법적인 상징 체계 자체가, 남자들―힘 있고, 성직자이고, 권위적이고, 이성적이고, ‘신적인’ 남자들―이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약하고 인간적이지만 영적인, ‘여자’가 될 필요가 있다고 제시한다. 그리고 중세의 남성 작가들은 자신에게 그러한 전도된 심상을 많이 사용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흔히 전도된 심상과 이분법적 상징들이 여성의 경험에 대해 숙고하는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남성 작가들은 여자들이 하느님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남성’이나 ‘사내’가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남성 성인전 작가들과 연대기 저술가들은 여자들이 종교 시설에 들어가기 위해 옷을 바꿔입는 이야기들에 ―아마 이런 이야기들을 꾸며낼 정도로― 매료되었다. 남성 작가들은 여자들의 성적 유혹을 강조함으로써, 또 여자의 부드럽고 섬세하고 변덕스러운 육체가 금욕주의에 적절치 않음을 상술함으로써, 여성의 약함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수소는 영적인 딸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너는 낙원의 이브보다 연약하다.” 루뱅의 이다(Ida of Louvain)의 전기의 편찬자는 그녀가 “여자처럼 굴거나 게으르지 않았고, 남자처럼 한결같았다”고 말함으로써 그녀를 칭송하였다.
13, 14, 15세기의 남자 종교인들이 여자들에게 매료되었다는 증거는 많이 있다. 그 여자들은 자신들의 비천함을 통해 높은 곳의 하느님의 대리인이 되었던 여성 환시가들이었고, 예수가 인류를 대속할 때의 자신을 낮추었던 깊이를 상징하는 평범한 어머니들, 가정주부들, 세탁부들, 하녀들이었다. 앞의 3장에서 이야기한대로, 베르나르, 롤, 수소, 타울러, 에크하르트, 거손과 같은 남성 신비가들은 여자들에게 조언하였고, 여자들을 존숭하였으며, 여자들을 혐오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접근을 언급하기 위하여 여자―그들보다 비천하고 육체적인 여자―의 이미지를 채용하였다. 자신들을 양육하는 어머니나 젖먹는 아기로 묘사함으로써, 이들 남자들은 자신을 성인과 남성의 반대편으로 변환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자신의 변환을 발가벗음, 가난, 고난, 약함의 편을 드는 것으로 말하면서, 그들은 세계를 성인 남성의 지위에 연결시켜주는 부유함, 강함, 공적인 힘에 대한 특권들을 일반적으로 부정하고 뒤집고 있었다. 만약 남성 저자들이 자신들을 신부, 어머니, 아이들로 보기를 좋아했다고 한다면, 그러한 전도된 이미지들은, 남자가 자신의 기본적인 종교적 헌신을 권력과 영광을 위한 싸움으로 보아야 했던 상징적 세계에서 단지 하나의 은유의 조합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었다. 왕과 고위 성직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어떤 권력을 휘둘러대든 간에, 예수 자신은 권력에서 벗어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의 연속성으로서의 상징들

여성 저자들 역시, 남성들과 동일한 상징 전통 내에서 동일한 의례를 행하는 중에 자신의 종교적 열망과 공포들을 표현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내가 방금 기술한 이분법들의 묶음을 사용하고 숙고하였다. 몇몇 여자들의 음식과 육체의 이미지들은 그러한 이분법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심오한 전도이기도 하다. 성만찬에서나 신비적 결합에서나, 여자들은 문화에 의해 전제된 대로 전환하였다. 십자기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이 상징적인 전도였던 것처럼―왜냐하면 그가 남성(왕이나 사제, 양육의 수혜자)이 된 것이 아니라 여성(젖먹이고 기르는 어머니, 남을 양육하는 자)이 되었기 때문에―, 여성 성체 수령자도 성적 전도를 경험하였다. 그녀는 양육자나 남을 먹이는 이가 아닌, 받는 이가 된 것이다. 미사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역할은 일상 사회의 역할을 뒤집는 것이었다. 집전자는 음식의 준비자, 음식의 생산자, 화육한 하느님을 밴 어머니가 되었다. 반면에 여자 수령자들은 눈으로나 입으로나 그녀가 준비하거나 내어놓지 않은 음식을 향유하였다. 환희에 차고, 환시로 연결되고, 흥분되는, 여자들의 하느님 먹기는 음식 준비하기와 아이 낳아 기르기라는 일상의 여성 역할의 반대편의 것이었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에서, 여자들의 하느님 먹기가 전적으로 전도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미사와 신비적인 황홀경에서 여자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전제하는 음식과 육체의 더 충실한 형태가 되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그리스도와의 결합에서, 여자들은 충분히 육체적이게 되고 자아를 먹이게 된다. 산출하며 고통받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여자의 먹음, 단식, 남을 먹이기는 같은 뜻의 행위인데, 이것은 세 행위 모두에서 여자는 고통받음으로써 정말로 세계를 대속하는 우주적 고통에 합쳐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세 가지 동일한 의미의 행위들과 상징들은 궁극적으로는 상징적 전도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여성이 상징하는 바―육체적임, 양육함, 고통받음, 인간다움―의 변형이며 되어감이다.
여자들의 음식 이미지와 음식 실천은 그러므로 더 큰 양태를 반영한다. 왜냐하면 여자가 상징을 사용하고 종교적이 되는 방식은 남자와 다르기 때문이다. 여자의 방식은 더 큰 텍스트 내의 하위텍스트로, 이분법적 상징과 상징의 전도에 지배받는 것처럼 보여지며, 항상 남성/여성의 대립과 전도의 이미지를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적 자아에 대한 여자의 감각은 사회적 생물학적 자아에 대한 감각과 더욱 연속성을 지닌다. 즉 여자들의 이미지들은 ‘여자’임의 가장 깊은 심화이지 전도가 아니다. 여자들의 상징은 종합과 역설보다는 부정과 대립을 표현한다.
여자들의 종교적 저작들의 이러한 특성은 그것들을 연구한 훌륭한 학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주목받아 왔다. 비록 그 주목이 이론적인 틀 내에 자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바론 폰 휴겔(Baron von Hügel)은 제노아의 카타리나(Catherine of Genoa)가 역 혹은 역설의 동시성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논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왜냐하면 동시성의 요소, 신과 같은 동시적 전체(Totum Simul)라는 유기적 해석의 요소야말로 이러한 가장 깊은 순간에 주로 그녀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브랜트 펠퍼리(Brant Pelphery)는 노르위치의 율리아노(Julian of Norwich)의 신학에 대한 연구에서, 율리아노가 죄를 인간이 되는데 있어 (고통스럽지만)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보았으며, 하느님과의 일치라는 그녀의 이론이 ‘저 높이 올라간’ 영혼의 ‘단계’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자아와의 연속성, 예수와 함께 진정한 인간이 됨과 관련된다고 주장하였다. 피터 드론키(Peter Dronke)는, 마가렛 포레테(Margaret Porete)와 몽타이유(Montaillou) 여성 이단에 관해 기술하면서, 죄에 대한 여성의 접근이 독특하다는 점과 여자들의 저작에 ‘아포리즘’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말하는데, 그러면서 여성들이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or)이라는 규칙을 피했으며 단일하고 본질적으로 적합한 해결을 대체하였음을 지적한다.
이 모든 것들은, 남성 신비가들이 역설을 사용하지(그런 사례로는 쿠사의 니콜라스를 생각할 수 있다) 않았다거나, 남성 신학자들이 그러한 역설적 종합을 천국과 지옥의 조화에 이르기까지 밀고 가지(오리게누스를 생각할 수 있다) 않았다거나, 남성 참회자들이 하느님에 이르는 우주 위계의 단계들을 예수 안에서의 자아와의 연속성으로 대치하지(프란체스코를 생각할 수 있다)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데위치(Hadewijch), 마가렛 포레테, 혹은 제노아의 카타리나에서 나타나는 역설의 폭발, 막데부르크의 메칠드(Mechtild of Magdeburg), 노르위치의 율리아노에서 나타나는 지옥에 대한 격한 부정, 중세 말기 모든 여성 종교인들을 실질적으로 특징짓는 인간이 된다는 겸양(humiliation)에서 비롯한 달콤한 비하, 이것들은 일관된 유형을 이루는 것으로 남성 종교인들에게는 간헐적으로만 발견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유형 뒤에는 모든 것은 하나―즉 율리아노가 말한 대로 하느님의 손에 쥐어진 헤이즐넛―라는 확신이 놓여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가장 비열한 인간성이야말로 속죄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Me)가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곧 여성 종교인들이 자기가 여자이기 때문에 자신을 인간으로 보았고, 자기가 여자이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최근의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에 비추어볼 때 좀 이상한 주장으로 비춰질 것이다. 예를 들어 조 앤 맥나라, 로즈마리 류터, 마리 델쿠르, 그리고 마리나 바그너는, 서구 전통의 남성들은 여성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여자들은 영적인 진전을 의미하기 위해 상징적인 남성다움(혹은 최소한 여성다움의 포기)을 취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들은 여성들이 자신의 용기를 ‘남성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 교부 시대의 몇몇의 흩어진 참고문헌만을 인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또한 많은 (대부분 교부시대의) 성인들의 복장도착 이야기―결혼(혹은 강간)을 피하기 위하여, 혹은 수도원에 들어가기 위하여 여자가 남자로 변장한 이야기―들을 인용하였다. 그들은 또한 잔다르크(Jean of Arc)를 인용하였다. 그러한 저작들은 성의 전도가 여자들에게 강력한 상징이었다고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최근의 연구들은 중세에 남자에 의한 옷 바꿔입기가 매우 드물었음(그리고 어떤 때는 성적 도착으로 탄압받았음)을 알려준다. 잔다르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중세 후기에도 그녀의 옷 바꿔입기와 유사한 사례들이 있다는(그래서 그들의 사례를 약화시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중세 후기 여성들이 특히 가족에서 벗어나거나 순례를 떠나기 위해 남성의 복장을 채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나는 전도, 특히 성의 전도가 여성의 종교성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나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여자들에게 옷 바꿔입기가 일차적으로 실용적인 수단이었던 반면에 남자들에게는 종교적 상징이었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가족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강간과 강탈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군인, 순례자, 은수사와 같은 남성 역할을 맡기 위해서, 때때로 남성의 옷을 입었다. 그러나 수녀원 담장이나 은둔지에 의해, 제삼의 신분에 의해, 절제의 실천에 의해, 신비적 영감에 의해, 혹은 기적적인 인에디아(inedia, 역주: 음식물 없이 살 수 있도록 개인의 식습관을 바꾸는 능력. 우리 주변의 단학 수련에서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됨)에 의해 일단 세속으로부터 벗어난 뒤에는, 여자들은 자신의 삶을 여성의 이미지로 말하였다. 그들은 자신을 그리스도를 위한 전사로서가 아니라 신부로, 잉태한 처녀로, 주부로, 하느님의 어머니로 보았고 그렇게 은유적으로 말하였다. 아마도 옷 바꿔입기가 여자들에게 급진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사회적 단계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가장 강력한 자신의 상징은 아니었던 것이다. 반대로, 실용적인 단계로 옷 바꿔입기를 하지는 않았고 불명예 이외에는 사회적으로 얻을 게 없었던 남자들에게는 성적 전도는 매우 논란의 여지가 많은, 심지어는 무시무시한 상징이었다.
어떤 경우든, 여성의 옷 바꿔입기가 중세 남성들에게 발하는 매혹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심상에 관련된 증거는 뚜렷하다. 종교적 자아에 대한 여자의 기본적인 이미지들은 전복된 이미지도, 남성이미지도 아니다. 여자들이 성을 이미지로 사용할 때, 그들은 보통 자신들을 남성 하느님에 대하여 여성이나 양성구유로 이야기한다. 막데부르크의 메칠드, 빙엔의 힐데가르트, 시에나의 카타리나, 마저리 캠프는 자신을 가련한 여인, 무식하고 약한 자로 언급하였다. 힐데가르트는 실제로 영성체를 받을 때 자기 수녀들에게 신부 옷을 입혔다. 마저리는 하느님을 부인과 어머니로 말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카타리나는 어릴 때 초기 복장도착의 성인을 모방하기를 원하기도 했으나, 어른이 되어서는 그러한 전도가 꼭 필요하지는 않다는 환시를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들었다. 하느님은 그녀가 비천한 여인으로서 남을 가르치고 영감을 불어넣어주기를 더 바랬던 것이다.
9장에서 설명한대로, 여자들의 여성 이미지 사용은 하느님께 접근이나 경건함에 있어서의 무능력함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피터 드론키는 ‘가련한 작은 여인’이라는 수사가 때때로 신의 영감에 대한, 하느님에 의해 선택된 도구나 대변인이 됨에 대한 역설적 주장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어떤 여자 작가들은 심지어 그러한 역설을 넘어서기도 한다. 예를 들어 노르위치의 율리아노는 자신의 <<현시>>(Showing)를 더 길고 신학적으로 대담하고 정교화된 형태로 확장하면서 여성의 무능력에 대한 언급을 삭제하였다. 게다가 자신에 대한 여자들의 이미지는 흔히 양성구유적인데, 이것은 그들의 ‘어머니다운’이나 ‘여자다운’ 것에 대한 이해에 문화적으로 정형화된 ‘남성다움’의 특성(훈육이나 평결같은)이 흔히 포함되기 때문이다. 제르투르다(Gerturde of Helfta), 하데위치, 카타리나(Catherine of Siena), 율리아노(Julian of Norwich)는 모두 영혼과 하느님을 묘사하면서 성 이미지와 인격적 특성들(부드러움, 엄함, 사랑, 훈육과 같은)을 너무 강렬하게 뒤섞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저작에서 간헐적으로만 영혼과 여성, 하느님과 남성의 연결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결국, 더 큰 문화에서 여성으로 여겨지는 자기 활동이나 특성들(예를 들어 젖먹이기, 음식 준비, 약함과 육체적인 것)과 여자들 자신의 상징들이 연관되는 그 곳에서, 여자들은 남성/여성의 대립을 강조하기 보다는 이들 상징들을 확장하여 모든 사람들에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자신을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상징화하는 여자들의 감각은 인간이라는 개념을 남성/여성의 이분법 너머로 이동시킨다.
예를 들어 빙엔의 힐데가르트는 (여기서도 그녀는 당대의 남성 신학자들에 비해 보완성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남성과 여성이 사회적, 생물학적, 종교적 역할이 다르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가장 심오하게 여성을 상징으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남성과의 대조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여자’는 현대의 작가들이 말하는 ‘인류’였다. 힐데가르트의 구원의 환시에서 ‘여자의 이미지’―즉, 인류―는 십자가 아래 서서 그리스도의 피를 받는다. 두 세기 후에 카타리나(Catherine of Siena)는 여자는 연약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과 다른 여자들에 대해 말한 것을 보면, 그들은 모두 어린이들이며 그리스도의 인성의 가슴으로부터 고난의 우유를 빨아먹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들의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은 고난을 먹이는 어머니와 하나된 젖먹는 아이이며, 그 고통은 세계를 구원한다. 아이는 어머니였다. 먹음은 남을 먹이는 것이었다. 고난은 풍요였다. 그러한 이미지들은 이분법을 넘어서면서, 또한 여성의 일상적인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또 그것을 표현한 것이다. 여자들의 이미지들은 지배적인 신학 전통의 상징적 대립에 의해 알려지고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 자신은 이분법도 그것의 전도도 아니다.
남자들의 삶이 그들 상징의 이분법적 본성에 강하게 상응하는 실제의 회심과 전도를 보여주는 것처럼, 여성들의 실제 삶도 그들의 연속성의 상징에 상응하여 전도를 덜 보여준다. 1장에서 언급한대로, 웨인스타인과 벨은 여자의 삶의 유형이 더 적은 단절을 보여줌을 증명하였다. 단절보다는 어릴적부터 들어와 천천히 강화되는, 서서히 동터오는 소명이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는 순전히 여자가 아주 힘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비롯한 문제, 또한 구혼자, 남편, 아이들, (순결이나 빈곤의 소명이 사춘기나 성인 때 온 경우) 아버지의 명령에 직면하여 겪는 큰 어려움에서 비롯한 문제인 것은 아니다. 많은 수의 중세 성인들의 삶을 조사해보면, 소녀들은 (소년들과 달리) 흔히 여덟 살 이전에 그들이 결혼을 피하고자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한 여자들에게 처녀성과 가족들이나 수녀들에 대한 겸허한 봉사는, ‘결혼한 여자’라는 사회적 지위로부터 탈출한 것만큼이나 또한 어린 시절의 연장이기도 하다.
남성들의 상징 사용에 했던 동일한 설명을 여성들의 사용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장하는데 있어 근본적으로 ‘타자’ 개념이 필요 없었던, 소녀들의 더 연속적인 자기 발달은 여자들이 이분법적인 심상을 피한다는 것과 일상 경험에 더 가까이 삶의 측면들(먹기, 고난, 젖먹이기)을 상징으로 정교화하는 경향을 가진다는 점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여성주의 심리학에 따르면 서구의 아이기르기 유형의 심대한 불균형은 여자 아이들로 하여금 이원적 대립과 ‘타자성’에 대해 덜 극단적이도록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게다가 어떤 의미에서는 중세 후기 유럽의 지위(ordines) 바깥에 있는 여자의 자리는, 왜 지위 전도의 이미지가 그들에게 덜 관련되고 덜 흥미로운 것으로 보였는지를 설명해준다. 최근에 구조 인류학자들은 이분법적인 상징들―특히 문화/자연이라는 근본적인 이분법―이 ‘문화’와 동일시되는 사람들의 권력을 표현하고 또 지지해주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어떠한 설명을 제기하든 간에, 여자가 상징을 살아가고 사용하는 방식이 남자와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 차이는 단지 무슨 상징이 선택되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상징이 자신과 관련되는가에 있다. 남자가 남성/여성의 대조를 강조하고 하느님에 대한 의존을 표현하기 위하여 전도의 심상을 사용하는 반면에, 여자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신의 성으로부터 유추되고 상징적 전도를 피하는 심상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의존을 표현한다. 남자들은 여자의 속성에 대해 글을 쓰지만, 여자들은 성에 대해서(남성 대 여성)가 아니라 영혼과 인성에 관해 글을 쓴다. 그러므로 남성/여성의 이분법이 다른 여러 대립들에 대한 상징이 되는 남성 전통의 영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나는, 여성들이 스스로 모습을 갖춘 은유와 이미지들을 사용하는 의미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여성들의 의미가 지배적 신학 전통의 상징적 이분법에 의해 형성되고 영향받았음은 분명하다. 하느님, 정신, 힘은 남성적인 반면에 영혼, 육체, 연약함은 여성적이라는 오래된 관념으로부터, 여자들은 자신들의 고통스런 인성이 우주적 의미를 갖는 영성을 위한 영감을 이끌어 낸 것이다.


결론

중세 여성들에게 음식이 종교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하면서, 나는 두 개의 더 큰 주제를 다루었다. 하나는 중세 금욕주의의 성격이고 다른 하나는 중세 종교에서 성차의 중요성이다. 이 책은 이 주제들 이상의 것들은 다루지 않았으며 그것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취해야할 방향도 제시하였다. 마무리하는 마당에 그것들을 다시 강조하는 것도 괜찮을 성 싶다. 왜냐하면 이들 두 주제에 대해 내가 말한 것이 옳다면, 중세에 대해 흔히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들이 뒤집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6, 7, 8, 9장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중세 금욕주의는 이원론, 즉 육체에 반대되는 영혼, 혹은 육체에 갇혀있는 영혼이라는 극단적인 의미에 뿌리를 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13세기에서 15세기까지의 풍성한 고행 실천들, 고통과 인내의 수련, 십자가의 고행 본받기(imitatio crusis) 등은 기본적으로 육체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시도가 아니다. 그것들은 영혼이 그 반대인 육체와 투쟁한다는 인식론, 심리학, 신학의 산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역사가들이 흔히 주장하듯이 역병, 기아, 이단, 전쟁, 교회의 부패에 의해 좌초된 사회에 대한, 현세부정적이고 자기혐오적이고 퇴행적인 반응이 아닌 것이다. 중세 말 금욕주의는 그보다는 육체의 모든 가능성들을 탐구하고 실현시키고자 한 노력이었다. 금욕주의는 성육신 교리, 즉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심을 통해 인류 모두를 구원하였다는 교리의 심오한 표현이다. 금욕주의는 하느님의 오심이 연한 살로 된 음식이 되는 제의가 중심이 되는 종교 세계에서 생겨났다. 그것은 사물의 본성을 추상적 정의가 아니라 개별화된 사안이나 특수성에 놓는 새로운 철학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두들겨 맞는 것은 ‘완벽한’ 행복’이라고 제자들에게 말했고, 오나시오의 베아트리체는 손바닥을 못으로 후벼팠고, 몽토의 도로시와 오베르바이마르의 루카디스는 십자가 수난 순간의 기괴한 몸짓을 따라 자기 몸을 비틀었고, 산 기미냐노의 세라피나는 마비되었다는 이유로 경배를 받았다. 이들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우울해하거나 겁먹은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워 하였다. 그 성인들은 죄의식으로 인해 능력 이상으로 몸에 반하는 행동을 하거나 몸을 괴롭혔다기 보다는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오르기 위해 모든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영역의 가능성들을 사용한 것이다.
앞의 다섯 장에서 중세 금욕주의가 기본적으로 이원론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중세 여자들이 여성은 열등하다는 사회적 관념에 속박되고 억눌린 존재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였다. 여성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이원론이나 여성혐오를 내면화한 것이 아니다. 여성혐오주의자 글쟁이들은 가끔 여자를 성적 유혹과 동일시하고 남성/여성의 대립을 우월/열등, 강함/약함, 영혼/육신의 이분법으로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여자에 대한 남성 신학자나 전기작가의 생각을 여자 자신에 대한 여자들의 생각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자들과 남자들은 동일한 상징과 교리의 우주 속에 존재했고 같은 경전과 같은 설교에 의해 가르침을 받았다. 여자들은 자신이 열등한 존재로 전제된다는 것을 뚜렷이 알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 점에 대해 논평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하느님을 향한 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나는 앞에서 몇몇 여자들이 자신의 성적 충동 때문에 자신을 어떻게 학대하였는지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용 가능한 상징과 교의 중에서 여자와 남자는 다른 상징을 선택하였다. 남자는 부와 권력을 포기하는 상징을, 여자는 음식을 포기하는 상징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상징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였다. 지배자인 남자는 자신의 지배를 포기하기 위하여 상징(그 상징들 중에는 남성/여성의 이분법도 있다)을 사용하였다. 남자들의 상징 사용 방식의 핵심에는 전도와 대립이 있었다. 중세 말기에 남성과 대조되는 여성의 이미지는 남자들에게 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여자들에게는 남성/여성의 대조는 확실히 관심의 대상이 못 되었다. 생물적이거나 사회적 경험으로부터 일반적으로 취득되고 표현된 여성 자신에 대한 상징들은 전도나 현세적 이익의 포기같은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과 연관될 때의 일상적인 인간 경험을 심화시키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상징들을 통해 여자들은 문화에 의해 부여된 자아를 내어주고 십자가 위의 육체에 더 멋있고도 무섭게 합치되어 가면서 고통을 확장하였다. 그들은 자신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자신의 연속체인 몸이 되었다. 그 몸은 하느님이기도 해서 역설로 하느님의 사랑을 요약할 수 있었다. 하데위치가 말한 것에 따르면, “지옥은 사랑의 최상의 이름이다.” 마가렛 포레테가 말한 것에 따르면, “나는 모든 피조물의 구원 자체이다. 나는 모든 악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최종적인 분석을 내리자면, 중세 여자들이 자신의 성이 열등하다는 생각을 내면화하는 것으로 보는 것을 틀린 견해이다. 왜냐하면 남성/여성, 우월/열등, 영혼/육체의 대립들은 남자에 비해 여자들에게는 덜 중요한 대립들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만약 중세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육체를 영혼과 대립적인 것으로 본다는 것이 잘못된 견해이기 때문에 중세 말 금욕주의를 자기 혐오적 성격으로 파악하는 것이 부정확한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면 다음의 주장도 가능하다. 즉 모든 이원론들은 여자들에게는 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이원론을 바탕으로 여성의 금욕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이중으로 부정확한 것이다. 여자들은 육체를 영혼에 대립적인 것으로, 여성을 남성에 대립적인 것으로, 양육을 권위에 대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완전히 영적이면서도 완전히 육체적인, 인간 존재로 본 것이다. 그들은 모든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으로 보았으며, 마음으로뿐 아니라 몸을 통해서도 그리스도 본받기(imitatio Christi)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몸을 제단 위의 성체와 십자가 위의 그 분에 견줄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고통, 분출, 육체적 왜곡 속에서 영광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느님과 인간이라는 궁극적인 이원론의 눈부신 빛 앞에서 모든 이원론들은 빛이 바랬다. 남자와 여자들은 여성의 육체가 남성의 육체보다 더 육체적일 것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동의로 인해 양성이 모두 자신을 어떤 의미에서 여성-인간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성의 육신은 그리스도가 성육신을 통해 구원한 (신성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인류였기 때문이다. 여성의 육신은 제단 위에서 하느님이 시각적으로 변모한 (영으로서가 아니라) 육신으로서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의 육신은 그리스도가 세계를 대속하기 위해 받아들인 (인간의 권능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중세 말의 여성 종교인들은 자신의 여성의 육체에서 양성의 인간다움의 상징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인성의 상징, 그리고 그에 다가갈 수 있는 수단을 발견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