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신약 성서(New Testament)라는 과목의 TA를 하고 있다. 공립 학교의 강의이기 때문에 흔히 생각하는 신학적인 내용과는 많이 다르다. 수십년 이 과목을 가르친 목사 출신의 할아버지가 가르치는 과목인데, 신자들에게는 과격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내용을 참으로 노련하게, 토론을 통해서 잘 가르친다. 종교 텍스트의 역사성에 관한 강의는 신자들의 울분의 가득찬 반응을 이끌어내기 십상인데, 그런 반응에 대해 부드럽게, 때로는 단호히 대응하며 수업의 틀을 유지해나가는 솜씨가, 참 대단하다는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다음은 그 수업 시간에 사용하는 유인물 중 하나이다. 짬이 나서 한번 번역해 보았다. 이 유인물에서,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동정녀 탄생 기사를 놓고 신앙의 입장과 학문적 입장이 6개씩 병렬되어 있다. 물론 강조점은 후자에 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찬성하는 이유들과 반대하는 이유들
찬성하는 이유:
1. 이사야서 7장 14절의 예언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그리스어로는 처녀)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예수가 오기 700여년 전에, 이사야는 예수에게서 성취될 것이라고 믿어지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할 것”이라는 예언을 남긴 것이다.
2. 만약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그는 신인 아버지와 인간인 어머니를 두었다. (인성과 동시에 신성을 지녔다는 개념) 그에게는 인간 아버지가 없다.
3. 정합성: 기적적인 부활이 있었다면, 따라서 기적적인 탄생이 있었을 것이다. 하느님은 두 기적 모두를 행할 권능을 지닌다.
4. 그렇지 않다면 예수는 혼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잉태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임신하였을 당시 요셉과 마리아는 약혼하였으나 결혼하지는 않았다고 마태가 이야기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불법적인 아이가 되는 것이고, 이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5. 신약의 두 곳에서 영감으로 쓰여진 성서는 동정녀 탄생에 대해 말한다. 마태복음 1:18-25(이사야서 7:14이 칠십인 역에서 인용됨)과 누가복음 1:26-35(마리아는 그녀가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알려준 천사에게 말한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6. 동정녀 탄생은 예수를 원죄로부터 깨끗하게 한다. 가톨릭 교리(1854년)는 마리아가 죄의 오점 없이 임신했다고 가르친다.(무염수태)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는 아버지 하느님과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원죄로부터 깨끗해진 것이다. 아울러 가톨릭 교리는 마리아가 영원히, 즉 예수의 탄생 이전과 그 후에도 동정녀라고 주장한다.
반대하는 이유들:
1. 이사야 7:14의 예언은 오역(誤譯)에 근거한다. 히브리어 알마(almah)는 “젊은 여인”이나 “하녀”를 뜻하고, 히브리어 베뚤라(bethulah)는 “처녀”를 뜻한다. 히브리어 원전에서는 베뚤라가 아닌 알마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동정녀 탄생이 예언된 것이 아니다. 히브리어 원전이 그리스어(칠십인 역)로 번역될 때, 알마는 원전의 다의성을 제거하며 “처녀”를 의미하는 파르쎄노스로 번역된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 전승에서 이 처녀가 예수의 어머니로 이해된 것이다. 맥락상으로 볼 때, 태어날 아이의 어머니인 젊은 여인은 이사야의 부인이나 에제키엘의 어머니와 동일시된다. 그 언어는 어머니가 이미 임신했으리라 전제하고 있다. 아이는 가까운 장래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교에서는 이 구절을 메시아에 대한 권위있는 예언으로 보지 않는다.
2. 신약에서 예수는 공통적으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간주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 족보는 모두 요셉을 통한다. 만약 예수가 동정녀에서 태어났다면, 다윗까지 이어지는 이들 족보들은 불필요할 것이다. 아이 시절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 뒤에 있었을 때, 마리아는 이렇게 말한다. “애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누가 2:48)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요한 1:45)
3.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신약의 가장 초기 전승이 아니며, 이는 이 이야기가 후대 전승에서 발달되었음을 말한다. 가장 초기의 복음서 마가복음은 그것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연대기상으로 신약에서 가장 초기의 저자인 바울도 그것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아마 그는 그 이야길 듣지 못했거나,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아니면 이야기할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침묵의 의미이다.
4. 동정녀 탄생은 신약에서 중심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부활이 중심이다. 동정녀 탄생은, 1세기 말에 쓰여진 마태와 누가, 오직 두 군데에서 나타난다.
5.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자기 영웅들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갖고 있는 그 시기 다른 종교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즉 조로아스터, 디오니소스, 미트라 등과 경쟁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고대 세계에서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흔했다. 플라톤은 아폴로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졌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도 동정녀에서 태어났다고 칭송받았다. 아마 그것은 기독교가 다음과 같이 말하기 위한 방법었을 것이다. “봐라, 우리도 하나 갖고 있잖아.”
6. 동정녀 탄생은 예수의 인성을 제거하며, 그를 인간적 존재로 보는 걸 힘들게 한다. 신약에서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히브리4:15)라고 말했을 때, 만약 예수가 죄없이 태어났다면, 그리고 다른 인류는 죄를 갖고 태어났다면,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 아닌 만큼 다른 사람들에 비해 불공평한 이점을 갖고 있는 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