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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출판물

연애와 종교

by 방가房家 2023. 6. 4.

한국종교문화연구소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에 개제된 칼럼. 오래 전에 습작한 글 “새로운 주술론, <비밀번호486>” 이후에 발전된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는데, 잘 되지는 못했다. 좀 더 현실감 있는 이야기와 엮을 생각도 있었는데 분량이 다 되어 책 메모로만 끝났다. 미리 기고했다가 연구소 사정으로 한 달 묵혀둔 글인데, 그 사이 시국이 급변하는 바람에 세상 분위기와는 매우 다른 생뚱맞은 글이 되었다.

 

[이 글은 수정, 보완하여 다음 책에 수록되었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야기를 해야 알죠!>(모시는사람들, 2018).]

28_연애와종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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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와 종교

 
사랑은 종교를 비유하여 설명하는 가장 오래된 방식 중 하나이다. 당장 떠오르는 아가서와 각종 신비주의 문헌들을 비롯해 종교사 전반에 걸쳐 논할 자료들이 무궁무진할 것이다. 내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그중에서도 현대인의 사랑 행위와 관련해서이다.
아마도 사랑 이야기는 종교학 수업에서 단골 소재이지 않을까 싶다. 연애 이야기와 종교를 관련시키는 것 자체로 권태롭기 그지없던 학생들의 눈빛이 단번에 반짝일 것이기 때문이다. 연애와 종교의 관련성을 유사성으로 볼 것인지 연속선상에 놓인 것으로 볼 것인지는 학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 비유는 그 자체로 현대인의 삶과 멀어 보이는 종교를 단번에 자신의 삶 중심에 놓고 성찰하게 하는 힘을 지닌 것이기 때문에 공들여 다듬어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학자들의 문헌에도 사랑 비유는 빈번하게 나온다. 메소포타미아 종교에 대한 책에서 보테로는 종교의 핵심적 경험은 사랑과도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사랑은 막을 수 없는 힘으로 우리 서로를 닿을 수 있는 범위에 있는 ‘상대방’ 쪽으로 끌어당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고 우리 자신에 필수적인 풍요로움을 어렴풋이 느낀다.” 성스러움의 감정 역시 그러하다고 그는 설명한다.(Jean Bottéro, <Religion in Ancient Mesopotamia>) 
나는 사랑을 통해 종교경험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종교행위를 설명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데, 이러한 면으로는 엘리아데의 언급이 대표적이다. 엘리아데는 성스러운 공간을 설명하면서 현대인에게도 특별한 공간에 대한 경험이 있음을 환기시킨다. “다른 모든 장소들과 질적으로 다른 특권적인 곳들이 있다. 태어난 곳, 첫사랑의 현장, 젊은 시절에 처음 방문한 외국 도시의 어떤 장소들이 그런 곳들이다.”(엘리아데, <성과 속>) ‘첫사랑의 현장’이라는 간단한 언급만으로도 설레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엘리아데 글의 힘이리라. 많은 종교학 수업에서 연애가 언급되는 방식이 이러하지 않을까 싶다. 종교와 연애의 눈에 띄는 공통점은 이전에는 그리 대단치 않았던 것들이 의미화된다는 것이다. 어떤 장소, 물건, 날들이 특별한 것으로 누군가와 공유되는 경험은 현대인에게 소중한 것임인 동시에 종교 이해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엘리아데에게 종교와 연애는 연속적이지만 돌이킬 수 없는 단절을 내포한다. 연애는 탈성화된 현대인의 경험이다. 그것은 성스러움의 ‘타락한 형태’, ‘유치화된 형태’ 혹은 좀 순화해서 말해도 흔적에 불과하다. 나는 엘리아데가 노정하는 단절이 불편하다. 이러한 점에서 전통적인 성스러움과 연애 경험의 연속성을 논의하는 다른 방식의 책이 나의 눈길을 끈다. 감정사회학자 에바 일루즈의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낭만적 연애가 이루어지는 방식을 분석한 이 책이 뜻밖에도 종교와 연관이 되는 것은 일루즈가 뒤르케임 노선을 계승하기 때문이다. 그는 전통사회의 성스러움이 세속화된 현대사회에서 다른 형태로 유지된다는 뒤르케임 테제를 받아들여 현대의 연애는 과거 성스러움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현대의 연애를 구성하는 ‘소비의례’는 빅터 터너가 강조한 전이 상태의 의례로 기능한다. 구체적인 쟁점은 생략하고 큰 틀에서 정리하자면, 이 책은 연애를 종교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는 관점을 취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종교와 연애를 연속선상에서 보는 관점은 엘리아데나 뒤르케임이나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엘리아데의 경우 ‘타락’이라는 강력한 언어가 둘 간의 단절을 두드러지게 한다면 뒤르켐주의 사회학에서는 ‘세속화’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연속성의 구체적인 지점들을 드러내는 작업이 용이한 것 같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우리들은 종교를 연애에 즐겨 비유한다. 비유의 강도는 학자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그 비슷함이 구조적 유사성에서 오는 것인지 같은 뿌리의 감정이기에 그러한 것인지 입장을 정리하여 비유를 가다듬는 일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종교도 어렵지만 사랑도 어려운 법, 그 둘을 비교하는 것이 섣불리 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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