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몇 년 만에 대학신문을 펴보았다. 내 글이 실렸기 때문이다.(마음에 들지 않는 내 얼굴 사진이 작게 나오도록 찍었음.) 강사들이 학생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는 코너에 원고 청탁을 받았다. 코너 성격상 꼰대 스타일의 글이 나올 수밖에 없는 각이다. 안 그러려고 종교학 강의 홍보 쪽으로 쓰긴 했지만 훈계조는 어쩔 수 없다.
아래에 비슷한 제목으로 올린 메모(종교혐오 시대에 종교 공부하기)에 좀 저 말랑말랑한 소재를 집어넣고 제법 교훈적인 마무리를 덧붙여 완성한 글이다.
종교혐오 시대에 종교 가르치기
“종교가 없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연애 관련 팟캐스트 '불금쇼'의 한 출연자가 연애 상대의 조건으로 한 말이다. 종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많이 달라졌음을 실감하게 하는 말이었다. 여기서 출연자가 언급한 ‘종교’는 사실 개신교를 지칭하는 것이어서, 개신교에 대한 평가가 전반적인 종교 이미지 실추와 연관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20년 전만 해도 상황이 많이 달랐다. 교회는 청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새로운 문화의 공간이었다. 교회에 가는 것이 연애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신자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위상은 급격하게 바뀌었다. 지금도 여전히 ‘교회 오빠’들이 존재하지만, 그들이 매력을 발산하는 영역은 교회 내부로 축소되었다.
종교 관련 뉴스에 달린 댓글에는 종교에 대한 적개심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개독’이라는 명칭이 인터넷에서 일상적인 언어가 된 지는 몇 년 되었고, 최근에는 이슬람에도 ‘개-’가 붙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부르키니 금지 논쟁을 보도한 기사에는 기사 요지와는 상관없이 ‘개슬림’을 비난하는 댓글들로 가득했다. “이슬람은 관용 정신에 기생해 기어 들어와서 테러와 살인으로 그 나라를 점령한다.”는 댓글에 압도적인 찬성이 달린 것이 인상적이었다. 특정 종교를 가리지 않는 이러한 종교에 대한 반감은 젊은 세대에 만연해 있다. 내가 경험한 많은 서울대 학생들도 이러한 정서를 갖고 있다. 이러한 성향은 갈수록 강해지는 것 같다.
이런 판국에 나는 종교학 강의를 하고 있다. 그것도 종교를 아는 것이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라고 핏대를 세우면서 말이다. 종교에 관한 것이라면 귀 닫고 사는 이들을 앞에 두고서 도대체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 종교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진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한국의 기성종교들이 성역화 되어 사회적 공론의 장에서 제외되는 바람에, 일반 사회의 상식 이하의 일들이 벌어지는 영역이 되어버린 탓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사회의 관심과 비판은 지속되어야 하고 더 근본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문제는 종교에 대한 태도가 관심의 산물인 비판이 아니라 무관심의 산물인 혐오로 전환되는 데 있다. 마치 게임에 나오는 적을 해치우듯이 종교를 단순히 없애버려야 할 그 무엇으로 치부하는 태도들이 나타나는 것이 문제다. 감히 ‘종교혐오’라고 부를만한 태도에 맞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종교란 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고 좋든 싫든 붙잡고 고민해야 하는 주제라고.
종교혐오는 종교라는 복합적인 미지의 대상을 한 덩어리로 단순화하여 공격하는 태도이다. 달리 표현하면 종교의 타자화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되는 그들을 한 덩어리의 집단으로 타자화하여 공격하는 것은 다름 아닌 종교가 인류 역사를 통해 해온 일이다. 이단과 타종교의 배척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종교를 공부하며 추구하는 것은 종교가 가진 타자화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배척과 타자화를 극복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타자화의 논리뿐 아니라 그들을 포용하는 길도 종교의 역사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학은 종교를 재료로 굳은 논리의 벽을 넘어서는 방법을 고민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다양한 타자의 얼굴들이 떠오르고 있으며, 그들과의 관계정립이 앞으로 우리 사회의 주요 현안이 될 가능성이 크다. 종교가 이런 문제에 즉석에서 모범답안을 줄 주제는 못되지만, 고민을 터놓고 이야기할 경험 많은 못난 선배 정도는 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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