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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

젠장맞을 삼단논법

by 방가房家 2023. 5. 31.

프라이스(Robert Price)라는 신학자의 "Damnable Syllogism"이라는 재미있는 글을 읽다가 든 몇 가지 생각.


1
이 글의 제목은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켄트웰 스미스의 다음 문장에서 비롯한다.
“몇몇 사람들에게나 설득력 있는 이런 논리를 갖고서, 대다수의 인류의 삶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또는 지옥에나 갈 것이라고 유죄판결을 내리는 것은 너무 무대뽀이다. 내 이웃을 정죄(damnation)하는 것은 삼단논법(syllogism)에 의존하기에는 너무 중차대한 문제인 것이다.”

정죄의 삼단논법(damnable syllogism), 이렇게밖에 번역하지 못하는 내 어학 실력을 용서해주길 바란다. (종교를 전공으로 하긴 하지만, 종교와 관련된 미국의 일상 언어는 너무 어렵다. 미국인들의 무의식을 이해해야 하는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Damn it!", "Holy crap!", 유대인들도 즐겨쓰는 감탄사 "Jesus". 나는 이런 단어들의 정확한 의미는 아직 파악하지 못한다. 더구나 번역은 더더욱 내 능력 밖이다.) "Damnable Syllogism"이라는 표현에는 분명 “젠장맞을 삼단논법”이라는, 저자의 악의적인 뉘앙스가 함축되어 있다.

삼단논법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엄밀하게 논리학적인 의미에서 사용되었다기 보다는 종교가 일반적으로 갖추고 있는 내적 논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기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논리적 추론을 통해 정당화하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물론 종교의 본질은 논리에 있는 게 아니라 믿음에 있다. 하지만 종교인(특히 서구의 기독교인)은 자신의 믿음에 논리적인 완결성을 갖추어 놓고 있다. 진리이기에 논리를 통해 증명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게 된다.
내가 이해하기로 삼단논법은 주어진 대전제로부터 결론을 유추해내는 것이다. 교과서에 실린 예로는, “모든 사람은 죽는다-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이런 거라고 기억한다. 사실 첫 문장에 답이 내포되어 있다. 어떤 대전제가 주어지느냐가 관건이지, 사실 이후의 논증 과정은 요식적이다. 하지만 그럴 듯하다. 그런 점에서 삼단논법은 종교적인 용도로 사용되기 딱 좋다.

2
저자는 기독교인의 논리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지적을 한다.
기독교는 예수의 대속을 통한 구원에 대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구원의 확신이 그를 기독교인으로 만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은 흔히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 은혜를 전해주려 전도를 하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
너도 복음을 듣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을 것이다.

논리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이런 식의 귀납적인 구조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저자는 실제의 믿음의 구조는 이와 다르다고 지적한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보편적인 것이다. 인류의 구원은 복음의 전파를 통한 귀납적인 결론이 아니라 사실 생각의 구조의 가장 앞머리에, 대전제로서 위치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는다. (대전제)
나는 인류의 일원으로 구원을 받았다.
너도 인류의 일원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다. (또는 구원 받아야 한다!)

이런 삼단논법 비슷한 꼴을 갖게 된다. 내가 받은 구원의 기쁨이 넘쳐 남에게도 전도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보편적인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고, 그 논리적 완결성을 완성하기 위해 남에게 전도하는 것이다. 남에게 전도하는 것은 구원의 확신의 결과라기보다는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한 과정이다. 대전제를 완전케 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래서 너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아야 한다. 구원을 받으면 좋겠지만 안받으면 자기 사정이니까 어쩔 수 없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네가 구원을 받아야 그리스도 대속의 보편성을 확신하게 되고 따라서 나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전도는 박애의 문제에 앞서, 자기 신앙을 확신을 얻느냐의 문제와 연결된다.

3
A라는 사람도 사랑하고
B라는 사람도 사랑했지만
모두가 똑같더라 똑같더라 진실한 가슴이 없더라.
(그래서 그런건지 가슴에 묻어둔 당신이 너무 그리워
내눈물 밟고 떠났지만) 당신이 최고였다.

송대관의 고백은 얼핏 보기에 귀납적이다. 그러나 이 역시 삼단논법의 연역적인 구조를 숨기고 있다. A와 B를 겪었기에 “당신이 최고였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당신이 최고였다,” 혹은 “당신같은 사람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야”라는 대전제를 이미 갖고서 다른 사람을 만난 것이다. A라는 사람이나 B라는 사람이나 이 삼단논법의 희생자일 뿐이다.


4
종교학을 한다고 하면 종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흔히 듣는다.

A라는 종교도 믿어보았고
B라는 종교도 믿어봤지만
모두가 똑같더라 똑같더라 진실한 무엇이 없더라.

귀납적인 과정을 통해 지금의 종교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에는 ‘지금은 니가 이런 저런 종교를 알아본답시고 헤메이고 있지만, 결국은 자신이 믿는 진리로 오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깔려 있기도 하다. 이런 충고는 “종교에 대한 공부”가 최고의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적인 과정이라고 착각한데서 기인한다. 아무래도 좋다. 그러한 충고의 진실성과 성의는 너무 고마운 것이기에. 하지만 나는 그런 신앙적 진술을 정보로서 신뢰하지는 않는다. 이 역시 귀납적인 형식으로 가장한 삼단논법이다. 종교인의 다른 종교 체험은 자기 종교에 대한 확실한 대전제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삼단논법의 대전제에 갇혀 있는 한, 그것은 다른 종교의 이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한 노력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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