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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_자료/영상

영화 [오아시스]에서 빛나는 것

by 방가房家 2023. 5. 31.

1. 주물숭배(fetishism)


판 데르 레이우는 릴케의 동화 한 소절을 통해서 주물숭배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그가 인용한 동화에서 아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을 믿지? 그보다 더 쉬운 게 어디있어! 모든 게 하나하나 주님일 수 있지. 적어도 그 물건에게 그렇게 말하기만 하면 되는 거지. 그리하여 아이들은 어머니의 골무가 은빛으로 빛나고 너무 예쁘니 사랑하는 주님으로 삼자고 했다. 아이들은 차례차례로 주님을 끼고 다녔는데, 꼬마 마이가 그만 사랑하는 주님을 잃어버렸지..."
레이우는 이 구절을 인용한 후에 다시 강조하여 말한다. "신이라고 말하면 모든 것이 신이 될 수 있다. 특히 아름답게 빛나면 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동화의 한 구절을 이용하여 한 종교 현상을 와닿게 설명하다니, 레이우의 품격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날카롭고도 아름다운 통찰이며 명민한 인용이다.
바로 이 구절, "아름답게 빛나면.."이라는 대목에 주목해 보자. 이것은 며칠 전에 본 영화 [오아시스]와 종교학적 논의를 연결시켜주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주물숭배는 괴이한 현상이 아니며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으며 또 소유할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주물숭배가 원시인들의 사례나 유아적인 행위를 통하여 설명되기는 해도, 그것은 우리들의 기본적인 인식과 연결되어 있는 현상이다.)


2. 아름답게 빛나는 것

영화 [오아시스]에서 뇌성미비 장애인인 한공주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밥먹고 똥싸는 것이 고작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몇 가지 더 있다. 라디오를 듣는다든지, 거울을 갖고 장난을 친다든지...
홍종두가 한공주를 처음 만나기 직전에 한마리 비둘기가 퇴락한 아파트 안으로 날아든다. 그것이 바로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다. 거울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빛은 비둘기로 상상되어 한공주의 생활 공간을 따스하게 감싸준다.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팍팍한 삶을 살게끔 해주는 근원적인 인식이다. 그것을 삶의 괴로움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환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상은 장난이 아니다. 그것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환상의 적극적인 성격을 이해하고 "종교는 아편"이라는 맑스의 테제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종교적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
거울이 빚어주는 빛나는 것 없이 한공주는 살아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거울이 깨진 위기의 순간에, 한공주는 깨진 거울에 의해 생긴 단편적 영상들을 (이제 비둘기는 되지는 못하지만) 나비로 새로이 상상해 낸다. 공주는 이내 웃음을 되찾고 깨어질 뻔했던 삶은 유지될 수 있었다.


3. 실재적인 것


거울의 영상은 이 영화 전반을 환상이 강하게 지배할 것을 암시한다. 그녀를 살아가게끔 한 힘이 '현실을 재료로 환 상상하기'라는 사실은, 홍종두와의 연애 장면 곳곳에서 나타나 영화의 진행을 이끈다. 그리고 막차 끊긴 동대문역에서 공주가 부른 노래 "내가 만일"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러한 환상을 감동을 이끄는 영화적 장치로도, 보기 불편한 영상 사이사이 휴식을 제공하는 양념으로도 단순히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이 환상들은 요즘 내 머리속에 맴도는 "실재적"이라는 용어를 생각하게 한 계기였다.
종교학사를 통해서 많은 학자들이 많은 노력을 통해 다음어 온, 눈에 띄지 않는 단어가 실재(reality)이다. 슐라이에르마허, 윌리엄 제임스 , 루돌프 오토, 그리고 엘리아데에 이르는 대표적인 종교학자들이 이 단어에 주목했다. 인간의 마음에서 리얼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현실이다. 이 역설적인 명제를 이해할 수 있다면, 종교학사의 중심을 관통하는 주제의식 한 자락을 잡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컨대, 종교학자 엘리아데가 그의 핵심 개념인 성스러움을 묘사하는 중요한 용어는 그것이 (신자들에게) "실재적인"(real)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엘리아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성스러움은 현저히 실재적이다."
아주 단순화하여 얘기하자면, 리얼한 것이 종교적인 것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다. 이 때 리얼하다는 것(이것은 우리말로 번역하기 매우 까다롭다. '진짜', '실재적'. '현실적' 모두 해당된다)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현실 그대로의 것과는 매우 다른 의미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현실 자체(물자체)가 아니라 사람의 인식 속에서 진짜라고 느끼는 것, 인식 속에 형성된 현실이다.(즉 우리가 상상이라고 부르는 것의 결과물일수도 있다).
인간의 내면의 인식에서 진짜라고 느끼는 것이 진짜 진짜라는 것. 그것이 참되며 리얼한 것이라는 것. 이 점은 종교학이 범한, 중요하고도 엄청난 언어파괴이다. 언어상의 혼란을 무릅쓰고 리얼이라는 단어를 이런 식으로 쓰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간단한 이유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인간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오아시스]는 종교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영화이다. 목사가 등장해 종두에게 기도를 해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죄많은 영혼"이라는 언어는 종두에게 전혀 실재적인 언어가 아니었다!)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인식을 성찰하게 해 주는 영화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환상이 등장하는 영화는 죄다 종교와 관련된다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에게 리얼한 것을 우리에게 리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그 예로 이 영화에 대한 한 평론의 한 대목을 인용도록 하겠다. 그 평론가는 영화 오아시스에서 현실을 개혁하려는 노력은 찾아볼 수 없고 환상만이 지배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자기 눈에는 영화에서 현실에 대한 오아시스는 보이지 않고 사막만이 밟힌다고 하였다. 그러한 답답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들은 리얼하게! 싸워야 할지,
환상적으로! 꿈꿔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여기서의 '리얼'이라는 말은 엘리아데의 '리얼'과 얼마나 반대 말로 쓰이고 있는가! 어떤 리얼을 받아들이는지는 보는 이의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평론가의 말에서도 다음과 같은 사실은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가 리얼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우리는 영화에서 사막만을 볼 수도,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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