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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

세계 종교 수업 시간에...

by 방가房家 2023. 5. 31.

며칠 전 “세계의 종교” 수업 시간의 칠판을 그대로 옮겨 본다. 이 수업은 일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입문 강의로, 난 조교로서 이 수업에 참관한다. 보시다시피 동아시아 종교를 다루는 대목이다.

Taoism
cosmic harmony / social harmony
Chuang-Tuz, Holiness=Simplicity, power=relation to Tao
Tao Te Ching, yin/yang, Wu-Wei
Reality: process, dynamic flow
human being: essentially good

 

Confucianism
Confucius, Chun-Tzu=superior man
Li = principle of Harmony, Yi = internalization
Jen(Ren) = Humaneness, compassion, Shu= reciprocity


이건 지식을 위한 지식이다. 이런 거 배워서 동양 사람들을 이해해 보겠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은 물론이고, 동양 사람들조차 이게 뭔 소린지 한참을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미국 학생이 위의 단어들 중에 “리”(Li)라는 것을 용케 기억해서 한국 사람과 대화를 한다고 쳐보자. 엄청나게 재수가 좋다면, 리가 우리말의 예(禮)의 중국어 발음이라는 것을 겨우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 다음엔? 한국 사람, 입이 막힐 것이다. 유학자가 아닌 이상, “공자 말씀에서 예는 이러이러하게 정의되지...” 이런 식으로 말 할 사람 없다. (설사 그렇게 말한다 해도 전혀 충분치 않다. 그 개념은 역사를 통해 엄청나게 변해왔기 때문에) 예라는 것이 중요한 가치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그게 나에게 무엇인지, 지금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한참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며칠이 걸릴지도 모른다. 추상이 아닌 현실 속에서의 예를 적절하게 설명하는 것,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는 한 거의 불가능하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건 꼭 우리가 전통에 무관심해서만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삶이란 것이 추상적 개념과의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의 사회 생활을 압축하고 또 압축하여 예라는 개념이 도출되었던 것이다. 그 개념의 다양한 의미 중에, 조화라는 한 측면만 얼렁뚱땅 붙여놓고 외우는 것. (이 내용으로 그대로 객관식 시험을 친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죽은 공부다. 이른바 “세계 종교”에 관한 강의, 문제가 많다. 많은 경우 이런 식으로 추상 개념 몇 개 늘어놓고 설명하기 바쁘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내가 한국에서 (동아시아 전통들에 대해서도) 위와 별로 다르지 않은 내용의 강의를 세계 종교라는 포맷으로 배웠다는 점이다. 죽은 내용을 미국에서 수입해 들어와서 한국에서 복제해서 가르쳤던 것이다.


구체성과의 관련을 잃어버린 추상 개념, 맥락을 잃어버린 언어, 곧 죽어버린다. 잘해봐야 박제이다. 위의, 칠판에 쓰여진 언어들은 시체들이라고 나는 단정한다. 하지만 아직 나는 위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 수는 없다. 이럴 땐, 동양 전통들 제대로 공부 안해 놓은 게 후회가 된다. 도, 무위, 인, 의, 예... 이런 것들이 삶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있는지를 설명할 언어를 나는 아직 득(得)하지 못하였다. 물론 이건 내가 영어를 못하는 것 때문이 아니다. 순전 내 삶에 대한 성찰 부족의 탓이다. 번역이 안 되어 답답한 것과, 번역할 생각 재료 자체가 없어 답답한 것, 같은 답답함이 아니다. 답답함의 질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 누가 나한테 그런 것 물어 본 것도 아닌데, 공연히 내 자신이 별로 마음에 안 들어, 마음이 불편했다.

도올의 책에서 읽은 내용이 생각난다. [중용]에 관한 강의에서였다. 도올은 중용(中庸)이라는 까다로운 개념을, 똥쌀 때의 경험에 비추어 해설하였다. 그에 따르면 중용은 똥을 제대로 쌀 수 있도록 하는 생활 태도이다. 똥 쉽게 싸는 것, 쉬운 일이 아니다. 먹는 것, 자는 것, 생활하는 것에 조금이라도 과하거나 부족한 면이 있다면 똥 제대로 안나온다. 물리적 중심이 아니라, 순간순간 삶의 가장 적절한 포인트를 찾아나가는 태도가 중용이라는 말로 추상화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는 언어를 득(得)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도올의 언어를, 나는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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