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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

부산 헌책방의 "바가바드 기타"

by 방가房家 2023. 5. 30.

그저께 ‘함석헌의 종교’라는 주제로 열린 심포지엄은 한국기독교가 낳은 예외적으로 풍성한 텍스트인 함석헌과 그에 대한 종교학적인 독해가 만난 의미 있는 자리였다. 그날의 좋은 발표들을 듣던 중 내 마음을 찌릿하게 울린 대목은 예기치 못했던 세부적인 부분이었다. 함석헌은 <<바가바드 기타>>의 주해를 통해 그 특유의 기독교 사상의 폭을 넓힌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이러한 작업을 시작한 계기는 “1950년 부산의 헌책방에서 <<기타>>를 구해 읽게 된 것”이었다고 한다. 발표문에의 해당 내용을 재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마음에는 항상 기억하면서 못 보고 있었는데, 6·25전쟁에 쫓겨 부산 가 있는 동안에 하루는 헌책집을 슬슬 돌아보고 있었는데 우연히 어느 집 책 틈에 에브리맨스 문고판의 기타가 한 권 끼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의 나의 놀람, 기쁨!
[<<바가바드기타>>, 함석헌 주석, <<함석헌 전집>> 13권(한길사, 1983), 3-4.]

자료가 공부를 어떻게 좌우하는지 푸념을 한 적도 있고(자료 획득과 인문학하기), 부산에서 종교학 활동을 한 채필근의 예를 든 적(책이라는 물질과 학문)이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전쟁 중의 부산의 헌책방이라는 조악한 상황에서 공부할 책을 만난 이 이야기는 내게 다른 울림을 준다. 마치 기적 이야기라도 듣는 것 같은. 공부를 가능케 할 물질적 자원이 극미한 상황에서도 높은 사상을 펼쳐낸 함석헌 선생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나는 근대 힌두교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20세기 힌두교가 서구의 영향을 받은 인도 지식인들에 의해 민족주의적으로 빚어진 작품이라는 연구자들의 견해를 수용한다. 나는 ‘모든 종교는 한 봉우리에 이르는 여러 길이다’라는 멋들어진 문구가 20세기 힌두교의 현대화를 위해 힘쓴 종교운동가들, 특히 라마 크리슈나 같은 이들이 힌두교를 고차원적인 전통으로 자리매김하는 가운데 강조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매우 다양한 해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기타>>가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내용으로 독서된 것은 인도 지식인들에 의해 그런 식으로 가공되어 영어로 출판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을 해 본다.
발표에서는 파니카 이후의 종교다원주의 논의가 함석헌에 의해 독자적이고 선구적으로 제시되었다고 의의를 부여하였지만, 이를 좀 삐딱하게 생각하면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이나 함석헌이나 만들어진 힌두교 전통에 함축된 논리를 자신의 자리에 적용한 것이 아닌가, 다른 말로 하면 공유된 자료에서 유도된 논리가 아닌가 하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함석헌의 손에 주어진 자료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따지는 것은 후학의 몫일 것이고, 그가 주어진 것을 갖고서 주어진 것 이상의 고도의 사상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가 불교 문헌을 접한 사정에도 비슷한 분위기가 풍긴다. 그것은 감옥에서 읽을 것이 불교 경전밖에 없어서 생긴 사상적 만남이다. 척박한 물질적 조건은 더 심했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본래 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는데 일제 때 감옥에 들어가서 감방에서 책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어서 무량수경을 읽다가 기독교 신앙과 불교 신앙은 본질에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읍니다.
[함석헌, <진리는 더 위대합니다>, <<불광>>(1978 6월), <<함석헌 전집>> 5권(한길사, 1983), 344.]



(사진 출처: http://hanulh.egloos.com/4541567 )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얼마 전 <다큐멘터리 3일>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부산의 헌책방. 채필근이 부산에서 종교학 책이 없어 고생했던 것과는 반대로, 함석헌은 이곳에서 뜻밖의 만남을 가졌다는 것이 공교롭다. 동서 사상의 한 만남이 있었던 곳으로 나는 이곳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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