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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기독교세계

창세기 창조이야기의 여성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의 역사

by 방가房家 2023. 5. 29.
극단적으로 폭이 넓은 주제를 건드린 글이다. 창세기라는 구약의 일부의 해석이지만 그 해석의 다양성은 기독교, 그리고 유대교 등 서구 유일신교의 주요한 테마가 되었다. 갑작스럽게 준비하게 된 글이었다. 논문의 꼴을 갖출 생각은 애초에 없었고, 차라리 이런 것을 연구하겠다는 공부의 계획을 써놓은 글이라고나 할까.
이 글을 큰 줄기삼아 한 권의 책을 써도 좋다고 생각될 정도였는데, 그러니까 창세기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담긴 자료들을 충실히 설명하며 소개하는 책도 재미있을 거라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고전어에 대한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창세기 창조이야기의 여성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의 역사
-한국 교인들의 해석과 관련하여
 
 
한국에서 개신교가 신문명의 상징이었던 1897년 12월 31일 오후 3시, 정동교회 청년부회원들은 예배당에 모여 “남녀에게 같은 학문을 가르치며 동등한 권리를 주는 것이 옳은가”라는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이 토론의 참석자 중에서 김연근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하느님께서 당초에 남녀를 내시매 음양이 서로 배합이 되었으니, 음이 없으면 양이 쓸데없고 양이 없으면 음이 쓸데없나니 남녀가 동등하다.” 반면에 조한규는 다음과 같은 뜻밖의 반론을 펼쳤다. “성경에 가라사대 남자가 여인의 머리가 된다 하고, 하느님께서 아담을 먼저 만드셨으며, 아담을 도와주게 하사 한 뼈로 이와를 내셨으며, 또한 이와가 죄를 먼저 지었으니 동등이 되지 못하리라.”1)
개신교가 새로운 문명의 상징이고 평등사상의 전달자였던 시절에 김연근처럼 하느님이 남녀를 동등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반면에 조한규는 그러한 기대와는 달리 성경을 남녀차별적인 텍스트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식의 해석은 오랜 기간 기독교회의 전통적인 해석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창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주장하는 바는 정반대이다. 창조 이야기를 통해 한쪽은 남녀의 동등함을 옹호하고 한쪽은 동등함을 부정하고 있다. 어째서 동일한 텍스트에 대한 상반된 해석이 나오게 된 것일까?
 
사실 이것은 기독교사에서 매우 오래된 이야기이다. 창세기가 처음 형성된 시점부터 여성에 대한 차별적 관점과 평등적 관점이라는 두 견해가 텍스트 내에 공존하고 있었고, 이 두 견해의 공존으로 인해 수천년 동안 창세기를 경전으로 지니고 있었던 이들은 다양한 해석을 내놓게 되었다. 기독교사를 통해서 창세기 창조 이야기에 대한 다양한 독해들이 존재해왔다. 켜켜이 쌓인 해석의 전통들은 후대 신자들에게 다양한 해석의 쟁점들을 제공하였다. 이 글은 한반도까지 이어지는 이 긴 해석의 역사를 다루고자 한다. 창세기 본문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기에 해석의 다양성이 생겨났으며, 그 내용이 후대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에서 어떻게 다양하게 해석되었으며, 창세기에 대한 해석이 성적인 해석과 결부되어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를 형성한 과정을 살핀다. 그리고 그 해석의 쟁점들이 한국 교인들이 창세기 이야기를 수용할 때도 살아있었음을 자료를 통해 확인한다.
이 글에서 주안점을 두는 것은 한국인들이 해석한 창세기이다. 그 이전의 서구 유대기독교에 존재한 해석의 역사 고찰은 한국에서 있었던 해석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으로서 제공된다. 사실 성서 본문을 구성하는 이야기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여러 전통들에서 다양한 해석들이 어떻게 형성되어 전승되어 왔는지, 그리고 그 해석들이 어떻게 교리를 형성하였는지에 대한 고찰은 극단적으로 넓은 범위의 연구이다. 다양한 해석들을 파노라마적으로 보이는 것조차도 이 짧은 글에서는 무모한 시도가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성서 본문 내에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여러 요소들이 있음을 지적하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간단한 개괄을 바탕으로 한국인들이 창세기를 받아들일 때 비슷한 해석의 쟁점을 갖고 고민하였으며, 어떤 면에서 독특한 시각을 첨가하였는지를 보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1. 창세기의 두 개의 창조 이야기
 
창세기에는 두 개의 창조 이야기가 있다. 제관계(P) 문서의 창조 이야기(1:1-2:4)와 야훼계(Y) 전승의 창조 이야기(2:4-3:24)가 그것이다. 두 전승의 자료들이 동일한 텍스트 내에서 동일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창세기를 단일한 텍스트로 읽은 독자들은 많은 혼란을 겪었으며 두 자료를 종합해서 이해하는 다양한 해석들이 등장하게 된다. 사람을 창조한 이야기 역시 이러한 혼란을 일으킨 대목이었다. 분명히 창세기에서는 사람이 두 번 창조되기 때문이었다.
제관계 창조 이야기에서는 인간의 창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하느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느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느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26-27)
 
반면에 야훼계 창조 이야기에서는 인간의 창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 하느님이 말씀하셨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 ... 그러나 그 남자를 돕는 사람, 곧 그의 짝이 없었다. 그래서 주 하느님이 그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셨다. 그가 잠든 사이에, 주 하느님이 그 남자의 갈빗대 하나를 뽑고, 그 자리는 살로 메우셨다. 주 하느님이 남자에게서 뽑아 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여자를 남자에게로 데리고 오셨다. 그 때에 그 남자가 말하였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남자와 그 아내가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창세기 2:18-25)
 
사람의 창조가 두 번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만드는 방식도 차이가 있다. 제관계 문서에서는 엘로힘이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추상적으로 위엄 있게 기술되어 있는 반면에, 야훼계 전승에서는 야훼가 땅의 흙으로 손수 인간을 빚어내고 숨을 불어넣는 친근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우리의 논의에서 중요한 부분은 여자를 어떻게 만들었느냐에 대해서 두 서술이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제관계 문서에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다른 말로 하면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창조하였다. 그러나 야훼계 전승에서는 사람의 갈빗대로부터 ‘알맞은 짝’으로서 여자를 만든다. 이 대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 많은 해석의 쟁점들이 존재하지만, 많은 독자들이 이 대목으로부터 받아들인 사실은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창조되었으며, 여자는 남자를 돕기 위한 존재로 남자의 일부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들 두 창조 이야기에서 어느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창세기 이해의 관점이 갈렸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창조 이야기 이해에서 남녀를 평등한 존재로 보는 관점과 여성을 남성에 종속된 존재로 보는 관점이 존재해왔다. 남녀평등의 관점에서는 남녀를 동시에 창조한 첫 번째(제관계) 창조의 이야기가 선호되었으며, 여성 종속적 관점에서는 남자를 먼저 창조하고 여자를 창조했다고 읽힌 두 번째(야훼계) 창조 이야기가 선호되었다. 이 두 가지 관점들은 역사적으로 어떤 해석들을 낳았는가? 그 해석의 다양성을 일람하도록 하겠다.
 
 
2. 두 해석의 역사
 
①신약 성서의 창조 이야기 해석
창조이야기에 대한 해석들 중에서 기독교사 끼친 영향력이 가장 큰 해석은 신약 성서의 저자들의 해석이다. 특히 바울의 서한에 언급된 내용들이 중요한 쟁점이 된다. 바울은 여성비하적인 해석가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의 저작을 살펴보면 그렇게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의 기본적인 태도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다는 평등주의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2) 여자는 교회에서 너울을 써야 한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대목도 신중하게 볼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흔히 이해되듯이 여성종속적인 입장에서 한 주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에서 이 대목은 중요한데, 남녀의 지위 문제를 창조 이야기와 결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습니다.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 때문에 그 머리에 권위의 표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가 있을 수 없고, 여자 없이 남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도 여자의 몸에서 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하느님에게서 생겨났습니다. (고린도전서 11:8-12)
 
위 구절에서 바울의 주장은 일방향적인 것이 아니다. 처음에 눈에 띄는 것은 야훼계 창조 이야기를 언급하며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고 언급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남녀의 위계적 관계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그러나’ 이후의 언급으로 남자와 여자의 평등함을 주장하고 있다. 평등적 관점과 종속적 관점을 모두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이 텍스트의 해석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평등적 관점이 바울의 더 큰 관심이었음을 볼 수 있다. 여성에 대한 바울의 입장이 무엇이었는가를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굳이 내가 생각하듯이 바울의 입장이 평등주의에 더 가까웠다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바울의 입장이 모호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논의에서는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분명한 것은 기독교회가 형성되면서 정통적 입장은 여성종속적인 해석으로 기울었다는 사실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전반부에서는 여자가 남자에서 났다고 이야기하고 후반부에서는 남자도 여자의 몸에서 났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바울 이후의 해석가들은 전반부의 내용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였다. 전통적으로 바울의 서한으로 분류되어 왔지만,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이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 후대의 것으로 생각하는 디모데전서는 바로 그러한 여성종속적 입장에서 창조 이야기를 해석한 대표적인 텍스트이다.
 
여자들도 소박하고 정숙하게, 단정한 옷차림으로 자기를 단장하십시오. 머리를 지나치게 꾸미지 말며, 금붙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으로 치장하지 말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여자에게 어울리게, 착한 행실로 치장하기를 바랍니다. 여자는 조용히, 아주 순종하면서 배우십시오. 나는,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다.
사실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그 다음에 하와가 지음을 받았습니다.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아서 죄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니고 정숙하게 살면, 아이를 낳는 일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3)
 
디모데전서의 이러한 해석은 매우 중요하다. 일단 이것은 여성종속적 관점에서 야훼계 창조 이야기를 선택하여 남성의 지위를 정당화하는 해석이 초기 정통주의자들의 입장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디모데전서의 이 입장은 후대 필사가들에 의해 바울 저작에 삽입된 악명 높은 여성종속적인 구절들(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4:33-36)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위의 해석이 신약 성서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교회의 표준적 해석으로 자리잡았고, 기독교사 전반에 걸쳐 창세기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사실이다.
 
②여성종속적 해석들
여성종속적 해석들은 초대 교회가 형성되기 이전부터도 광범위하게 지지를 받았는데, 우리는 이것을 1세기경 활동한 유대인 철학자 필로의 저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창세기에 대한 해설서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왜 여자는 다른 동물과 남자처럼 땅에서 지어지지 않고 대신 남자의 갈비로 만들어졌는가? 그것은 첫째, 여자가 남자와 동등한 위상이 아니기 때문이고, 둘째, 나이에서도 동등하지 않고 더 어리기 때문이다.4)
 
다른 초기 해석가들에서도 이러한 해석이 지지받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창조 이야기에 근거해서 여성에 대해 가장 극렬하게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이는 테르툴리아누스였다. 다음은 “여성의 복장에 관하여”라는 글에 등장하는 유명한 문구이다. 여기에서도 야훼계 창조 이야기가 주장의 바탕이 됨을 확인할 수 있다.
 
“[여성들이여], 너희들은 악마의 관문이다. 너희들은 (금지된) 나무를 해체한 자들이다.... 너희들은 하느님의 형상인 남자를 너무도 쉽게 파멸시켰다.”5)
 
③평등주의적 해석들
그러나 야훼계 창조 이야기에 기반한 여성종속적 해석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제관계 창조 이야기에 주목한 다른 해석들 역시 존재하였는데, 그러한 해석들의 예는 영지주의 문헌들에 풍부하게 나타난다. 그들 중에는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인 요소 모두를 포함하는 이원론적인 하느님(God as a dyad)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러한 이들은 제관계 창조 이야기에서 인류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언급이 중요하게 인용되었다.6) 영지주의자들은 야훼계 창조 이야기보다는 제관계 창조 이야기를 주로 언급하였으며, 제관계 창조 이야기에서 인류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언급을 양성적인 창조로 이해되기도 한다. 영지주의자 마르쿠스는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모습대로 비슷하게 만들어진 인간은 남성적 여성(masculo-feminine)”이라고 결론을 내리기도 하였다.7)
제관계 창조 이야기에 나오는 “남자와 여자로”의 창조를 마치 플라톤의 <<심포지엄>>에 나오는 남성구유적인 인간으로 해석하는 것은 유대교 주석 전통에도 보인다. 다음은 창세기에 대한 미드라쉬 중에서 나오는 언급이다.
 
(예레미아 레자르가 말하길) 거룩한 분이 아담을 만들었을 때 그는 아담을 자웅동체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그들의 이름을 아담이라고 하셨기”(창세기 5:2) 때문이다. (사무엘 나만이 말하길) 주님이 아담을 창조하였을 때, 그 분은 아담을 두 얼굴로 만들고 나서 그를 갈라 두 뒷면을 지니게 하여 한 면은 이 편을 다른 면은 저 편을 향하도록 하였다.8)
 
양성구유적 해석 외에 다른 해석의 지점으로는 야훼계 창조 이야기에서 야훼가 여자를 만들면서 한 말인 “그를 돕는 사람, 알맞은 짝”에 대한 해석이 있다. 흔히 ‘돕는 사람’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한 위치에서 남성을 보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히브리 원문에서 그 단어는 여성을 종속시키는 함의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동등한 의미에서 ‘맞서는 자’, 혹은 (신이 인간에 대해 갖는) 우월한 위치에서 ‘조력자’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러한 점에서 7세기경에 활동한 신학자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 Sinaita)가 여성종속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다음과 같이 그 구절을 해석한 것은 눈에 띈다.
 
왜 뱀은 남자를 노리지 않고 여자를 노렸는가? 당신은 아마 여자가 둘 중에 약한 이였기 때문에 뱀이 여자를 좇은 것이라고 대답할 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그 반대이다. 계율을 어겼다는 데서, 그녀는 자신이 더 강한 이임을, 진정 남자의 ‘조력자’(boethos)임을 보여준 것이다.9)
 
이상으로 창조 이야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함을 살펴보았다. 물론 위의 예들은 다양한 해석들의 극히 일부만을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평등주의적 해석과 종속적 해석은 기독교사의 여러 대목에서 경쟁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많은 예들을 통해서 해석들이 맥락에 따라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고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해석의 다양성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도록 하겠다. 더 다양한 사례들에 대한 분석은 다른 기회로 미루어둔다.
 
 
3. 창조 이야기에 대한 성적인 해석
 
야훼계 창조 이야기에는 남자와 여자의 창조 이후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는 불복종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 여자가 했던 역할은 창조 이야기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의 쟁점이 된다. 불복종의 과정에서 여자의 역할이 무엇이었냐의 문제는 여성의 지위와 관련해서 숱한 해석의 쟁점이 되었으며, 불복종과 성행위의 관련성이라는, 성에 대한 인식과 직결된 중요한 해석상의 쟁점이 여기에 부가되었다.
고대 근동의 맥락에서 보면, 여성이 성행위를 통해서 지혜를 얻는 입문식의 사제 역할을 했다는 신화 요소가 널리 존재했다. 대표적인 예로 길가메쉬 서사시에는 엔키두에게 접근하여 성행위를 통해 인간 문명의 세계에 편입시킨 창녀가 나온다. 그 이전에는 동물들과 지내며 야생 상태에 있던 엔키두는 그녀와 잠자리를 한 후 “이제 지혜를, 확장된 이해를 지니게 되었다.” 성에 눈뜨는 것이 지혜로의 입문과 동일시된 것이다. 베일리에 따르면, 분명 야훼계 창조 이야기 저자는 이러한 신화 요소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일리가 강조하는 것은 여성 입문주재자의 신화적 유형은 남아있지만, 야훼계 창조 이야기에서 성적인 요소는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구조적 동일성은 사용하되 성적인 부분은 빼고 신학적으로 재창작된 것이 야훼계 창조이야기라는 것이다.10)
분명 창세기 창조 이야기 어디에도 성행위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후대 해석자들은 끊임없이 창조 이야기와 성의 관련성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에 관련된 다양한 해석의 전통들이 축적되었다. 예를 들어 초기 기독교인들 중에는 에덴을 성소로 이해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그들은 낙원에 섹스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석하였다. 반면에 유대교 전통에서는 성의 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하였는데, 미드라쉬 중에는 뱀과 여자의 성적인 관계를 상정한 해석도 발견된다.
 
(조하난은 이렇게 말했다.) 뱀이 이브와 성교했을 때, 뱀은 이브를 욕정으로 물들였다.11)
 
2세기경 초기 유대교 위서(pseudepigrapha)인 <희년서>(Jubilees)에서도 창조 이야기에 대한 성적인 해석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창조 이야기를 재서술하는 부분이 있다. 제관계 창조 이야기와 야훼계 창조 이야기를 하나의 흐름으로 구성하여 이해하였기 때문에 두 번의 창조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순서상 먼저인 제관계 창조 이야기는 첫 번째 주에 있었던 일로, 야훼계 창조 이야기는 두 번째 주에 있었던 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야훼계 창조 이야기의 서술 과정에서 여자의 창조 직후 아담이 이브를 ‘알았다’는 표현의 삽입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야훼는 아담을 잠에서 깨웠다. 그가 깨어나 일어서니 이것이 (둘째 주) 여섯째 날이었다. 야훼는 이브를 아담에게 데려왔고, 아담은 이브를 알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이것은 나의 뼈로 된 뼈이며 나의 살에서 나온 살이다. 남편에서 나왔으니 나의 아내라고 불릴 것이다.”12)
 
히브리어에서 ‘알다’는 성적인 함축을 갖고 있는 단어로, <희년서> 저자는 여자의 창조 직후 성관계가 이루어졌다는 이해를 갖고 있다. 두 창조 이야기를 연대기적으로 이해하고 자유로운 성적인 해석을 부가하는 것은 유대교 해석 전통에서 많이 나타난다. 그러한 해석들을 바탕으로 이브 이전에 창조된 여자가 존재했다는 생각도 나타났으며, 그것은 릴리쓰(Lilith)에 대한 전승으로 발달된다. 유대교는 성에 대한 태도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반면에, 기독교의 교부들은 성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가졌으며, 그 태도가 바탕이 되어 창조 이야기를 해석하였다. 우리는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의 창세기에 대한 주해에서 금욕적 태도에 기반한 해석을 볼 수 있다.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와 동침하였다.” 이것이 언제 일어났는지 생각해보기 바란다. 불순종 이후에, 낙원을 상실한 이후에야 성교 행위가 시작된다. 불순종 이전에 그들은 천사처럼 살았고 성교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동정을 지키는 것이 행해졌지만, 그들의 무분별한 불복종이 전면에 드러나고 죄의 길이 열렸을 때 동정은 그들이 그 정도로 좋은 것을 지키는 것이 무가치하다고 져버린 까닭에 물러나게 되었고 그 자리를 성교가 차지하게 되었다.13)
 
초기 교회 지도자의 성에 대한 태도, 특히 사막 교부들의 금욕주의 전통이 창조 이야기 해석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긴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 간단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성에 대한 금욕적 태도가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해석 이후 기독교 중심 교리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조 이야기 해석은 기독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대목이지만, 이 글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방대한 주제가 될 것이다. 성에 대한 금욕적 태도와 창조 이야기에 대한 해석의 결합이 이후 기독교 전통의 성에 대한 해석과 여성의 역할에 대한 견해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 부분의 논의를 마무리하도록 한다.
 
 
4. 한국의 초기 개신교인들의 창조 이야기
 
기독교사 전체에 걸친 방대한 논의를 간략히 마무리하고, 이제 글머리에 소개되었던 1897년 정동교회에서 있었던 토론회에 대한 고찰로 돌아가도록 하자. 앞에서 보았듯이 참석자 중에서 김연근은 “하느님께서 당초에 남녀를 내시매 음양이 서로 배합이 되었으니”라고 언급하면서 남녀가 동등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제관계 창조 이야기에서 남자와 여자로 인간을 창조하였다는 부분을 인용하면서 남녀평등적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의 표현 중에 ‘음양의 배합’은 서구 전통의 남녀평등적 해석들과 다른 독특한 부분인데 이에 대한 고찰은 잠시 후에 하겠다. 반면에 조한규는 “하느님께서 아담을 먼저 만드셨으며, 아담을 도와주게 하사 한 뼈로 이와를 내셨으며, 또한 이와가 죄를 먼저 지었으니” 남녀가 동등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야훼계 창조 이야기를 전거로 여성종속적인 견해를 펼친 전형적인 주장이다. 창조 이야기를 이해한 두 방식이 위 토론에서 전형적으로 재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기독교사를 통해서 평등주의적 해석과 여성종속적 해석은 동등한 위치를 지니며 양립해온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앞서 보았듯이, 신약의 디모데전서에서는 야훼계 창조 이야기를 전거로 삼으며 여성종속적 입장을 견지했으며, 이것이 지배적인 해석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현재의 교회 현실에서도 창조 이야기를 여성종속적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지배적인 것은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개화기 개신교의 해석의 맥락은 독특했다. 당시 개신교는 문명의 기호로서 한국인들에게 인식된 종교였고, 서양의 발달된 문물을 소개하는 창구의 역할을 한 종교였다. 개신교가 소개한 서양의 새로운 사상에는 평등사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위의 토론회의 맥락은 평등을 소개하는 자리였고, 개신교는 그것을 지지하는 종교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지배적인 해석의 양상과는 달리 위의 토론회에서는 조한규의 여성종속적 해석이 지지받기 보다는 김연근의 남녀평등적 해석이 지지받았다.
당시 토론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발언들을 보면, 유교적 입장에서 여성종속적 해석을 지지한 윤치호도 있었지만, 개신교 입장에서 발언한 다른 참석자들은 남녀평등적 해석을 지지하였다. 제손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생하심에 물론 남녀하고 이목구비와 심의 성정은 다 한가지이며, 만물의 가운데에 제일 총명하고 신령한지라”고 주장하였고, 여러 부인들 역시 “하느님이 세계 인생을 나으실 때에 사나이나 여편네나 사람은 다 한가지라”고 주장하고 있다.14) 이들은 모두 제관계 창조 이야기의 평등한 남녀 창조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평등을 강조하는 개화기 개신교의 맥락에서 인용된 창조 이야기는 몇 년 뒤의 <<독립신문>> 사설에서도 나타난다. “녀학교론”이라는 이 사설은 여성 교육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글로, 그 근거로 하느님의 창조에서 남녀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대저 하느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일월을 만드시어 태양은 낮이 되게 하시고 태음은 밤이 되게 하셨으니 음양의 권리가 일반이 되어 독양이 능히 만물을 내지 못하고 독음이 능히 만물을 기르지 못하여 사람이 그 가운데 생하니 또한 음양의 권리를 나누어 가진지라. 처음에 여자가 남자로 좇아 났으되 여자에게 산육하는 이치를 마련하신 고로 남자가 여자 아니면 자손을 전할 수 없는지라. 그런즉 음양의 권리가 같을 뿐 아니라 남녀의 권리가 또한 동등이요 이목과 사지도 똑같은 사람이요 영혼과 재주도 남자와 일반이라.”
 
평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창조 이야기가 해석되었다는 점 외에도, 위의 사설에서는 특징적인 해석이 보이는데, 그것은 창조 이야기의 해석에 동양의 음양론(陰陽論)이 첨가되어 있다는 점이다. 남녀의 문제를 음양의 논리를 통해서 이해하는 것은 동아시아인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음양론은 창세기의 천지 창조의 원리를 뒷받침하면서도 보충하는 논리로 기능하였다. 이 지점에서 창세기 창조 이야기에 대한 동아시아적인 새로운 해석이 형성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위 인용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처음에 여자가 남자로 좇아 났으되 여자에게 산육하는 이치를 마련하신 고로 남자가 여자 아니면 자손을 전할 수 없는지라”는 부분인데, 이것은 위에서 우리가 살펴본 신약의 논의 중에서 디모데전서의 논의가 아니라 고린도전서에서의 바울의 입장을 소화하여 평등주의적 해석으로 제시하고 있다.
 
5. 통일교의 창세기 해석
 
우리는 앞 절에서 초기 개신교인들의 창조 이야기 해석의 일면을 살펴보았는데, 한국에서도 제관계 창조 이야기와 야훼계 창조 이야기가 형성하는 해석의 긴장이 역시 존재하였으며, 해석에 있어서 음양론이라는 동아시아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 절에서는 그러한 해석의 요소들이 통일교의 창세기 창조 이야기에도 나타남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러한 고찰에는 약간의 비약이 있음을 먼저 이야기해야겠다. 이 글에서 전제하는 것은 초기 한국 개신교인의 창조 이야기 해석의 연장선상에서 통일교의 독특한 해석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려면 통일교 경전 형성 과정과 배경, 예컨대 <<원리강론>>에 영향을 미친 김백문의 <<기독교 근본원리>> 등에 대한 분석 고찰이 요청된다. 이 글에서는 단순히 <<원리강론>>의 본문 내용만을 참고하였기 때문에 경전의 맥락에 대한 연구가 추후에 보강될 필요가 있다.
창조 이야기 해석은 통일교 교리를 특징짓는 핵심적인 부분이다. 여기에는 제관계 창조 이야기와 야훼계 창조 이야기가 모두 언급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강력한 음양론의 논리를 통해서 양쪽의 창조 이야기를 해석한다. 우선 제관계 창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의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므로 삼라만상의 제1 원인 되신 존재인 하느님도 역시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존재해야 된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창세기 1장 27절에 하느님이 자기 형상 곧 하느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으로 보아서도 하느님은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로도 계시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15)
 
야훼계 창조 이야기는 다음의 대목에서 언급된다.
 
본래 하느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은 각각 본양성과 본음성의 상대적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본양성과 본음성은 각각 본성상과 본형상의 속성(屬性)인 것이다. 그러므로 양성과 음성은 각각 성상과 형상과의 관계와 동일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양성과 음성은 내외, 원인과 결과, 주체와 대상, 또는 종과 횡 등의 상대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남성인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그의 대상으로서 여성인 해와를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창2:22). 우리는 여기에서 하느님에 있어서의 양성과 음성은 각각 남성과 여성이라고 칭한다.16)
 
다소 복잡한 표현들로 되어 있지만, 위의 인용문에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음과 양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음양론을 통해서 두 개의 창조 이야기가 통합적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사에서 해석적 긴장을 수반해온 제관계와 야훼계 창조 이야기들을 음양론이라는 동아시아적 설명체계를 통해서 해소하고자 하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동아시아 사상에서 음양론은 형식논리 상으로는 남녀평등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남녀차별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되는 이중적인 모습이 있다. 음양을 세계의 대등한 원리로 이야기하는 한편, 실제 각자의 속성과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전통사회의 차별을 질서로서 논리화하였기 때문이다. <<원리강론>>은 음양론이 지녀온 그러한 이중적 측면에 기대어 창조 이야기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의 긴장을 해소하고자 한 면이 있다. 그 결과 남녀의 관계가 조화롭게 설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남성우월적인 현실은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17)
통일교 교리는 창조 이야기에 대한 성적인 해석으로 유명하다. 창조 이야기와 성과의 관련성을 이야기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확립한 기독교 정통 교리에서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통일교에서는 첫 남자와 여자의 성교를 타락과 오염의 시작으로 놓는 주제가 더욱 강조되고 있다. 성서에 대한 비유적 해석을 강조하면서18), <<원리강론>>은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를 사탄과 성적인 관계를 맺은 범죄 행위로 규정한다. 앞에서 우리는 뱀과 여자의 성적 관계를 언급한 유대교 주석을 본 바가 있는데19), 통일교의 해석은 이를 한층 강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창세기 2장 25절을 보면, 범죄하기 전 아담 해와는 몸을 가리지 않은 채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墮落)한 후에는 벗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무화과(無花果)나무 잎으로 하체(下體)를 가리었다(창3:7). 만일 선악과(善惡果)라고 하는 어떠한 과실이 있어서 그들이 그것을 따먹고 범죄를 하였다면 그들은 필시 손이나 입을 가리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허물을 가리는 것이 그 본성(本性)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손이나 입을 가리지 않고 하체를 가리었었다. 따라서 이 사실은, 그들의 하체가 허물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그들이 하체로 범죄하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20)
 
 
6. 맺으며
 
우리는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창조 이야기가 어떻게 해석되어왔는지를 길게 추적하였으며 한국의 창세기 해석, 그리고 통일교의 창세기 해석까지 살펴보았다. 이것은 통일교의 해석을 최종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놓으려는 의도가 아니다. 이 글의 관심은 한국적인 창세기 해석을 탐구하려는 데 있으며, 통일교 교리에 한국의 해석 전통이 반영되어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 글에서는 한국적 해석을 찾아보기 위해서 기독교사의 굉장히 넓은 해석의 스펙트럼을 탐사하였는데, 해석의 쟁점을 성공적으로 추출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텍스트의 독해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여러가지 면에서 이 글은 시론적이다. 한국 기독교사 자료의 해석을 세계 기독교사의 흐름에서 추출된 쟁점을 중심으로 살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미진하나마 이 글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1) <<대한 크리스도인 회보>> 1-48 (1897년 12월 29일) 4면.
2)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28)
3) 디모데전서 2:9-15.
4) Philo of Alexandria, Quaestiones et Solutiones in Genesis 중에서. Kristen E, Kvam, Linda S. Schearing, and Valarie H. Ziegler, Eve & Adam: Jewish, Christian and Muslim readings on Genesis and Gender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9), 64.
5) Tertullian, "On the Apparel of Women" <http://www.newadvent.org/fathers/0402.htm>
6) Elaine Pagels, 방건웅 & 박희순 옮김, <<성서 밖의 예수>>(The Gnostic gospels) (정신세계사, 1989), 105.
7) Elaine Pagels, <<성서 밖의 예수>>, 114.
8) “Genesis Rabbah 8.1,” Kvam, Eve & Adam, 77.
9) Anastasius Sinaita, Anagogicarum Contemplationum. Kvam, Eve & Adam, 131. 아나스타시우스의 해석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조할 것. Jean M. Higgins, "Anastasius Sinaita and the Superiority of the Woman,"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97-2 (Jun., 1978): 253-256.
10) John A. Bailey, "Initiation and the Primal Woman in Gilgamesh and Genesis 2-3,"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89-2 (Jun., 1970), 150.
11) “Yabamoth 103b.” Kvam, Eve & Adam, 88
12) Jubilees 3.6. Kvam, Eve & Adam, 52.
13) John Chrysostom, Homilies on Genesis, “Homily 18.” Eve & Adam, 147.
14) <<독립신문>> 3-1 (1898년 1월 4일) 1면과 2면.
15)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원리강론>> (성화출판사, 1995[1966]), 제1장 창조원리, 26.
16) <<원리강론>>, 제1장 창조원리, 26.
17) 다음의 내용에서 남성적 원리가 우선이 됨을 볼 수 있다: “피조세계가 창조되기 전에 있어서의 하나님은 성상적인 남성격 주체로만 계셨기 때문에, 형상적인 여성격 대상으로 피조세계를 창조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 11장 7절에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성구는 바로 이러한 원리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성상적인 남성격 주체(男性格 主體)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아버지 라 불러 그 격위(格位)를 표시하는 것이다.” (<<원리강론>>, 제1장 창조원리, 27.)
18) “성경(聖經)의 많은 주요한 부분이 상징이나 비유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사실인데, 무엇 때문에 선악과만은 굳이 문자대로 믿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오늘날의 기독교 신도들은 모름지기 성서의 문자에만 붙들려 있었던 지난날의 고루하고도 관습적인 신앙태도를 버려야 하겠다.” (<<원리강론>>, 제2장 타락론, 72.)
19) 각주 11) 참조.
20) <<원리강론>>, 제2장 타락론,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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