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찍한 어린이의 질문이 세련된 신학적인 대답을 이끌어낼 때도 있지만(그래, 버지니아야, 산타 클로스는 있단다), 신학의 급소를 때릴 때도 있다. 꽤 오래된 일인데,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어딜 가고 있을 때였다. 특이하게도 버스 기사 아저씨는 기독교 방송을 틀어놓았다. 전형적인 기독교인 목소리의 디제이가 한 어린아이의 편지를 읽어주고 있었다. 대충 내용이 이랬다. “어제 제가 사랑하는 강아지 **가 죽었어요. **는 하늘나라에 갔겠지요? 함께 기도해 주세요...” 이 사연을 읽고 나서 디제이가 멈칫하는 것을 나는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회피하고 지나갔다. “하하... 귀여운 어린이의 사연이죠?” 그리고는 딴 이야기로....
사실 대답은 “강아지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답니다”이다. 하지만 어느 디제이가 그 상황에서 그딴 식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어린이의 사연은 기독교의 교리의 아픈 구석을 찌르는 것이다. 강아지가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은 조상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에 맞먹을 만큼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지금이야 애완 동물을 인간과 동격으로 놓고 더 극성을 떠는 게 서양 사회이지만, 2천년 전에는 그런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을 위해서 피를 흘렸지 개새끼들을 위해서는 피를 흘리지 않으셨다. 인간과 동물의 철저히 다름, 그것은 ‘영혼’이라는 언어로 표현된다. 어느 교회 유아부 게시판에 있는 답변을 보자.
제목: 제가 키우던 강아지도 죽으면 천국에 가나요?
강아지를 무척 좋아하나 보군요.^^ 하나님도 동물들을 좋아하신답니다. 세상을 만드실 때 여러 동물들을 만드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동물들을 만드실 때 사람과는 다르게 만드셨어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지만 동물들은 그렇지 않아요. 동물들은 영혼이 없고 생각을 할 수도 없어요. 그래서 우리처럼 하나님을 믿거나 예수님을 느낄 수 없답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에 가지 않아요. 그렇지만 처음 에덴 동산에 동물들이 있었듯이, 천국에도 동물들이 있답니다. 그 동물들 중에 우리 강아지도 포함시켜 달라고 한 번 기도해 보세요. 혹시 알아요?^^*
아이들을 대하는 상냥한 언어로 쓰여 있지만, 내용은 살벌하기 그지없다. 마지막에 강아지는 천국에 가지 못하지만, 천국에도 동물이 있으니 그걸 갖고 놀라는 무신경함은 섬뜩할 정도다. 강아지가 죽어 울고 있는 아이에게 내일 새 거 사줄테니 울지 말라고 얘기하는 어른을 보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애완동물 있는 사람을 울컥하게 하는 대목은 “동물은 영혼이 없고 생각을 할 수도 없다”는 표현일 것이다. 개나 고양이 키워본 사람이면 그것들이 사람새끼보다 나은 영물(靈物)임을 누구나 알 터인데 영혼이 없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이것은 서양언어와 우리언어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사실 ‘soul’은 우리말로 완전히 번역되지 않는 단어이다. ‘soul’은 우리가 이해하는 영, 혹은 영혼(사실 동아시아에서 영 개념의 용례에 대해선 자신 없다)보다 폭이 좁아 인간이 지닌 그 무엇을 지칭하는 말이다. 위 인용문에서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다는 믿음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런 언어의 차이 때문에,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천주실의>>를 쓸 때 영혼 개념을 상세히 구분하여 번역했다. <<천주실의>> 중 이런 표현이 나온다.
동물의 생혼(生魂)과 각혼(覺魂)은 그들 본체에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육신은 죽어도 영혼(靈魂)은 불멸(不滅)한다.
생혼, 각혼, 영혼. 생혼은 생명의 작용에 관련된 혼이고, 감각은 감각에 관련되고, 영혼은 뭐 고귀한 그 무엇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식물은 생혼, 동물은 생혼과 각혼, 인간은 생혼과 각혼과 영혼을 가진다. 이런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유래하는 서양의 오래된 분류체계이고, 마테오 리치는 이것을 동양에 소개한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각혼이니 하는 말 안쓰고 그냥 영혼으로 통칭하는데, 그러다 보니 '영혼 개념이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대신에 '영혼이 없다'라고 좀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인간과 동물의 영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혹은 동물에는 영이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아지에 영혼이 없다”는 기독교 교리는 문화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진술이다.
개가 성스러운 동물인 요즘 서구 사회에서, 개에 대한 기독교 교리가 만족스러울 리가 없다. 사실 개는 천국에 못가, 이렇게 단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성서에서 개가 천국에 못간다고 단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굳이 그렇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물과 관련된 성서구절을 열심히 모아 신학적인 설명을 하는 글 “Do Pets Go To Heaven?”을 보자. 이리저리 한참 성서 구절을 인용하더니 내리는 결론이 이렇다: “하느님이 우리는 위해 마련해 놓으신 것은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 있는 한 당신의 애완 동물을 사랑하십시요. 나중에 천국에 가신 분들은 애완 동물에 대해서도 모든 것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학은 이런 식이다. 이리저리 진 다 빼놓고 결국엔 하느님의 의지는 인간의 이해 너머에 있는 거라고 가르치며 끝낸다.
그런 회피가 만족스러울 리가 없다. 그래서, 정식 교리는 아니고, 일종의 아이들을 위한 교리인데, 강아지에게는 강아지의 천국이 있고 고양이에게는 고양이의 천국이 따로 있다는 설명이 있다. 애완 동물의 천국(Pet's Heaven) 교리이다. 이 교리가 단지 아이들만 위로해주는 것은 아니다. 개나 고양이 사랑하는 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니까. 개와 관련된 기독교 교리에 대한 재치있는 불만들을 모아놓은 “Do Dogs Go To Heaven?”이라는 웹 페이지가 있다. 예를 들어 천국에 갔더니 “애완견 반입 금지”라는 푯말이 있어 그냥 돌아왔다는 식의 유머가 있다. 거기에 마크 트웨인이 쓴 편지 한 구절이 있다: “개야말로 신사입니다. 나는 사람들의 천국이 아니라 개들의 천국에 가고 싶습니다.”
분명 강아지 죽음 문제는 기독교가 해결하기 힘든 난점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별이라는 문화적 바탕에서 만들어진 종교이기 때문이다. 나 같으면, 그런 문제를 갖고 있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개종을 권할 것이다. 윤회를 통해 삼라만상이 연결되어 있는 불교나 힌두교에서 그런 고민이 있을 턱이 없다. 절에서 기르는 개가 보살로 불리는 것은 가끔 있는 일이다. 동물 애호를 더 강조하는 사람에게는 불살생(Ahimsa) 교리를 극단적으로 지키는 자이나교가 추천할 만하다.
이 대목에서, 애완 동물의 죽음을 다룬 명작 “날아라 병아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얄리의 죽음은 현명하게도 전통적인 사유의 틀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독교는 얄리의 죽음을 수용하게 해줄만한 틀이 아니다. 가사 중 얄리가 “아픔 없는 곳에서 하늘을 날고 있을까”라는 대목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 황천(黃泉)과 같은, 전통적인 저승 세계 여행 모티브이다. 그리고 마지막 대목, “언젠가 다음 세상에도 내 친구로 태어나줘.”는 설명할 것도 없이 “너의 조그만 무덤가엔 올해도 꽃은 피겠지”와 공명하며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윤회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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