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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공부/기독교세계

Debate against Jesus

by 방가房家 2023. 5. 27.

성경의 복음서 중에 “시로페니키아 여자의 믿음”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마가 7:24-30; 마태 15:21-28)

예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셔서, 두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바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서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실려 있는 이 이야기는 흥미롭다. 예수의 모습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다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분명히 자신의 은혜가 유대인 너머 이방인에게 적용되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 마가복음엔 시로페니키아 여인으로 되어 있고, 마태복음엔 가나안 여인으로 되어 있는데, 이 혼동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이방(Gentile) 여인이라는 사실이다.

마태는 마가의 원문을 가져다가 편집해서 이 주제를 더 극적으로 강화하였다. 마태는 예수의 거리낌을 더 강조한다. 여인이 처음 간청 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간청하였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보내 주십시오." (마태 15:24)

라는 대목을 삽입하였다. 예수가 어쩔 수 없이 여인을 대하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래서 예수가 여인에게 기껏 한다는 이야기가,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이다. 복음의 보편성과는 동떨어진 대답이다. 이 삽입 이후에 여인이 다시 간청하고 위의 이야기가 동일하게 이어진다.

눈에 띄는 것은 예수가 유대인들을 자녀라고 일컫은 반면에 이방 사람들을 가리켜 “개”라고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매정하게도 “우리 애들에게 줄 밥을 너희 개들에게 줄 수는 없어”라고 이야기하였던 것. 복음서에서 예수는 진지한 인물이다. 농담으로 개라는 표현을 쓸 분이 아니다. 더구나 개라는 표현은 농담으로서도 그리 좋은 표현이 못된다. 결론은 여인의 정성에 감복하여 아이를 살려주었다는 것이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범위가 지금과는 사뭇 다르게 유대인 공동체에 한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기독교가 유대인 공동체를 벗어나 세계 종교가 될 것인가의 고민은 예수 사후 기독교 공동체가 확장되면서 나중에 제기되는 문제이다. (마태복음은 전체적으로 복음이 유대인을 위한 것이라는 신학을 견지하고 있다. 초기의 많은 기독교 공동체들이 지지했던 신학이다.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는 완전히 유대인 집단이었음을 상기할 것. 복음을 보편적인 것으로 보았던 누가복음의 입장과는 반대된다. 마태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는 자기 입장을 개진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따라서 자기 입장을 분명히 하는 방향으로 약간의 첨삭을 거쳐 복음서에 실었다. 반면에 누가복음에는 이 이야기가 실리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포스트에 올리게 된 것은 다소 엉뚱한 계기에서이다. 오늘 신약성서 수업시간에 바로 위의 내용이 강의되고 있었을 때, 한 녀석이 재미있는 질문을 했다. “그 여인이 예수님과 디베이트(debate)해서 이겼기 때문에 은총을 받게 된 것 아닌가요?” 며칠 전에 유리배님의 포스트(관련글: 디베이트, 디베이트, 디베이트… )를 읽지 않았다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딱 그 포스트에 딱 맞는 사례이다. 미국애들은 만사에 디베이트이고, 그것을 통해 승패를 분명히 가리려고 한다. “시로페니키아 여자의 믿음”이라는 이야기에 디베이트를, 그것도 디베이트의 승리를 생각하다니, 미국의 문화에서나 나올 법한, 참으로 미국적인 해석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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