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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발제

동아시아에 울려퍼진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by 방가房家 2023. 5. 26.

어쩌다가 출판사 회보에 서평을 하나 쓰게 되었다. "침묵"을 출판한 홍성사에다가.
(우리나라에 "침묵"은 성바오로출판사에서 나온 것과 홍성사에서 나온 것 두 가지가 있다. 그러나 저작권 계약을 홍성사에서 하였다. 앞으로는 홍성사 것이 정식적으로 유통될 것으로 보인다. 얼핏 본 바로는 두 출판사의 번역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홍성사 판에서 신부님이 '하나님'이라고 자꾸 말하는게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이 유명하고 평도 많은 이 책을 어쩌자고 내가 평을 한다고 하였던가. 솔직히 말하면, 결심만 해놓고 아직도 이 책을 읽어보지 못해 이번 기회에 읽고 싶은 욕심이 컸다. 써놓고 보니 괜한 짓을 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분량의 제약이 심해서 쓰는데 애를 먹었고, 개신교 독자를 위한 서평이라는 점도 좀 작용하였다.



동아시아에 울려퍼진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역사를 바탕으로 한 허구가 역사 자체보다 큰 감동을 주는 일이 있다. 역사학도들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사료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동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17세기 일본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배경으로 선교사로 파견된 신부의 고뇌를 그리고 있는 『침묵』은 역사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역사를 뛰어넘는 감동을 주는 책으로 유명하다. 이 책은 신앙인들에게는 진실된 신앙의 의미를 되묻게 해주고 종교를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일본 종교의 특성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박규태 선생님의 일본 종교 소개서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의 관련서적 안내에는 다른 학술서적 사이에 이 소설이 버젓이 자리하고 있을 정도이다. 많은 선학들이 이 책을 권했으며 한국에도 일찍이 번역되어 30여년 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홍성사에서 이 책의 중요성을 잘 알고 소중히 다루어주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새로운 옷을 입히고 내용을 보완하고 더구나 한국 출판계에서는 보기 힘든 배려인 보급판까지 갖추어 다가가기 쉬운 모습으로 새로 출판된 모습이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이 많은 이들에게 훌륭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독자들에게 무겁기 그지없는 실존적인 문제를 매혹적인 방식으로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침묵’이라는 제목이 직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듯이, 고난의 상황에서 신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긴박한 구성에 이끌려 가는 와중에, 독자들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절규의 의미를 묵상하게 되고, 의로웠으나 불의한 상황에 처한 욥의 항변에 대해 자신의 입장에서 성찰하게 된다. 모르는 사이에 신정론, 고통, 악, 신의 존재, 토착화, 구원 등의 주제들이 주렁주렁 달려 나오게 된다. 사실『침묵』을 대상으로 여러 편의 논문들이 쏟아져 나올 정도로,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주제는 매우 깊고도 넓다. 그러므로 이 짧은 글에서는 한국의 독자로서 이 책에서 느낄 수 있는 바를 간단히 늘어놓고 싶다.


소설이 이야기하는 신의 침묵의 문제는 기독교 세계의 보편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동아시아의 선교라는 구체적인 맥락에서 진행되는 특수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국의 독자들은 자신의 역사적 경험에 의해 소설에서 다루어지는 동아시아의 기독교 박해라는 상황을 더욱 풍성하게 음미할 특권을 지닌다고 생각된다. 일본과 한국은 일견 닮았으면서도 참으로 다른 이웃이어서 여러 가지 비교할 거리를 남긴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잠입해 온 외국인 신부의 순교가 발생한 점도 동일하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다만 신도들을 순교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회유하여 배교시키는 방법을 개발하였고 기독교의 뿌리를 근절하는데 성공한 반면에, 한국에서는 순교를 통해 숱한 성인들이 배태되었고 결국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 차이때문에, 이 소설의 배교로 마무리되는 외견상의 결론이 최종적인 해답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1960년대 한국 신학계에는 토착화 논쟁이 있었다. 그 논쟁에서 유동식, 윤성범과 같은 신학자들은 ‘씨앗(복음)과 토양(문화)’라는 비유를 통하여 토착화를 설명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소설에서는 그 비유를 뒤틀어서 사용한다. 배교한 신부 페레이라는 일본이 늪지대이기 때문에 기독교라는 묘목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라죽을 수밖에 없다고 실토한다. 그리고 이 토착화의 포기가 결국 배교를 통한 신자들의 구명의 근거로 작용하게 된다. 신부의 배교의 결정적인 원인은 자신들 때문에 죽어가는 일본인들의 죽음을 참을 수 없어서이기 때문이다. 배교는 자신을 버리고 남을 구하는 역설적 구원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 생각엔 소설의 결론이 그렇게 간단히 주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여전히 남는 문제들을 작가는 예비해 놓았기 때문이다.
배교를 답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기독교 보편성의 포기를 의미한다. 그리고 페레이라가 회피했던 문제, 즉 배교를 해서 목숨을 구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면 순교한 이들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의 문제가 남게 된다. 배교가 답이라면 순교는 개죽음이 될 것이고, 배교가 답이 아니라면 무고한 죽음을 막기 위한 신부의 노력은 헛된 것이 될 것이다. 사실 작가는 이 역설에서 독자를 풀어주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한국인 독자의 입장에서 이 역설의 의미는 더 심화될 것이다.
문제를 던져주는 데 소설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기에, 해답까지 받아 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노파심에서 사족을 달자면, 너무나 간단히 이 소설의 문제제기를 일축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예컨대 어떤 개신교 독자는 “당연히 침묵하시지. 가톨릭 신부 따위에게 하나님이 응답하실 리 있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가톨릭 교인은, “그건 배교자의 변명일 뿐이야. 그러니 선교가 안 되지. 한국의 경우를 봐. 순교자의 피만이 열매를 맺는 것 아니겠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반응이다. 다른 교단에 대한 편견 때문에, 혹은 순교에 대한 강인한 확신 때문에 이 책의 소중한 문제제기가 희석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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