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을 쓰다보니 탑골공원에 가고 싶어졌다. 무심하게만 지나치던 곳인데, 그 곳이 내 논문에 나타날 줄이야. 보지 않는다고 해서 별 탈이야 있겠느냐마는, 쉽게 볼 수 있는 곳을 상상하면서 쓴다는 게 가려워서 주말에 잠시 탑골공원에 들러보았다. 논문에 들어간 건조한 글에 그날 찍은 사진을 보태어 구성한 포스트.
서양인들이 서울에서 종교, 그 중에서도 불교의 흔적을 볼 수 있게끔 해주었던 예외적인 유물로는 도성 내에 있었던 원각사지 석탑과 그 옆의 비문이 있었다.
[원각사(圓覺寺)는 고려 때부터 흥복사(興福寺)라는 이름으로 내려오던 사찰로, 조선 태조 때 조계종의 본사가 되었고, 1464년(세조 10)에 세조에 의해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1504년(연산군 10)에 연산군이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방(妓房)으로 만드는 바람에 승려들이 머물 수 없게 되었고, 1512년(중종 7)에 폐사되었다. 원각사 자리에는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가 남아 있다. 현재는 탑골공원 내에 있다. 2000년 이후 원각사지십층석탑에는 표면 훼손을 막기 위한 유리 보호각이 설치되어 있다.]
서양인들은 처음부터 원각사지 석탑의 존재에 주목하였다. 서울에 종교 건물이 없다고 했던 로웰도 옛 종교의 흔적으로 ‘서울에 존재하는 유일한 탑’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탑의 ‘아름다움’에 대해 상당 부분을 할애해 묘사하였으며, 민가에 둘러싸인 탑에 접근하고 한 집주인의 양해를 구해 지붕에 올라가 어렵사리 탑의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하였다. 그는 중국이 인도로부터 불교의 이념만을 받아들인데 반해 한국은 중국으로부터 불교의 이념과 형태(표현 방식)을 모두 받아들였다며, 탑의 관찰에서 얻은 인상을 한국 불교 전반까지 확대해서 이해하려고도 했다. [Lowell, Chosö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187-89.]
로웰이 서울에서 종교를 볼 수 없다고 하면서도 원각사지 석탑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은 논리상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보기에 한국에 종교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있었다가 사라진 것이고, 원각사지 석탑은 바로 종교가 존재했던 과거의 영광을 말해주는 유물이기 때문이다. 민가에 둘러싸인 채 ‘버려진 외로운 탑’의 모습은 쇠퇴한 불교의 모습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로웰에게 비춰졌다.
비숍이 서울의 첫인상의 하나로 언급한 중요한 유적도 원각사지 석탑이었다. 비숍은 다섯 번이나 사진을 찍으러 탑을 찾았으며, 갈 때마다 신선한 인상을 받았다고 말한다. [Isabella Bird Bishop, Korea and Her Neighbours: A Narrative of Travel, with an Account of the Vicissitudes and Position of the Country (New York: Fleming H. Revell, 1897), 43.]
로웰이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주변 민가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는 1897년에 이 지역이 서양식 공원으로 조성되기 이전의 상황을 말해준다.
이후 원각사지석탑은 개신교 선교사들에게도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최초로 내한한 선교사 알렌은 1895년도 글에서 서울의 볼만한 곳으로 원각사지석탑을 소개하였다. 게일 역시 원각사지석탑을 촬영하여 1898년 책에 수록하였으며, 헐버트와 게일은 탑의 역사적 유래에 관한 글을 썼다.
[Horace N. Allen, "Places of Interest in Seoul: The Marble Pagoda, or Stone Pagoda," The Korean Repository 2-4 (April, 1895): 127-33. 이 글에서 알렌은 이 탑이 원나라 황제가 고려에 선물한 것이라는, 잘못된 전승에 의존해서 탑의 유래를 설명하였다. 이 잘못된 설명은 헐버트의 글로 추정되는 다음 글에도 나타난다. Anonymous [attributed to Homer B. Hulbert], "The Marble Pagoda," The Korea Review 1-12 (Dec., 1901): 534-38. 탑에 대한 게일의 해설로는 다음을 볼 것. James Scarth Gale, "The Pagoda of Seoul," Transaction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6-2 (1915): 1-22.]
원각사지 석탑과 함께 있는 대원각사비도 서양인들의 이목을 끌었으며 역시 시각적 재현의 대상이 되었다. 비숍은 원각사지석탑 근처에 거대한 거북 등 위에 놓인 비문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그녀는 주변 민가 어린이들이 놀이터에 있는 것처럼 원각사비에 올라타 있는 광경을 묘사한 삽화를 장 말미에 배치해 놓았다. [Bishop, Korea and Her Neighbours, 48.]
1910년에 한국을 방문한 쿨슨 일행 역시 원각사지를 방문하고 비문 스케치를 남겼다. 비숍의 그림과 비교해 볼 때 이 지역이 공원으로 조성된 이후의 상황을 보여주는 그림이다.(그림 11) Constance Coulson, Peeps at Many Lands: Korea (London: A. and C. Black, 1910), 48. 이 삽화를 그린 이는 피츄(E. H. Fitchew)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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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2010년 11월에 들린 탑골공원.
최근 탑골공원 성역화 사업을 거쳐 정비된 모습이다. 탑은 유리벽에, 비문은 전각 안에 답답하게 들어앉아 있다. 특히 원각사지십층석탑은 유리벽 안에 어른거리는 모습이 실물을 보고 있는 것인지 허상을 보고 있는 것인지 신비한 느낌마저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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