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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돌아다니다가

피닉스 민속촌

by 방가房家 2023. 5. 24.

미국 서남쪽 구석의 사막지대인 애리조나는 가장 뒤늦게 미국 땅이 된 곳 중 하나라서, 미국 사람들 들어와 근대적인 삶을 구가한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곳이다. 대략 19세기 말부터 미국 사람이 들어와 살았는데, 이 시기는 우리나라가 문호를 열고 근대화를 시작한 시점과 얼추 비슷해 약간이나마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 부분이 있다.
지금의 애리조나가 미국 땅이 된 것은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미국이 이겨 애리조나와 뉴멕시코 지역을 획득한 1850년이다. 1863년에 애리조나라는 이름의 준주(準州, territory)로 지정된다. 그 이후 캘리포니아로 가는 66번 길(Route 66)을 타고 사람들이 몰려와 여기저기 금광을 찾아 정착하면서 조그만 도시들이 생겨난다. 피닉스 지역에 마을이 생기고 애리조나의 중심지로 지정된 것은 1889년의 일이다. 뉴멕시코와 함께 준주에 머물러 있었던 애리조나가 주로 승격된 것은 1912년이다.

저번 주에 잠시 시간이 나서 피닉스 도심에 있는 민속촌(Historical Heritage Square)에 갔다. 이곳에는 1890년대에 형성된 7-8 채의 집들이 보존되어 있다. 집들은, 미국 영화에서 익히 보아오던 그런 모습들이었다.






민속촌 집들은 각자 개성이 있다. 어느 집은 찻집으로 운영되고 어느 집은 인형 박물관으로, 또 어느 집은 기념품 가게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런 방식들은 괜찮아 보인다. 빈 집 만들어놓고 문 걸어잠그는 것보다는, 그렇게 생명을 불어넣고 들어가 보게끔 하는데, 집을 위해서도, 관람객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집은 피닉스 1890년대 시장이었다는 로손(Rosson)의 큰 집이다. 2층짜리 이 큰 집에서는 입장료를 따로 받으며, 30분 간격으로 옛 하녀복장을 차려입은 할머니의 가이드를 받아서 관람하게 된다.

로손의 집은 1897년에 완공되었다. 그 안에는 당시 쓰던 물건과 이후 기증받은 물건들이 꽉 들어차 당시 생활상을 재현해보이고 있다. 그런데 나를 정말 놀라게 했던 것은 이 집이 지어질 그 때부터 전기 시설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전등이 갖추어져 있고 좀 투박하긴 하지만 전기 토스트로 빵을 구워먹었다. 전기와는 상관없지만, 각 방에는 수도 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화장실에는 수세식 변기가 있다. 나한테는 자꾸 한국과 비교하려는 버릇이 있는데, 요즘 한국 근대에 대한 자료를 많이 봐서 19세기 말이라는 시기가 눈에 밟힌다. 1890년대 후반이면 막 개신교 선교사, 외교관, 상인 등 유럽과 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들이닥치기 시작한 때이고, 처음 전기불이 들어오고 전화가 놓여서 사람들이 막 신기해하던 시기이다. 덕수궁에 처음 전등이 켜졌을 바로 그 때에, 미국의 졸나 시골집이 (당시 애리조나에서 가장 좋은 집이긴 하지만) 완벽한 전기 시설을 갖추고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활을 했다니 위화감마저 느껴진다. 가이드는 당시 냉장 시설이 없어 얼음 창고를 따로 두었으며 냉방이 안 되어 다락에 사람이 살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런 당연한 이야기는 위로가 안 된다. 물론 내 느낌은 착각이다. 미국이라면 그 당시에 전기 쓰고 사는 게 당연한 일일텐데, 나 혼자 애리조나가 시골이라고 무시하고 있다가 뒷통수를 맞은 것이다. 미국의 시골 애리조나와 세계의 변방 조선은 엄연한 근대화의 궤적의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인데 혼자 딴 생각을 했던 것이다.
미국의 옛 것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단절되지 않은 역사를 가진 사람들의 삶에 대한 질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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