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면서 시간에 쫓겨 피를 말리는 상황에서 나는 별 의미 없는 짓을 하면서 시간을 죽이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어, 책을 다 읽고 나서 세 시간 안에 내용을 정리해 글을 작성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윈도우에서 프리셀 게임을 실행시켜서 (심한 경우엔) 거의 한시간 남짓 시간을 소비해서 남은 시간을 두 시간으로 만들어 버린 후에나 글쓰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두 시간의 경우엔 한시간 반으로 만들어 버린다. 혹자는 내가 여유를 부리는 것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지만, 남은 두 시간 동안 내가 하는 꼴을 본다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세 시간 동안 여유 있게 작업할 수 있는 상황에서,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며 세 시간을 두 시간으로 만들 때 하는 그 게임을 나는 “자뻑성”(자해적이라는 의미에서) 게임이라고 명명한다.
주로 간단한 것들을 자뻑성 게임으로 하게 된다. 내게 있어서 20세기의 자뻑성 게임은 테트리스였다. 다른 테트리스가 아니라, 도스용 아래아 한글 프로그램 안에 내장된 테트리스를 말한다. 아래아 한글 2.0, 2.5, 그리고 3.0을 갖고 주로 리포트와 논문을 썼던 나는, 아래아 한글에 들어있는, 블럭들의 색깔 구분만 겨우 되어있는 아주 조야한 그래픽의 테트리스 게임을 죽어라 하면서 소중한 글 쓸 시간을 죽이곤 했다. 밤을 샐 때면 테트리스 게임한 시간이 더 많을 때도 있을 정도였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그래픽으로 이루어진 이 게임은, 하드웨어 사양이 486 이상으로 급격히 발달하면서, 초기 설정과는 달리 매우 고난도의 게임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 난이도가 제작자의 의도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사양 컴퓨터인 경우, 이 테트리스의 최종인 10단계에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깨기가 불가능해 보이는 무지막지한 속력으로 블럭들이 떨어졌다. 그러나 글 쓰 때마다 자뻑성 게임으로 테트리스를 계속 해오던 나는, 어느 순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휙휙 떨어지는 블럭들을 침착하게 처리하고 10단계를 마스터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정적만이 지배하고 있던 어느 날 밤에 일어난 성취였다.
그 뒤 이야기를 더 하자면, 잘못된 프로그램 때문에 생긴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연마된 나의 테트리스 실력은 훗날 빛을 보게 된다. 게임 사이트들이 유행하기 시작한 시절, 테트리스는 대전 게임으로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고, 개인적인 수양 차원에서만 향유되던 이 게임에 죽고 죽이는 살육의 세계가 도입되었다. 그 세계는 곧 하수와 고수가 나뉘어지고, 고수를 뛰어넘는 초고수, 그 위의 절대고수, 그리고 지존이 나타나며 하나의 무림(武林)으로서 정리된다. (한게임에서 도입한 지존 위의 ‘신’이라는 등급은 불경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름대로 출중한 테트리스 무예를 갖추고 세계를 홀로 배회하였다.
내가 활동하던 게임 사이트는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깨미오(gamio.com)라는 곳이었다. 대중성을 얻는 데 실패하였고, 결국 지금을 문을 닫은 곳이다. 그러나 테트리스인으로 말하건대, 이곳의 테트리스야말로 테트리스의 본령에 충실한 시스템을 제공한 곳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테트리스 대결의 본령은 1:1에 있다고 생각한다. 깨미오는 1:1에 있어서 최적화된 화면, 아이템 체계, 키조작에 대한 반응을 갖춘 테트리스를 제공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의 인기를 끈 한게임이나 넷마블은 6인 팀플 위주였으며, 아이템 체계도 그에 맞게 구성되어 있다. 1:1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조건도 형편없었고 별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아이템이 랜덤으로 주어지는 다른 곳과 달리, 깨미오 테트리스는 자신이 쌓아올린 실적(몇 칸의 블럭 한꺼번에 없애기)에 의해 구슬을 확보하고, 확보된 구슬 숫자에 따라 자신이 사용할 공격이나 수비의 아이템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 선택에는 다양한 전술적 요소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랜덤하게 아이템이 주어지는 다른 사이트들에서 벌어지는 사술(邪術)들에 비한다면 깨미오는 테트리스의 도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마당을 펼쳐주는 곳임에 분명했다. 이 사이트는 작년에 문을 닫았지만, 그 안에 내 이름이 표함된 순위표의 웹 페이지가 살아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할 수 있었다. 사라지기 전에 여기 캡처해 올려서 추억으로 남긴다. (내 이름은 28위에 있다. 이중에서 내가 진정 승복할 수 있는 상대는 1위 김유민을 포함해 네다섯 정도였다.)
윈도우 사용 이후, 아래아 한글의 테트리스는 사라졌고, 그 대신 나의 자뻑성 게임이 된 것은 처음에는 윈도우에 기본으로 깔려 있는 카드놀이(Solitaire)였다. 카드놀이를 ‘세장씩 돌리기’로 설정하고 게임하는 것도 싫증이 날 무렵, 프리셀을 시작하게 되었다. 프리셀의 경우에는 테트리스처럼 고수가 되지는 못했다. 해서 남는 것 아무것 없고, 남에게 보여줄 것도 없는 그냥 심심풀이 땅콩의 단순한 게임을 요즘도 글 쓸 때마다 열게 된다. 사실 자뻑성 게임은 나의 생활의 긴장을 나타내는 척도이다. 요 몇 년간, 사고와 그에 따른 휴식 기간 동안 나는 프리셀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시간에 속박되어 글을 써내는 긴장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에 수업을 많이 듣고, 그에 따라 생활이 빡빡해지면서 그에 비례해 나의 자뻑성 프리셀의 횟수가 늘게 된 것이다.
프리셀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에 관련된 중요한 글을 소개한다. 오래된 딴지일보 기사로, <프리셀 프로젝트>라는 글이다. 이 글에는 요즘의 위키피디아 같은 집단 지성의 위력이 처음으로 발휘된 고전적인 사례인, 초기 인터넷 사용자들이 조직한 프리셀 프로젝트가 소개되어 있다. 아울러서 프리셀 유저들이 꼽은 어려운 판들도 소개되어 있다. 관심있는 사람들은 도전해 보시길.
대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어려운 판으로는 617 1941 10692 세 개를 꼽는다.
기타 비교적 어렵다고 소문난 것들:
169, 178, 258, 454, 617, 718, 1689, 1941, 2021, 2350, 2577, 2607, 2670, 2772, 3285, 3342, 3349, 3685, 3772, 3788, 3801, 3973, 4257, 4368, 4540, 4591, 4714, 4946, 5179, 5374, 5453, 5482, 5490, 5548, 5557, 6343, 6673, 6745, 6751, 6768, 7107, 7160, 7600, 7700, 8005, 8323, 8534, 8591, 8652, 8678, 8749, 8820, 9250, 9385, 9538, 9617, 9700, 10589, 11281, 11386, 11409, 11430, 11677, 11854, 12211, 12313, 13015, 14051, 14188, 14676, 14795, 14879, 14! 965, 14977, 15023, 15099, 15130, 15133, 15164, 15227, 15238, 15710, 15746, 15905, 15939, 16191, 16575, 16576, 17277, 17524, 17764, 17768, 18623, 18992, 19410, 19484, 19633, 19763, 19861, 20055, 20251, 20589, 20715, 20912, 21051, 21185, 21278, 21785, 21896, 21899, 22332, 24063, 24457, 24549, 24735, 25123, 25! 155, 25450, 25599, 25602, 25790, 25856, 25995, 26093, 26183, 26197, 26369, 26421, 26576, 26693, 26694, 26710, 27188, 29001, 29154, 29198, 29345, 29704, 30000, 30108, 30394, 30615, 30712, 30801, 31044, 31266, 31465, 31601, 31647, 31729, 31918, 3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