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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잡기

드라마를 보며 드라마를 공부하는 것

by 방가房家 2023. 5. 22.

<드라마틱>에 실린 <하얀 거탑>의 작가 이기원의 인터뷰를 읽다가 다음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가급적이면 현실적인 상황에서 모티브를 얻으려고 하죠... 이런 현실적인 소재 중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 장준혁이 엘리베이터에서 소리지르는 장면이에요...
열 받아 있는 데 들어와서 층마다 버튼을 다 누르면 짜증이 나거든요. 이 때 장준혁이 화난 것을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 소설 같으면 ‘아, 화났다’ 하면서 두 페이지는 쓸 수 있죠.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그걸 어떻게 보여주느냐. 이런 걸로 보여주는 거죠. 소리지르고 나서 자기도 흥분해서 내린 후 계단으로 내려오고, 이걸로 사람들이 장준혁이 진짜 흥분했음을 알게 되잖아요. 이런 부분을 찾지 않으면 드라마가 클리셰 투성이가 돼요. 다른 작가들한테 욕먹을 얘기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드라마를 보면서 드라마를 공부해서 그래요. 사실 작가들 입장에서는 안 쓰려고 하지만 너무 시간에 쫓기고 하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쓰게 된 거거든요. 근데 극작을 배우는 사람들이 보고 공부하면서 저렇게 쓰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위험하죠. (“심층인터뷰: 등로주의자, 탑의 꼭대기에 오르다,” <<드라마틱>>17호(2007.3.12), 106.)

인터뷰를 보면서, 자기 컴퓨터에서 출력시켜놓고 그것이 출력되어 나오는 사무실까지 뻔질나게 뛰어가는 유명한 ‘인쇄 정길’ 장면, 술자리에서 장준혁이 노래 잘한다고 시계 풀러주고 ‘빤스 벗고 도와줘’라는 말로 의협심을 나타내며 헤드락도 서슴지 않는 유필상 캐릭터 등이 작가와 연출가의 삶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장면임을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러한 디테일들이 나를 이 드라마 앞에 앉혀 놓았다. 삶의 경험과 준비 기간에 그 분야를 취재해서 얻은 정보들이 체화되어 나타난 장면들이 드라마의 힘이 된다. 만약 “드라마를 공부해서 나온 드라마”였다면, 그저 <ER>에서 이렇게 하니까, <그레이스 아나토미>에서 그렇게 하니까, 심지어는 <종합병원>에서 이렇게 했으니까...라는 식으로 이야기의 세부들이 짜여졌다면 나는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좀 더 확대해서 말하면, 나는 같은 이유에서 조폭들 등장하는 영화들을 보지 않으며, 연애를 다룬 대부분의 드라마들을 보지 않는다. 영화를 보며 영화를 배웠고, 드라마를 보며 드라마를 배운, 그래서 삶의 현실과의 피드백 관계가 단절되고 장르 내에서 자가증식을 하며 생성된 작품들에는 관심이 가지 않는다. 물론 장르의 규칙이며 내적 역사라는 것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삶을 반추할 여유도 없이 만들어진 것들을 봐줄 시간은 나에게 없다.

“클리셰 투성이”, “드라마를 보며 드라마를 공부한다는 것.”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말이다. 학문은 현실에서 출발한다는 것, 삶의 현실에 뿌리박아야 한다는 것,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그런 이야기들이 나온다는 것은, 실상 학문이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의 반증이다. 논문을 보며 논문을 공부하는 것, 그래서 학문적 클리셰로 가득 찬 글을 쓰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때가 많다. 글을 이루는 개념들은 끊임없이 삶으로부터 길어오는 것이어야 할진대, 개념들로만 이루어진 폐쇄 회로에서만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 그 강력한 폐쇄 회로에 갇혀서, 삶과 차단되는 것에 대한 상념은 책읽고 남는 시간에나 하는 것으로 미루어질 때가 많다. 드라마의 클리셰는 욕하면서 학문적 클리셰는 찬양하는 나의 이중적인 모습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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