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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_자료/음악

1938년 전화 통화

by 방가房家 2023. 5. 21.

한국 대중문화에 사용된 외래어를 약간 언급했는데, 그걸 이야기할 때 꼭 소개하고픈 노래가 하나 더 있다. 사실 외국어 사용만이 이 노래의 특징은 아니고, 여러 주목할만한 점들이 있는 특이한 노래이다.

 

1. 이 노래는 저작권이 소멸되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노래이다. 저작권 소멸 요건은 매우 까다롭다. 작곡자, 작사자, 가수가 “죽은” 지 50년이 지나야 하고, 음반 취입된 지는 30년이 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 그런 노래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지만 그래도 잘 찾아보면 3-40편 이상의 노래가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 기사를 참고할 것.)
1938년 발매된 “전화일기”라는 노래로 박향림과 김해송이 듀엣으로 불렀다. 1930년대에는 엽기발랄한 노래가 좀 유행했는데 이를'만요’(漫謠)라고 부른다. 김해송과 박향림은 만요로 이름을 날린 대표적인 남녀 가수이다. 김해송은 작곡자로도 많은 활동을 했고, 박향림은 “오빠는 풍각쟁이야”라는 노래로 유명한 가수이다. 박향림이 1946년에 요절한 덕분(?)에 그녀의 노래 대부분은 저작권 제약없이 즐길 수 있다. (저작권법이 아니었던들 내가 이런 가수들을 어찌 알 수 있었을꼬…)


2. “오빠는 풍각쟁이야”가 널리 사랑받은 데 반하여(“태극기 휘날리며”에도 삽입되었다고 한다. 이 노래도 참 파격적이다.), 이 “전화일기”는 유행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것은 이 노래가 발매되자마자 일본총독부에 의해 금지곡이 되었기 때문이다. 1938년은 하수상한 시절이었다. 사회가 전시동원으로 넘어가는 시점이었고, 그래서 발랄하고 재치넘치는 이 노래가 별 잘못도 없이 철퇴를 맞았던 것 같다.

3. 이 노래는 참 놀랍다.
 

(남) 모시모시 아 모시모시 혼쿄꾸 후따센 나나햐꾸 하찌쥬 야빠요
(남) 헬로 헬로 당신이 정희씨요
(여) 네 네네 왓 이즈 유어 네임
(남) 엊저녁 속달편진 보셨을 테지요
(여) 아 약광곤줄 잘못 알고 불쏘시갤 했군요
(남) 저응 저응 아이 러브 유
(여) 아이고 망칙해라 아이 돈 노우 빠이 빠이
(남) 아차차차차 으응 으응 으응 으응 저 끊지 말아요 죠죠죠 죠또마떼
(합) 끊으면 나는 싫어 나는 몰라요

일본어, 영어, 한국어가 완전히 뒤섞여 가사를 이루고 있다. 가요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노래이다. (두 가수의 영어 발음이 너무 소박하여 웃음이 나온다.)
이러한 외국어 사용은 전화기라는 새로운 기계의 사용이라는 맥락에서 정당화된다. 남녀간의 낯뜨거운 대화가 오고가는 전화통화인데, 전화의 이런 쓰임새는 이미(!) 확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쌍팔년도식 사랑이 아니라 38년도식 사랑이다.
가사에 사용된 이 외계어들은 창작이 아니라 당시 젊은이들의 어법의 반영임에 틀림없다. 새로운 언어의 환경이 이처럼 기존 언어를 해체 재구성한다. 요즘 초딩들 인터넷 언어 나무랄 일이 아니다. 지금 돌아가실 연배의 어른들도 환경만 주어진다면 소싯적에는 이런 경망한 언어를 구사했으니 말이다.
 

4. 전화기가 주어지는 것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최근의 휴대전화에 의해서도 우리 생활이 전에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달라졌는데, 전화기의 충격이야 오죽했으랴. 전화가 우리 문화의 양상을 어떤 식으로 바꾸어 놓았는지는 차차 공부할 과제일 것이다.
다른 생각이 하나 난다. 미국 남서부 히스패닉 계열의 기독교 공동체에 전승되는 찬송가 중에 “Telephone”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전화기를 들면 하느님하고 이야기할 수 있을거야”라는 식의 귀여운 노래 가사였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직접 노래를 불러주었는데, 아쉽게 악보를 구해다 복사해놓지는 못했다. 새로운 문물은 삶을 상상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는다. 거기엔 물론 종교적 상상력의 변화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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