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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얻어배우는 것

데이비드 치데스터의 강연

by 방가房家 2023. 5. 19.

(2008.5.2)

데이비드 치데스터(David Chidester) 교수가 한국에 왔다 갔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라는 종교학의 ‘변방’에서 활동하는 학자이지만, 치데스터야말로 현재 종교학의 중심에 있는 학자 중 하나라고 평소부터 생각해왔기에, 참으로 반가운 만남이었다. 마침 내가 그의 서울대 강연 원고의 번역을 맡았기 때문에, 그 내용을 아래에 올린다.

 
치데스터는 이번 한국 강연에 알맞은 주제로 특별히 원고를 썼다. <<새비지 시스템>>을 중심으로 자신이 아프리카에서 한 작업을 소개하고, 서구와 식민지인들의 관계를 분석하는 그런 식의 세계 각지에서의 작업들이 모여서 진정한 ‘세계 종교학’의 이야기를 이룰 수 있다고 제안한다. 물론 이러한 제안에는 한국에서의 작업이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는 그의 기대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글 끝에서 그가 던진 질문들에 잘 나타난다.
원고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그는 발표 중간에 현재 남아공 정부에서 벌이고 있는 새로운 국가 정체성의 형성과 새로운 성지(聖地) 형성 작업에 관한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치데스터는 종교와 공간의 문제를 다루는 <<American Sacred Space>>를 편집한 학자이기도 한데, 현재 남아공에서도 같은 관심을 갖고 공간의 성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한국 청중들과 대화하는 방식에서, 괜찮은 학자로서의 풍모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변죽을 울리는 것처럼 보이는 질문들도 생산성 있는 논의로 전환하는 능력, 참말로 부러우면서 쉽게 획득되지 않는 능력일 것이다.
(줄루 족의 꿈과 환상에 대한 치데스터의 최근 연구를 참고할 것. "Dreaming in the Contact Zone: Zulu Dreams, Visions, and Religion in Nineteenth-Century South Africa,"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76-1: 27-53.)

얼마 전 치데스터의 대표작 <<새비지 시스템: 식민주의와 비교종교>>가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이건 뜻밖의 선물이다. 나는 이 책이 한국 종교학에 있어 소중한 통찰을 담고 있다고 전부터 생각해 왔고, 그래서 어설프게나마 글에서 인용도 하고 소개하기도 했지만, 저 멀리 남아공 종교 이야기를 다루는 이 책이 한국에 소개되는 것은 머나먼 꿈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하여 같이 이야기하게 되고, 또한 더 깊이 소화할 기회를 마련해 준 이 번역(아직 사지는 않았지만!)은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다.


아프리카 종교와 세계 종교학
African Religion and World Religious Studies
 
데이빗 치데스터(David Chidester)
 
나를 서울대학교에 초청하고 “아프리카 종교와 세계 종교학”(African Religion and World Religious Studies)이라는 제목을 정해준 김종서 교수께 감사드린다. 이 제목은 우리가 종교학계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다시 말해 종교에 대해서 생각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종교에 대해서 생각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할 기회를 제공해준다. 구체적으로 종교의 형성을 해석하고 설명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할 때, 우리는 이론적인 틀과 조사 방법에 대하여도 비판적, 특히 자기비판적이게 된다.
“아프리카 종교”라고 하면, 아프리카 내의 다양한 종교적 형태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세계 각지에 있는 다양한 아프리카 토착 종교를 포괄하는 말로 확장되었다. 웹 사이트 http://adherents.com/에 따르면 아프리카 전통 종교와 이주민들의 종교는 백만 명의 종교 인구를 차지하며, 이것은 웹사이트가 집계한 세계 주요 종교들 중 여덟 번째에 해당한다. 물론 긴 종교학사를 통해 아프리카 토착 종교가 주요 “세계 종교”의 목록 안에 나타났던 적은 없었다. 문헌 전통에만 초점을 두기 때문에, “세계 종교”라는 개념은 각 종교들의 구비 전승, 의례 내용, 사회적 형성을 배제하게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종교학”(world religious studies)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세계 종교들”의 연구(the study of "world religions")가 아니다. 토착 종교들이 배제되게끔 고안된 이 체계에 토착 종교들이 포함될 때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 대신에 이 표현을 통해 내가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종교학에서의 지식 생산과 권력 관계들 간의 연관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을 배경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세계의 종교학(a worldly religious studies)이다.
우리가 어떻게 종교를 연구할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려면 역사에 대한 감(感)이 필요하다. 월터 캡스(Walter Capps)는 권위 있는 학사(學史) <<현대 종교학 담론>>(Religious Studies: The Making of a Discipline)에서 이 주제 분야의 과거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을 촉구한다. 그는 종교학의 “지적 과거를 이야기 형태로 말할 수 없는 한, 종교학의 길을 안다고 자처할 수 없다”(Capps 1995: xvi)고 주장한다. 캡스에 따르면,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는 유연하고(flexible) 다양해야(multiple) 한다. 우리의 이야기는 여러 작업가설적 정의들, 방법론적 관심들, 이론적 질문들을 포괄할 수 있도록 유연해야 한다. 우리의 이야기는 많은 다른 지리적 위치들과 역사적 상황에서부터 과거의 내러티브가 생성되므로 다양한 것이어야 한다. 월터 캡스가 말하듯이, “한 주제 분야 안에서 학자가 하는 것은 그가 어디에 발딛고 있느냐에 좌우된다.”(Capps 1979: 180) 따라서 종교학사는 많은 다른 주제의 위치들로부터 생성되는 다양한 것이 될 것이다.
내가 해온 작업에 대하여 말하도록 하겠다. 나는 오랫동안 남아프리카와 같이 식민화된 지역 내에 조건 지워지고 형성된 시각에서 종교에 대해서 생각해 왔고 우리가 어떻게 종교를 연구할 지에 대해서 생각해 왔다. 나의 기본적인 이야기는 <<새비지 시스템: 식민주의와 비교종교학>>(Savage Systems: Colonialism and Comparative Religion)에 나온다. 여기서 나는, 종교학이 학문 분과로서의 자기이해를 갖추려면 이야기 형태로 자기 과거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월터 캡스의 제안과 함께 출발하였다. 그러나 나는 종교학의 지적 흐름에 특정한 “내재적”(internal) 역사가 존재하는지 그 적절성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했다(예를 들면, Preus 1987; Sharpe 1986). 나는 다소 거칠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이것들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역사들인가? 어떤 종류의 이야기이기에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주는 모든 극적인 긴장, 사람들의 갈등이나 비극을 지워버린단 말인가?”(Chidester 1996: xiii) 학과의 창시자, 사상의 학파들, 종교와의 이론적 관련성에 대한 내재적 설명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이야기의 형태로 종교학사를 제시하고자 하는 도전을 감당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종교사가 찰스 롱(Charles H. Long)의 주제를 발전시키면서, 나는 <<새비지 시스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종교학의 역사는, 종교 본성에 관한 유럽 계몽주의의 개념들과 유럽인들에 의해 정복당하고 식민화된 세계 각지 사람들과 문화들이 경험한 폭력적인 현실 사이의 복합적인 관계의 극적인 이야기이다.”(Chidester 1996: xiii; Long 1986: 3-4) 식민화는 단일한 과정이 아니며, 사람들은 균질적이지 않은, 다른 정도의 식민화들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 “극적인 이야기”는 다양한 것일 수밖에 없고, 제국의 야욕들과 특정한 식민 상황들에 관련된 학문적 관심들을 위치시키는 많은 이야기들을 낳게 된다.
이 글에서 나는 종교학의 과거를 세 중첩되는 단계들로 윤곽을 잡으려 한다. 그것은 식민지 종교학(colonial religious studies), 제국주의 종교학(imperial religious studies), 세계 종교학(world religious studies)이다. “세계 종교학”이라는 단계를 설정함에 있어서, 나는 “세계 인류학”(world anthropology)이라고 제시되었던 것과 같은 노선의 프로젝트를 상상한다(Ribeiro and Escobar 2006). 구스타보 린스 리베이로(Gustavo Lins Ribeiro)가 말했듯이, 이 프로젝트는 지식과 권력의 연결에 대해 비판적이고, 인류학 지식이 “변화하는 권력 관계에 의해 역사적으로 달리 구조화되는 맥락 내에 전개되는 특정한 사회, 문화, 정치적 역학관계 내에 뿌리내리고 있는”(Ribeiro 2006: 363) 방식들을 분석한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또한 “지역적이거나 민족적인 인류학들과, 권력이 실린 논쟁이 되는 분과 담론들 사이의 다양한 관계들을 평가하기 위하여 다양한 지역의 인류학자들 간의 대화를 활성화한다”(Ribeiro 2006: 364)는 창조적인 면도 있다. 제국의 중심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식민화를 겪은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 의해 활성화되는 세계 종교학의 비슷한 정신이 종교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종교학사를 되돌아볼 것이 요구된다고 월터 캡스는 제안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다른 방식으로 과거를 되돌아 볼 것이다. 남아프리카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나는 영국의 식민지 개입과 아프리카 종교의 제국주의적 전유(專有)에 특별한 관심을 두면서 종교학사를 되돌아본다.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는 다양하면서 유연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여러 제국의 도전과 식민지의 만남들을 포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현재 종교학을 세계 종교학으로 새로 만들어가고 있는 세계 각지의 학자들 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상호 교류를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
 
 
식민지 종교학
 
식민지 상황에 있는 종교와 종교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식민지 종교학에 관한 논의를 시작해보자. 식민지에서는 지식과 권력 간의 연결이 가장 극명하고 폭력적이다. 나는 남아프리카에 머물면서 종교를 정의하는 폭력적인 정치학에 대하여 배웠다. 그곳에서 나는 종교는 항상 대립적인 용어였다는 상투적 명제의 새로운 의미를 배웠다. 고대 라틴어 렐리기오(religio)는, 무엇을 의미했던 간에, 반드시 수페르스티치오(superstitio)와 대립적으로 정의되었다. 렐리기오가 라틴어 문헌에서 경건한 반복으로 이해되든, 주의를 기울임으로 이해되든, 관계를 묶는 것으로 이해되든, 어떻게 이해되든 간에, 항상 대립되는 수페르스티치오에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위대한 언어학자 에밀 방브니스트(Emile Benveniste)는 고대 로마인들이 수페리스티치오의 무식함, 두려움, 사기성에 반대되도록 렐리기오의 경건함을 사용했다고 말함으로써 렐리기오의 대립적 정의를 강조하였다. 방브니스트는 “‘종교’ 개념은 반대로 ‘미신’ 개념을 요구한다.”고 썼다.(1973: 522). 나는 이 통찰을 여러 번 인용하였다(예를 들어, Chidester, 1996: 234; Chidester, 2005a: 17). 그러나 내가 남아프리카 역사에서 종교의 대립적 정의가 얼마나 결정적인 것이었는지를 발견하지 못했던들, 그것을 통찰로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남아프리카의 시각에서 볼 때, 우리의 주제어 ‘종교’는 그리스 로마 고전이나 유럽 계몽주의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다의 선박들로부터 온 것이다. 그것은 유럽 여행자, 상인, 선교사, 식민 관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종교가 없다고 보고함으로써, 종교를 부정의 도구로, 무기로 활용하였다. 때때로 유럽 선원들은 그냥 배 저쪽 너머를 보고서 육지 사람들이 종교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결국 그들이 경쟁이 벌어지는 경계 지역에 뛰어들었을 때, 그들은 경쟁 지역 사람들에게 종교가 없으며 그래서 땅에 대한 권리가 없다고 발견하게 된다.
땅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종교가 없거나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 땅은 비어있는 것이라는, 비어있는 땅을 발견하는 이러한 식민지의 역학은, 유럽의 해상 팽창에 덧붙여져서 전세계에 걸쳐 항상 반복되어 왔던 주제이다. 종교와 같이 인간의 중요한 특성이 결여되었다고 여겨진 사람들은 또 완전한 인간보다 덜한 존재로 주장되었고 따라서 그들의 땅, 가축에 대한 인간적 권리, 그들 노동력을 통제할 권리를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되었다.
다양한 법칙과 분파들에 대해 염려하는 배경에서(Biller, 1985; Bossy, 1982), 유럽인들은 두 종교인 개신교와 가톨릭을 넘어서 종교의 다양성을 인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590년대에 종교들(religions)이라는 단어가 영어에 처음 등장하였을 때 개신교와 가톨릭이 포함되어 있었고(Harrison, 1990: 39), 이 단어는 기독교인, 유대인, 무슬림, 그리고 극단적으로 모호하지만 잠재적으로 확장성이 있는 범주인 이교도(Pagans)를 ‘종교’라는 유적(類的) 지칭 아래 통합하게 된다(Pailin, 1984). 그러므로 “종교가 없는” 사람들을 찾는 것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을 찾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수행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인간성의 부정이었다.
내가 <<새비지 시스템>>에서 증명해보인 대로, 유럽 관찰자들은 아프리카 인들에게는 종교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거듭해서 남아프리카의 경쟁적인 경계 지역으로 들어왔다. 유럽인들의 보고에 따르면, 코이산 족(the Khoisan)에는 종교가 없었다. 코사 족(the Xhosa)에도 종교가 없다. 줄루 족(the Zulu)에도 종교가 없다. 츠와나 족(the Tswana)에도 종교가 없다. 대신에 그들은 미신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정복되어 식민 지배 체제 안에 들어오게 되면, 이들 모든 아프리카 집단들이 토착 종교 체계를 갖고 있다고 발견되게끔 되었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종교의 존재를 부인했던 것이 경쟁적 경계에서 있었던 전략적인 개입이었던 반면에, 19세기 남아프리카에서 있었던 토착 아프리카 종교의 ‘발견’은 지역 사람들의 유지와 통제를 위하여 기능하였다. 예를 들어 케이프 동부 경계에서 모든 유럽 침입자들은, 여행자, 상인 선교사, 식민 관료를 막론하고 계속해서 그 지역 토착 코사 족에게 어떠한 종교의 흔적도 결여되어 있고, 그와 반대로 미신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코사 종교의 부재에 대한 이 보고서들은 코사 족의 정치 공동체가 붕괴되고 식민 관리 체계의 권력 안에 자리잡게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858년에 식민지 관리 워너(J. C. Warner)는 식민지 전쟁에 의해 흩어지고 식민지 “부락 체계” 내에 유지되고 있던 코사 족의 “종교 체계”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토착민들을 통제, 감시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이 식민 지배 체계가 부여된 한에서, 워너는 코사 족에 사실 종교가 있으며, 그것도 심리적 위안의 감각을 제공하고 사회적 안정을 강화하는, 종교 체계의 두 기본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종교로 간주될 수 있는 종교적 체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동부 케이프의 이 전(前)기능주의자(proto-functionalist)에 따르면, 코사 족은 사람들을 그 지역에 유지하는 식민 관리 체계의 목표를 기묘하게 복제한 위안과 안정이라는 심리적, 사회적 기능들로 환원될 수 있었던 종교 체계를 가졌다는 것이다(Warner, 1858).
이러한 토착 종교 체계의 발견은, 인간의 지각의 발달을 나타낸다기 보다는 관료 체계, 지역 체계, 혹은 보호령 체계의 구조를 반영하는 식민지 유지의 전략이었다(Chidester, 1996: 73-115). 1890년대에 마지막 아프리카 독립 정치체의 붕괴와 함께 모든 아프리카 사람들이 원칙적으로 도시 지역 체계나 농촌 보호령 체계 내에 살게 되었을 때, 유럽인 관찰자들은 모든 아프리카 남녀노소들이 동일한 종교 체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그 종교 체계는 “반투 종교”라고 이름지어졌다. 그것은 사람들을 그 자리에 유지하게 하는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부인(否認)과 통제의 역사 내에 자리하는 우리의 주제어 ‘종교’를 발견할 때, 우리는 이 단어를 완전히 포기하기를 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종교학자들은 ‘종교’라는 단어를 치워버리자고 제안하였다.(예를 들어, Fitzgerald 1999) 그러나 나는 우리가 이 식민지의 유산을 그렇게 쉽게 흔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양한 식민지의 접촉, 만남, 상호 교환 내에서 그 단어의 의미의 빛과 그림자 안에 여전히 살고 있기 때문에, 좋든 싫든 우리는 이 단어에서 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를 고정된 지시체를 지닌 용어가 아니라 비판적 성찰과 창조적 분석의 기회로 삼아야 하는 끊임없는 도전의 기회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인의 시각에서 보면, 식민지 종교학의 유산 중 하나는 아프리카 종교 체계들의 목록을 제공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다. 예를 들면, 줄루 족 종교 체계는 식민 지역 체계나 보호령 체계에 의해 부여된 경계들을 반영하면서(Chidester 1996: 116-172) 다음과 같은 주요 특성들의 목록으로 구성되었다.(다음을 볼 것. Berglund 1976; Chidester et. al. 1997: 212-275; Krige 1936; Preston-Whyte 1987) 하느님God(Weir 2005; Worger 2001), 조상ancestors(Hexham 1987), 희생sacrifice(De Heusch 1985: 38-64; M. Lambert 1993), 점복divination(Du Toit 1971; Ngubane, 1977; 1981) 등이 그 목록을 이룬다. 또한 집단적인 풍요 의례rituals of fertility(Gluckman 1938)와 전쟁 의례rituals of warfare(Guy 2005)를 통해 주장된 정치적 권위와, 영국 식민주의자와 제국주의자들의 번번하면서도 지속적인 주장을 통해 전적으로 신화화된 샤카(Shaka) 왕 계보의 신성한 왕권에 존재한다고 하는 정치적 권위도 이 목록에 포함된다(Hamilton 1998; Wylie 2000).
그러나 식민지 맥락에서 토착 줄루 종교의 이 모든 특징들은 영속적인 체제의 요소들로 여겨질 수 없었다. 상징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종교적 자원으로서, 19세기 동안 이들 요소들은 식민지 상황 하의 복잡하고 투쟁적인 협상 내에서 활용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은 이러한 협상에서 핵심적인 쟁점이 되는 것이었다. 성공회 주교 콜렌소(J. W. Colenso)와 성공회 선교사 헨리 칼러웨이(Henry Callaway)는 나탈(Natal)에 도착한 직후, 줄루 족이 기독교 하느님과 비슷한 지고 존재에 대한 토착적인 이해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콜렌소는 두 줄루 용어, 운쿨룬쿠루uNkulunkulu(위대한 분)과 움벨링간기uMvelingangi(처음 오신 분)을 동일시하고 그것들이 히브리 성서의 야훼와 엘로힘에 해당한다고 보면서 지고 존재 개념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칼러웨이는 이에 반대하면서 운쿨룬쿠루는 사실 줄루 족의 원래 조상으로 이해된다고 주장하며 토착적인 하느님 이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줄루 종교 체계의 설명에서 이 논쟁은 지속되었다. 어떤 해설가들은 줄루 족의 토착적인 하느님 개념을 주장하였고(Wanger 1923-26), 다른 이들은 줄루 족의 조상 종교가 그 개념을 기독교 선교에서 차용하였다고 주장한다(Hexham 1981). 그러나 식민지 맥락에 이 질문을 놓아본다면, 우리는 일련의 줄루 족의 해석 전략들이 영국의 영향과 지배의 확장되어가는 경계를 따라 활용됨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변화에 덜 영향 받은 사람들은 운쿨룬쿠루를 그들 정치 집단의 원래 조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정치적 자율성이 붕괴된 사람들은 운쿨룬쿠루를 모든 인류의 원조(元祖)나 세계의 지고 존재로 해석하였다.(Etherington 1987; Chidester 1996: 160-165).
조상들 역시 쟁점이 되었다. 헨리 칼러웨이가 19세기 중반에 수집한 설명들에서, 꿈 속에 나타난 조상들은 박탈당한 피붙이들로부터 고기를 요구하고 터전을 잃은 자손들이 고향에 돌아오기를 요구하였다(Chidester 2008). 이러한 박탈과 터전 상실이라는 조건 아래, 희생 교환, 가정 질서, 의례 전문가에 의해 행해지는 점복은 모두 영국 군대의 침략과 식민지 개입에 의해 심대하게 영향을 받았다. 영국 식민 관리 테오필루스 셉스톤(Theophilus Shepstone)이 샤카 왕의 성스러운 망토가 모든 줄루 족의 최고 우두머리로서 내세워진다고 주장했을 때(McLendon 2004), 토착 줄루 종교 자원들은 지적인 관계들과 교류가 만나는 지점, 하지만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지점에서 활용되고 재활용되고, 동원되고 경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 체계(a religious system) 대신에 폭력적인 조건 하에 있는 종교적인 경쟁(a religious contest)을 발견하게 된다. 이 식민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우리는 문화 간의 접촉 지점에서 활용되는 역동적이고 유동적이고 경쟁적인 자원으로서 토착 아프리카 종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Carrasco 2004; Ortiz 1947 Pratt 1992). 이처럼 종교를 밑천(sources)과 전략(strategies)으로서 이해하는 것은 분명히 어떠한 종교 생활의 형태의 분석에도 폭넓게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토착 종교의 경우에 이렇게 종교를 맥락화하고 역동적인 것으로 놓는 것은 목록 내에 보관되고 제어될 수 있는 ‘종교 체계’로서 이러한 자원과 전략을 유지하려는 식민지에 반격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제국주의 종교학
 
초기 종교학사는 식민지의 상황에는 신경쓰지 않고 영국과 독일, 프랑스나 네덜란드의 제국 중심지들의 발전들에 중점을 두었다. 1970년대 대학원에 있을 때, 나는 나의 학문 분과의 창설자가 옥스퍼드에 있었던 독일 사람 막스 뭘러(F. Max Muller)라고 배웠다. 1870년 런던에서의 종교학(the science of religion)에 대한 그의 강의가 학제적인 종교학(an academic study of religion)을 발흥시켰다고 배웠다. 나는 또한 그가 말했던 모든 것이 틀렸다는 것도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상의 계보 내에 원조(元祖)가 있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 좋았다. 이러한 계보에는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지식인이었던 타일러(E. B. Tylor), 앤드류 랑(Andrew Lang), 프레이저(James Frazer)가 포함되며 이들은 자신들이 알든 모르든 간에 학제적인 종교학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내가 남아프리카로 옮겨왔을 때에, 나는 그들의 저서들을 다시 읽었고 그들이 단순히 종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들은 아프리카인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최초의, 혹은 "원시적인" 종교에 대한 그들의 이론화 작업은 남아프리카의 아프리카 "야만인들"을 이해하고 정복하려는 대영제국의 야망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
나는 종교에 대한 막스 뭘러의 이론화가 <<동양의 성전들>>(Sacred books of the East) 문고(文庫)뿐만 아니라 대영제국의 영역, 특히 인도와 남아프리카의 닻(anchors)에 의해 정보를 전달받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산스크리트어의 전문가이자 <<베다>>(Vedas) 번역자, 인도의 종교 전통들에 대한 해설자로서 뮐러는 인도에 대해 전문적인 심지어 정치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될 법 하다. 남아프리카에 대한 그의 평생 지속되었던 관심은 놀랄만하다. 그러나 1850년대 중반부터 그는 성공회 주교 콜렌조(J. W. Colenso)와 문헌학자 블릭(W. H. Bleek), 선교 민족지학자 칼라웨이(Henry Calaway) 등 초기 연구자들과 서신왕래를 했고, 자신의 종교 이론화에 이들의 “발견물들”을 집어넣었다(Chidester 2004). 뭘러는 남아프리카의 줄루 인(Zulu)들에 대한 그들의 보고에서 언어, 신화, 그리고 종교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성찰에 통합할만한 일차 자료들을 찾을 수 있었다. 제국주의 중심부에서 세계에 대한 영국의 제국주의적 자세를 받아들였던 그는, 죽음 이전에 발간되었던 마지막 출판물에서 영국의 남아프리카 통치에 대해 열정적이고 논쟁적인 변호를 펼쳤다.
이런 사실들이 어떤 차이를 만들어낼까? 정치적인 맥락을 논외로 하면, 영국 제국주의 이론가들은 여전히 통찰력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뭘러는 언어와 종교에, 타일러는 인식과 종교에, 랑은 문화와 종교에, 프레이저는 의례와 주술, 종교 등에 식견이 있었고 이들의 견해는 아직도 유효하다. 어쨌든 우리는 종교학이 출현하는 초기 단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학제적인 종교학의 조상들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종교학 내의 "착한 애들"과 "나쁜 애들"에 대한 단순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남아프리카라는 내 위치와 관련지어 말하자면, 나는 종교의 이론화가 그 지역의 사람들과 역사적으로 지리학적으로 어떻게 관련이 있는가에 대해 이해하기 위하여 연구해오고 있다.
나는 내가 “3중의 중재”(a triple mediation)라고 부르는 것을 발견했다. 제국주의 이론가들은 인류의 "원시" 조상들과 제국 변방의 "야만인들" 사이에서 인간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중재했다. “현장의 사람들”(men on the spot)을 포함한, 콜렌조나 블릭, 칼라웨이와 같은 식민지 거주자들은 본국 중심지와 경쟁적이고 유동적인 식민지 변경(邊境) 사이를 중재했다. 수탈당하고 거처를 잃었던 토착 아프리카인들은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들과 식민지 상황 하에서의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인 새로운 권력들 사이를 중재했다. 종교 이론화의 문화사에 대한 풍부하고 다면적인 이해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중재의 사례들은 모두 함께 모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Chidester 2007).
그러나 제국주의적 종교학의 유산 중 하나는――인류 선사시대의 비공식적인 잔류물이라고 비난하든, "구제불능으로 종교적인(incurably religious)" 아프리카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라고 찬양하든지간에――아프리카 종교를 "심성(mentality)"으로 환원시킨 것이다. 영국 인류학의 "아버지"인 타일러는 종교의 기원으로서 애니미즘에 대한 그의 전체 이론에의 바탕을, 꿈과 깨어있는 상태를 구분하지 못하는 원시인의 무능력에 두었다. 그는 칼라웨이(Henry Callaway)의 <<아마줄루족의 종교체계>>(The Religious System of the Amazulu)의 자료를 인용했고, 이 자료는 태초의 "꿈의 집(house of dreams)"에 대한 최고의 증거로, 개종한 아프리카 기독교인 음펭굴라 음반데(Mpengula Mbande)에 의해 수집된 자료이다(Tylor 1871: 1:399-400, Callaway 1868-70: 260과 1872: 170 인용; Chidester 2005b: 78-81; 2008참조). 또한 타일러는 진화의 가장 이른 단계에 있는 인류의 원시 심성의 특징인 "만성적인 무지(inveterate ignorance)"의 잔류물로 줄루 인을 내세웠다. 종교에 대한 타일러의 "주지주의적(intellectualist)" 이론에 따르면, 야만인들은 원시적인 우매함 때문에 고통 받았을 테지만 그들이 사는 세계에 대한 설명을 발전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한정된 지적인 능력을 사용했다. 이런 원시적 심성에 대한 증거로써 타일러는 음펭굴라 음반데를 들었다. 음펭굴라 음반데는 "우리는 모든 것들에 대해 들었고, 사실인지 아닌지 분명하게 보는 대신 동의했다"라고 말했다.(Tylor 1871:2:387; Callaway 1868-70: 11-12 인용). 그러나 이 진술에서 음반데의 초점은 대부분의 줄루 인들이 칼라웨이의 선교에 의해 선언된 기독교 복음의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러므로 태초의 우매함에 대한 "야만인의" 증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음펭굴라 음반데는 그가 최근에 획득한 기독교에의 헌신(Christian Commitment)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비록 타일러가 "원시(savage)" 종교의 재구성으로부터 이러한 관련성들을 삭제하기를 선호했기는 하지만, 그의 이론에 대한 증거로써 음반데를 인용한 것은 그의 기획이 쓸모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모든 것이, 심지어 사고 작용조차도, 식민지 관계 안에서 얽혀있었다.
아프리카의 종교를 원시 심성으로 부정해버리는 유럽에 대한 전략적인 반격으로, 존 음비티(John Mbiti)가 아프리카의 종교를 "모든 곳에 편재하는 영적 심성(spiritual mentality)"으로 찬양한 것은 이해할 수는 있지만 지지할 수는 없는, 아프리카 종교에 대한 표현이다. 음비티에 따르면 토착적인 종교 심성은 아프리카인들의 삶의 모든 면에 고루 퍼져있다.
 
아프리카 인이 있는 곳 어디에나 종교가 존재한다. 그는 씨 뿌리고 작물을 수확하는 들판에 종교를 가지고 간다. 그는 맥주 파티나 장례식에 참가할 때도 종교를 가지고 간다. 그리고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중고등학교나 대학교의 시험장에 종교를 가지고 간다. 정치인이라면 의회에 종교를 가지고 간다.
 
음비티에 따르면 아프리카인들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인 공적 활동의 공간 어디에서라도 본질적으로 종교적이다. "아프리카 언어에는 종교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고 음비티가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에 따르면 "아프리카인의 탄생 훨씬 전부터 그의 육체적인 죽음의 먼 이후까지 종교는 아프리카의 개개인과 함께한다."(Mbiti 1969: 1-2; Mbiti 1975: 30 참고) 하지만 이러한 종교적인 휴대성은 정확히 말하자면, 19세기 줄루족의 종교적 꿈에서 볼 수 있는 식민지적 혼란의 결과이다. 조상과의 상호관계와 방위설정이라는 “위치지정적”(locative) 관계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유토피아적”(utopian) 종교성은 휴대용 심성으로 어디에나 가지고 갈 수 있었다.
비록 인지적인 종교 연구가 최근 급속히 발전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사회적인 공간에 심성을 위치시키는 난제에 대면해있다(Lewis-Williams 2002 참고). 아프리카 종교는 어떻게 표현되든 간에 일반화된 심성에 지나지 않는다. 환경을 설명하고 이를 지배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이라고 종교를 설명하는 주지주의적 종교 이론들의 논의에서, 토마스 로손(Thoams Lawson)과 로버트 맥컬리(Robert McCauley)는 지나가면서 줄루 인을 언급하는데, 종교를 주지주의적인 것으로 볼 때 "줄루 인들이 조상들에 대한 믿음과 조상들을 끌어들이는 의례를 가지는 이유는 이러한 믿음과 수반되는 의례가 줄루 인들로 하여금 우연적인 일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환경을 통제하도록 하는 수단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식민지의 역사를 되짚어본다면, 줄루 인의 종교 심성을 설명과 통제의 원(原)과학적인(proto-scientific) 수단으로 본 "주지주의적 설명"이 얼마나 타당한지에 대해 의심을 해봐야 할 것이다. 19세기 줄루 인들의 종교적 삶에 대한 모든 것들은, 모든 해석이 우연적이었으며 문화적‧사회적‧정치적 환경이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사람들이 종교적 심성 대신에 불확정성과 카오스(chaos)와 분투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종교학의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우리는 개념적 통제에의 야망과 식민지 상황에 대한 실제 사이의 틈(gap)들에 대해 주의해야한다.
 
 
세계 종교학(World Religious Studies)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해야하는 도전에 직면해있다. 최근 몇 년간 상당한 연구들이 주제 영역(subject-field)을 현대 서구 안팎의 문화적‧사회적‧정치적 역동성 내에 위치시키며 종교학의 역사에 대해 유연하고 다중적인 서술들을 제공해오고 있다.
한스 키펜베르그(Hans Kippenberg)는 유럽에서의 종교학(Religionswissenchaft)의 발전을 추적하며 고전 이론들과 학파들을 검토했다. 그는 그들의 학제적인 관심이 근대성의 출현과 맞물려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의 종교학사는 종교학의 발전에 대한 순수하게 내적인 설명과는 이질적으로 여겨지는 사회적 요소와 세력들을 포함하는 융통성이 있다. 유럽과 북미 종교학사에 대한 새로운 서술은, 이전에는 무시당했거나 억압되었던 종교학의 측면들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대안적 서술 또한 제공한다. 예를 들어 탈랄 아사드(Talal Asad)(1993; 2003)는 인류학 방법을 역으로 서양에 적용하여 유럽에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생성한 금욕적 수행과 역사적인 갈등에 관해 연구했다. 존 부리스(John P. Burris)(2001)는 "순수" 학문적인 연구보다는 물질적인 전시였던 국제 박람회에 중점을 두었다. 국제 박람회들은 학문적인 종교 연구 발전의 중요한 대응물에 해당하는, 다양한 종교들에 대한 공적인 전시와 공공 교육을 제공했던 기회였다. 란달 스티어스(Randall Styers)(2004)는 종교의 반대 개념으로 상정된 주술에 대한 이론화의 역사에 초점을 두어, 종교학과 현대사회의 종교, 주술과 과학에 대한 기본 범주들의 출현과 의미에 대해 통찰력 있는 역사적인 분석을 전개했다. 토모코 마수자와(Tomoko Masuzawa)(2005)는 유럽과 북미 종교학의 계보학를 되짚어가며 "세계 종교(world religions)" 개념의 역사에 대해 면밀하게 해석했고 어떻게 기독교 보편주의가 종교 다원주의 담론에 의해 대체되는 동시에 유지되었는지에 대해 탐구하면서 종교학에 대한 대안적인 서술을 진행했다.
또한 최근 몇 년 동안 유럽 외부의 종교학에 대한 다중적인 서술들이 증가했다. 이러한 서술들은 "종교"에 대한 관심을 전세계의 지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연구에 재정립시켰다. 종교학사는 다양한 측면에서 식민지와 후기식민지주의적 관점을 통해 제시되었다. 초기 연구들에 따르면, 아시아의 종교는 “영국의 힌두교 발견”(Marshall 1970)이나 “영국의 불교 발견”(Almond 1988)을 통해 유럽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유럽의 문헌학과 역사연구의 내재적 지적 발전에 대한 이야기의 전제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와 반대로, 식민지 상황에 대한 관심은 식민지 주민의 정복과 통제로 확립된 권력 관계 안에 유럽의 발견들이 긴밀하게 존재하는 방식들을 보여주었다. 2005년 도널드 로페즈 주니어(Donald Lopez)에 의해 편집된 논문 모음집 <<붓다의 큐레이터들>>(Curators of the Buddha)은 다양한 불교들이 단순히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스리링카에서 티벳까지 다양한 식민지 상황 하에서 만들어졌음을 암시한다. 식민지의 맥락에 위치한 종교학의 다양한 서술들은 유럽인들의 영웅적인 발견들에 대한 초기의 설명들을 탈신화화하면서, 통치자들로부터 선교사들에 이르는 식민지 행위주체들을 아시아의 종교 전통에 대한 "지식" 생산에 포함시켰다(King 1999; Reinders 2004).
그러나 이들 "창안된 전통"의 역사 연구는 아직도 유럽의 제국주의적 야망에 너무 많은 무게를 두고 있다. 식민지 상황 하에서, 종교적인 범주들은 단순히 발견되거나 순수하게 외부 관찰자에 의해 창조된 것은 아니다. 이 범주들은 외부 지식인들과 토착 지식인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관계와 협상과 중재를 통해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힌두교"의 발명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서 분석자들은 유럽인들이 독특한 인도의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관심으로부터 인도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종교 범주들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Pennington 2005; Wagoner 2003). 그러나 토착인의 행위에 대한 새로운 강조는 "힌두교"라는 범주가 계속되는 지적 생산 과정 중에서 사실상 토착인의 창조와 외부의 창조 둘 다를 통해 출현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전통의 창조에 대한 이전의 통찰도 유지하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유럽에서의 학문적인 중국 종교 연구의 출현은 상호적인 재창조의 관계를 통해 서로를 발견한 아시아와 유럽의 지식인들 의한 것이었다. 발견(discovery)으로부터 창안(invention)으로, 또 상호문화적인 중재(intercultural mediation)로 옮아가는 지적 과거 이야기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학문적 종교학에서 기본 범주들의 복잡한 형성 과정에 대한 더 큰 통찰력들을 얻고 있다.
나의 저서 <<새비지 시스템>>의 말미에서 나는 우리의 식민지 역사를 되돌아보는 과정을 통해 "종교학에서 뭔가 새로운 것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새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끝을 맺었다(Chidester 1996: 266). 그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새로운 것이 될까?
남아프리카의 식민주의,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정책의 잔재에 맞서기 위하여 그 "무언가 새로운 것"은 과거의 족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거를 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짧은 기간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의 고문으로 일할 때, 우리는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놀라운 격언을 종종 인용하고는 했다. 그의 격언은, 억압에 대항하는 인류의 투쟁이 "망각에 대항하는 기억의 투쟁"이라는 것이었다(Kundera 1996: 4). 따라서 무언가를 새로 창조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는 기억의 투쟁을 이어나가야한다. 다양한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가 앞으로의 방법을 찾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들은 필연적으로 힘의 관계들 안에 놓여 있다. "세계 인류학"의 주창자들은 유럽과 대서양에 있는 이론 생산 중심지와 식민화를 겪었던 세계의 모든 지역들 사이에 퍼져있는 힘의 불공평한 관계에 대한 비판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학문적 연구 전반에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대도시의 중심부들은 지구화되는 세계에서 그들의 지적인 과거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들을 말하고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 혹은 이질적인 방언(方言)들을 다 담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세계 인류학의 주창자들은 “대도시의 헤게모니에 의해 덜 형성되고 지구화의 이질적 방언의 잠재력에 더 열려있는” 인류학 이론의 발전, 조사 방법, 그리고 지적인 의제를 위해 논쟁한다(Ribeiro 2006: 364).
이러한 잠재력에 열려 있기 때문에, 세계 종교학은 지배적인 권력 관계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세계적(worldly)으로 될 수 있고, 종교학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포괄하는 데 있어서는 지구적(global)으로 될 수 있다.
<<새비지 시스템>>의 한국어 번역을 계기로, 나는 아프리카에 대한 내 이야기가 어떻게 종교학에 대한 한국의 이야기들과 관련을 가질 수 있을 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식민지의 접촉 지역에서 대립적 언어로 존재했던 "종교(religion)"에 관한,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들과 공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더 배웠으면 좋겠다. 결론적으로, 서로 배울 수 있는 공간을 열기 바라면서 나는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한국에서는 “종교”가 대립적인 언어로서 어떻게 작용하였는가? 즉, 식민지적 관계들의 종교적, 문화적, 지적 정치학 내에서, 합법적인 “종교”는 비공식적인 “미신”에 반대되는 것이었는가? 한국사에서 “종교”는 어떻게 부재(不在)를 표시하는 부인(否認)의 용어로 나타났으며, 어떻게 사람들을 억제하고 통제하는 발견의 용어로 나타났는가? 내가 알기로 한국 학자들 역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해왔는데, 그들은 어떻게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대항하여 나아갈 새로운 길을 찾고 있는가?
다른 길들을 통해 우리의 역사들을 되짚어가면서, 우리는 식민지의 부인(否認)과 억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방식들을 찾고 세계 종교학 안에서 함께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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