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배움/얻어배우는 것

평범한 막사발에서 찾아낸 성스러움

by 방가房家 2023. 5. 19.

(2009.12.5)

성스러움과 속됨, 아름다움과 추함은, 결국 진정한 차원에서는 극복되기 위해 존재하는 개념이 아닐까?
종교학회에서 들은 이승현 선생님의 발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에 있어서 信과 美”에서 인상적인 사례를 만나게 되었다. 야나기는 한국의 도예를 사랑한 일본인으로 유명하다. 이 발표는 그러한 야나기의 민예관이 종교관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야나기는 <<무량수경>>의 법장비구의 48대원 중 제4원에 주목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약 내가 부처가 될 때
내 나라 사람들의 형색이 같지 않고
아름다운 사람과 추한 사람이 있다면[有好醜者]
나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


나처럼 메마른 사람이 보기엔 아름다움/추함의 구별을 부정하는 것은 그런 상대적인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읽을 텐데, 평생 예술을 추구해온 야나기는 그것을 아름다움의 충만으로  읽어낸다. 그는 <무유호추의 원>이라는 글에서 ‘호추’(好醜)를 미추(美醜)로 보고 위의 서원의 내용을 ‘불국토에서 미와 추 둘은 없기’ 때문에 ‘부처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모든 것을 아름다움으로 맞는다는 약속’이라고 해석한다. 미의 범주를 무한한 궁극적 세계와 연결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의 종교적 미학이 관심을 끄는 대목은 그가 한국 막사발로부터 그런 사유를 이끌어낸 부분이다. 한국 남부지역의 평민의 집에서 사용되었던 한 막사발이 일본에 건너가 ‘기자에몽 이도’[喜左衛門井戶]라는 보물이 된 것(위의 사진)은 꽤 알려진 이야기이다.(다음 기사를 참고할 것: 오사카 성과도 바꿀 수 없다는 우리 사발) 야나기는 이 보물에 대해 가장 적극적인 평가를 내린 사람으로, 이 그릇이 “평범함과 종교성이 합일을 이룬 극치”라고 말한다. 발표문의 문장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찻잔은 애초에 조선의 밥공기이고 가난뱅이가 예사로 사용하는 그릇이며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전형적인 막그릇이다. 누구나 만들 수 있고, 얻고 살 수 있었던 흔해빠진 물건이다. 일본의 다인(茶人)들이 즐겨 찻잔으로 사용했지만 천하제일이라고 칭송되는 이 찻잔은, 한낱 잡기가 명기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매우 좋은 일례라고 [야나기는] 제시한다. 야나기는 조선 예술의 불가사의한 일이 1) 인간의 위아래 차별을 가리지 않아 재(才), 부재(不才), 즉 천재와 범인을 구별하지 않는다. 2) 물건의 위아래도 없어서 귀천과 빈부, 상등품과 하치물건의 구별이 없다. 3) 미추의 차이가 없어져서 일체를 아름다움에 섭렵한다. 이것은 미추라고 하는 이원적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 되는’[悉皆成美] 세계인 것이다.

야나기의 글은 일본 사람이 한국의 아름다움을 인정했다는 이유에서 많이 인용되는 것 같다. 일본과 한국을 초월하고 식민지와 피식민지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우리의 일반적인 정서일 것이다. 하지만 야나기의 글을 살펴보면 거기에 종교성의 차원을 더 얹어야 그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조선 예술에서 발견한 것은 아름다움에서 더 나아가 구원이기도 하다.
한국과 일본은 한국 평민의 일상적인 그릇과 일본의 귀족의 명품이라는 맥락으로 더 구체화될 필요가 있으며(식민지와 피식민지의 대비도 슬며시 끼어들 수 있다), 그 대비의 초월은 범인(凡人)의 성불(成佛)이라는 그의 불교 이해와 연결된다. 그는 민예(民藝)에서 범인이 범인인 채로 성불하는 타력(他力)의 길을 발견한다.(“공예의 길은 종교에 있어서 타력도(他力道)이다.”) 평범한 보통 사람이 만든 기물은 이미 피안의 세계에서 숨쉬고 , 모든 것이 미의 정토에 받아들여져 있으며 아미타불의 맹세가 깃들여 있다고 말한다.
야나기의 멋있고 낭만적인 언급은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것이 한국의 막사발이라는 구체적인 재료에 대한 사유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은 내 관심을 끈다. 기독교 신자에서 출발해서 신비주의 사상에 대한 독서를 거쳐 후에는 불교 선종에 심취했던 그의 종교론을 찬찬히 살피고픈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있는 그의 저서 <<미의 법문>>(이학사, 2005)에 대한 독서 의욕이 활활 불타오른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