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디 도니거는 <The Implied Spider> 1장에서 신화에는 현미경의 기능과 망원경의 기능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신화는 일상의 작은 행위들이나 주관적 경험의 의미들을 밝혀준다. 그것이 현미경 기능이다. 반면에 신화는 일상을 초월한 보편적인 의미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것이 망원경 기능이다. 나는 웬디 도니거의 이 표현들을 참 좋아한다. 신화가, 그리고 종교가 우리에게 주는 매력을 너무나도 적절하게 나타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망원경 기능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도니거가 든 예는 성서의 욥기와 바가바드 기타이다.
욥기는 하느님과 사탄이 욥이라는 사람의 믿음을 놓고 내기하는 이야기인데, 우리에게 중요한 부분은 욥이 고난에 시달리다가 하느님과 마침내 대면하는 장면이다. 그 전까지 욥은 재산을 잃고, 병을 앓고, 자식까지 죽는 비참한 꼴을 당하고 있었다. 욥은 불평하지 않았지만, 신실함 믿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수난을 당해야 하는지를 놓고 친구들과 논쟁을 벌여야 했다. 속시원한 답을 알지 못하는 욥으로서는 하느님을 만나면 왜 그런지 여쭙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나타난 하느님의 이야기는 생뚱맞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느냐?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욥기 38:4-5, 표준새번역)
이제까지 아프고 애새끼들 죽어나가는 것이 급박한 실존의 문제였는데, 갑자기 무슨 우주창조 이야기란 말인가. 스케일이 달라도 너무 다르니 대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욥은 말문이 막혀버리고 절대자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시야가 갑자기 우주로 확대되는 망원경 기능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바가바드 기타의 한 대목도 비슷한 시각의 전환을 보여준다. 바가바드 기타의 기본 줄거리는 아르주나가 부족간의 전쟁에 참여해서 전사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인지 고민하는 이야기이다. 전쟁에 참여해서 전사로서의 의무(다르마)를 다해야 하는지, 전쟁에서 적으로 나오는 친척들을 죽여야 하는지 고민을 하는데 친구로 나오는 크리슈나(비쉬누의 현신)로부터 다르마를 지키라는 충고를 받는다. 대화를 나누고나서 크리슈나는 자기의 본모습을 보여준다. 비쉬누 신, 입만 벌려도 상상할 수 없었던 무서운 광경(이 장면 묘사에는 인도인 특유의 과장 표현들이 동원된다.)이 펼쳐지는 신의 모습에 압도되어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시점이 삶에서 우주로 전환되는 신화의 망원경 기능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것이다.
욥기와 바가바드 기타가 기가막힌 예들임에는 틀림없지만, 나보고 예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반드시 <장자> “소요유” 편을 들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소요유 편은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로 시작해 독자들을 황당하게 한다.
아득한 북쪽바다에 물고기가 있다. 이름은 곤(鯤). 크기가 몇천리나 되는지 모른다. 몸을 바꾸면 붕(鵬)이라는 새가 된다. 등짝이 몇천리나 되는지 모른다. 날개를 퍼득일 땐 흡사 하늘에 드리운 구름같다. 바다에 큰 물결이 일면 새는 아득한 남쪽 바다로 옮아 간다. 아득한 남쪽바다, 그곳은 하늘이 파놓은 연못이다.
《제해(齊諧)》는 기이한 일을 기록한 책이다. 이런 이야기가 담겨 있다. 붕(鵬)이 아득한 남쪽바다로 옮아갈 제, 날개짓에 부딪치는 물의 길이는 삼천리, 회오리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높이는 구만리, 그렇게 여섯달을 난 다음에 쉴 자리를 찾는다.
아른아른한 저 아지랑이나 먼지는 뭇 생명이 뿜어대는 숨이다. 그렇다면 하늘의 저 푸른 빛도 제 색깔일 것인가. 너무 멀어 끝간데 없기에 저리 보이는 것이 아닐까. 아득히 높이 떠 아래를 내려다 보는 그 새의 눈에도 세상은 그렇게 아른해 보이리라.
몇 만리를 날아가는 붕이라는 새는 독자의 시야를 우주의 스케일로 단박에 불러들인다. 땅에 고정되어 있던 우리의 시선을 비상시키는 힘이 있다. 장자는 이 이야기 바로 뒤에 붕을 비웃는 비둘기와 매미의 이야기를 배치함으로써 망원경 효과를 극대화한다. “우리는 힘써봐야 나무 오르는 게 고작인데, 저 놈은 뭐하러 구만리를 나나?”라고 비웃는 비둘기와 매미가 뼈아프게 우리와 동일시된다. 그러면서 붕의 시선이 높이로 자연스레 우리를 끌어들인다. 이러한 시선의 상승은 존재론적 변환과 함께 일어나게 되어 있다. 시선의 질적 전환을 표현하는 점에서 망원경은 적절하다. 줌인(zoom in)과 줌아웃(zoom out)이라는 표현은 많이 약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교 경험은 이 망원경 효과와 많이 관련이 된다. 세속의 삶을 뽀작뽀작 살아가는 우리가 어느 순간 자신이 우주 안에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이 종교 경험의 요체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돈 문제, 건강 문제, 가족 문제로 번민하던 사람이, 우연히 교회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를 사랑해주시는 예수님이 이미 자신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였다는 이야기를 가슴 깊이 받아들일 때 그의 삶은 변화한다. 세속의 문제를 번민하던 이가 길가다 도인을 만나 자신 주변의 변화들이 천지개벽의 우주적 드라마의 일환임을 알아차리게 될 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자신의 종교 경험을 돌이켜 보아도 또한 그러하다. 대학 입시 시절, 골방에 혼자 누워 호흡 수련을 하다가 경쟁 사회에서 죽어라 살아가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이 우주 중에서도 지구 안의 하나의 작은 먼지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다다랐을 때의 감동은 내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경험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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