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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발제

캡스의 종교학사, 서문

by 방가房家 2023. 5. 11.

월터 캡스의 종교학사 <<종교학: 학과의 형성Religious Studies: The Making of a Discipline>>은 다소 딱딱하지만 저자의 내공이 잔뜩 실린 육중한 책이다. 우리말 번역본은 <<현대 종교학 담론>>(까치, 1995)이다. 번역이 안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쉬운 점은 많다. 처음부터 눈에 들어오는 예를 하나 들면, 캡스는 종교학을 하나의 학문 분과로서 확립하고자 하는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책을 집필했는데, 번역본에서는 그 문제의식이 다소 뭉개진다. 저자의 의도는 책 제목에 “학과의 형성The Making of a Discipline”이라는 부제를 달아놓은 데서 잘 나타난다. 반면에 번역본 제목 <<현대 종교학 담론>>은 무슨 의도인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다.(번역자들은 ‘담론’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본문에서 담론discourse은 ‘담화’로 옮겨진다.) 첫 문단에 등장하는 핵심 어휘 ‘학문 분과intellectual discipline’(지적 분과라고 직역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는 ‘지성적 학문’이라고 다소 추상화되어 옮겨졌다. 처음에 이렇게 의역되는 바람에 이어지는 부분에서 번역의 일관성이 지켜지지 않았다. 때문에 저자의 분명한 문제의식을 번역본에서 읽는 것은 쉽지 않다. 다음은 주요 부분을 나름대로 옮긴 것.

이 책의 주목적은 한 학문 분과intellectual discipline의 틀을 제시하고 내용을 이루는 하나의 주제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에 어떠한 답변들이 제시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 주제는 종교를 말하는 것이고, 그 학문 분과는 흔히 종교학이라고 불린다.
……
학문 분과가 한 가지 주제에 대해 계속해서 제기되는 물음들에 의해 형성되고 구성된다는 엄연한 사실이 없었다면, 이 두 과제[기본적인 물음을 분별하는 일과 종교학에 속한 학문적 경로들을 재구성하는 일]는 별도의 작업이 되었을 것이다. 바로 학문 분과의 틀 안에서, 그리고 학과의 분석 능력과 해석 능력에 의해서 그 물음들은 다시 되물어져 왔던 것이다.(xiii)

종교학은 종교라는 주제에 관한 질문을 지도하고 이끌어내는 연습과 훈련을 제공한다. 종교학은 종교라는 주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질문 기술과 정해진 방식을 사용한다. 이것은 주제에 대한 이해 가능성을 발견하는 동시에 이끌어내는 이중적인 작업이다.(xiv)

자신의 학문적 과거를 이야기 형식으로 말할 수 없다면, 그 학문 분야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xvi)
캡스가 종교학사를 구성하는 중심축으로 삼은 것은 물음questions이다. 'question'을 질문이라 한들 물음이라 한들 아무런 의미의 차이가 없겠지만, 굳이 물음을 택한 것은 “종교학은 종교에 대한 학문적 물음”이라는 주제로 수십 년 동안 강의하시고 글을 써오신 정진홍 선생님이 떠올라서이다. 두 선생님의 문제의식은 상당히 일치한다. 그래서 정선생님이 수십 년간 다듬어온 물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 종교학이 일구어놓은 어휘를 계승하는 것이리라.
캡스는 종교학사를 구성하는 네 물음을 제시한다. 이것은 기존의 종교학사에서 합의된 것과 약간 겹치기도 한다. 종교학사의 흐름이 “기원에 대한 물음(진화론적 이론) -> 현상에 대한 탐구(종교현상학) -> 기능주의적 접근(종교사회학) -> 총체적 접근”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수업 시간에 배운 기억이 난다. 그런데 캡스의 첫 번째 물음, ‘종교는 무엇인가?’가 들어가 있는 것이 기존 논의와는 다르다고 생각된다. 물론 네 물음이 연대순으로 깔끔하게 배열되는 것은 아니겠으나, 첫 번째 물음으로부터 두 번째 물음으로의 전환이 존재했다는 지적은 내게 특히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것은 내가 요즘 분석하고 있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에 이르는 기간의 종교학 논의에서 일어나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관련 구절을 몇 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네 기본적인 물음들은 다음과 같다. (1)종교는 무엇인가? (2)종교는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3)종교를 어떻게 기술할 수 있나? (4)종교의 기능이나 목적은 무엇인가?……그런데 이 기본적인 물음들이 단순히 하나하나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쩔 때는 동시에 제기된다는 것이 종교학의 특징이기도 하다.(xvii)

첫 번째 모델에서 종교의 필수불가결한 것(sine qua non)을 가려내려는 시도였던 것이 두 번째 모델에서는 종교의 시초(primordium, 즉 최초의 사건이나 근원적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인간의 감성을 거슬러 탐구하려는 관심으로 변하게 되었다.(xix)

“이것 없이는 종교임을 말할 수 없는 이것.” 이것이 처음부터 던져졌던 물음이다. 그래서 이것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분야에 영향력을 끼치는 패러다임을 구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물음인 것이다.(xx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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