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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담의 <원시분류체계> 서문

by 방가房家 2023. 5. 11.

불현듯 생각나는 대목이 있어서 10년 전의 발제문을 찾아 싣는다. 이 글은 미국 인류학자 로드니 니담Rodney Needham이 뒤르케임과 모스의 1901년 논문을 1963년에 <<원시분류체계Primitive Classification>>라는 제목으로 영역할 때 붙였던 역자서문의 요약이다. 일반적인 역자서문과 달리 이 서문은 중요한 글로 취급된다. 이 글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두 가지, 원서의 문제점과 가치이다. 이 두 내용에 대해서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옛날에 이 글을 읽을 때는 왜 자기가 번역한 책에 대해서 악의에 찬 사람 마냥 수십쪽에 걸쳐 이런저런 비판을 하였는지 의아했다. 지나고 보니 그 비판이 텍스트에 대한 진정한 애정과, 그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글의 이론적 가치가 소멸하지 않은 것은 바로 니담같은 학자들의 철저한 비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관련된 언급으로는 조너선 스미스의 <<자리 잡기>> 88쪽을 참고할 것.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안다는 것은 사회를 탐구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이다. 인류학자들이 처음 미개 문화에 접했을 때 혼란스러웠던 것은 미개인들의 인식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음에서 기인한다. 뒤르케임과 모스는 <<원시 분류체계>>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열쇠가 되는 분류체계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들이 제안하는 분류체계는 도덕적, 종교적 본성을 지니는 상징적인 분류체계를 의미하며, 관습적인 구분의 틀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분류체계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대상, 즉 사회를 모델로 하여 생성된다. 사회적 종(class, 예를 들어 씨족)의 구분은 사물들의 구분을 가능케 해준다. 사회의 통일성은 지식의 통일성의 모델이 되며, 사회 계층은 논리의 계층적 구조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뒤르케임과 모스의 연구는 이론적 중요성에 비해 학문적인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왔다. 니담은 서문에서 이 저작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난 후에—부분적으로 이 점이 학문적 무관심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저작이 지니는 가치를 분석한다.
 
텍스트에 대한 비판
 
논리에 대한 비판
①논리적 비약 : 논리적 비약은 책의 첫 부분부터 나타난다. 변형(metamorphosis) 작용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뚜렷한 분류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고 한 추론(5)이 이러한 경우이다. 어떤 사람이 앵무새로 변했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앵무새나 사람의 개념이 결여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토템 동물과 자신의 동일시가 분류 개념 부족 때문이라는 주장(6)도 같은 경우에 속한다. 또 분류체계에 친족 용어가 동원된다고 해서 분류체계가 사회에 기원을 두고 있다(6)는 추론 역시 논리적 비약에 해당한다. 주니 족의 분석에 있어서도, 신과 부족 사이의 매개물로 (토템)동물이 등장하기 때문에 방위 분류보다 씨족 분류가 선행한다(52)는 논리적 비약이 나타난다.
②petitio principii : 뒤르케임과 모스의 작업에는 미증명의 전제에 기반한 추론도 여럿 나타난다. 오마하 족을 분석하면서(55-8), 그들은 일단 씨족 분류와 지역 분류를 구분한다. 그리고는 씨족 구분이 선행하고 이에 따라 지역 구분이 생성되는 것이라는 전제를 설정한다. 이는 자료에 의해서 증명된 내용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제를 바탕으로 해서, 오마하 족에는 지역의 체계가 형성 중이며, 따라서 씨족과 사물들은 아직 방향 지워지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들은 부족의 하위 구분의 형성이 부족→반족→씨족→하위씨족의 순서를 취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내용은 반족이 씨족에 선행한다는 주장인데(83), 이는 증명되지 않은 가설이다. 그럼에도 이 내용은 논거로 사용되었다. 또 그들은 분류체계에 있어서 사회 체계가 제일 먼저 생성되었고 나머지 체계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중요한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자료에 의해 증명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 미증명의 전제를 바탕으로 중앙 오스트레일리아 부족의 천문(天文) 신화론의 체계가 사회 체계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29).
 
방법론에 대한 비판
①뒤르케임과 모스가 제시한 여러 사례에 있어서, 사회의 형태와 분류체계의 형태 사이의 상응성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다. 예를 들어, 포트맥케이의 결혼 계급과 우주론적 관념 사이(12)가 그러하다. 
②뒤르케임과 모스는 분류체계가 사회 체계 중에서도 씨족에 의해서만 형성된다고 하였다. 반족과 같은 다른 구획에 의한 구분은 3차적인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반족이나 포족에 의해 분류체계가 형성된 사회가 있으며, 씨족에 의한 분류와 반족에 의한 분류가 공존하는 곳도 있다. 다양한 형태의 사회를 인정하지 않고 씨족에만 의지해서 분류체계를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니담은 지적한다. 
③뒤르케임과 모스는 주장을 확증하는 방법으로서, 같은 내용이 적용되는 다른 사례(concomitant variation)를 찾지 않았다. 즉 같은 사회 조직을 가지면서 다른 형태의 분류체계를 지닌 사회나, 다른 조직을 가지면서 같은 분류체계를 지닌 사회에 대한 분석이 없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뒤르케임의 약간 독선적인 자료 취급 방식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 뒤르케임은 자신의 주장에 부합하지 않는 자료에 대해 후대의 발전으로 취급하여 형태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았다.(ex. 아룬타(31)) 이 ‘후대의 발전’의 논리는 책의 여러 곳에서 남용된다. 
④뒤르케임과 모스는 한 사회는 한 번에 하나의 분류체계만을 갖는다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어 주니 족은 네 지역, 여섯 지역, 두 지역의 순으로 분류체계가 변화했다고 설명된다(48). 그러나 중국의 경우에서 암시(68, 73)되듯이, 여러 분류체계가 복합적으로 존재한다고 설명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설명으로 보인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뒤르케임과 모스가 자료를 다루는 태도에 대해서도 지적할 수 있다. 그들은 증거나 불충분하거나 주장에 반할 경우에는 증거를 불신하는 태도를 드러내었다. 증거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의 태도는 필요한 경우 증거의 삭제에까지 이를 우려가 있다. 
⑤뒤르케임과 모스는 곳곳에서 증거 없는 추론을 전개한다. 사회 조직의 형성에 있어 반족에서 씨족으로 발달했다는 주장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발달했을 것이라는 일반론에 기반한 가정일 뿐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 씨족에 의한 분류체계가 지역 혹은 방위에 의한 분류체계에 선행한다는 주장 역시, 증거보다는 확신이 우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중요한 주장 중에서 분류에 있어 지배적인 속성이 되는 것은 ‘감정적 가치’라는 내용이 있다. 이 역시 증거 없는 추론으로 지적된다. 이들의 연구에 있어 감정적 요인은 매우 중요하다. 상징론에 있어서도 특정한 사물의 어떤 개념의 표상이 되는 것은 감정적 친화력 때문이다. 분류체계에서 차이와 유사에 의해 무리짓는 것도 감정적 친화력에 기인한다. 이것은 사회가 집단적인 감정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담은 사회의 기원이 감정이라는 주장은 원인과 결과의 혼동이라고 비판한다. 그렇게 된다면 단일한 사회적 감정으로부터 다양한 분류체계가 생성되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또한 다른 구조의 사회들이 동일한 분류체계를 지니는 경우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없다.
 
결정적인 비판
니담은 이 저작의 근본적인 전제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하여 두 가지 비판을 가하고 있다. 하나는 사회와 상징체계 사이의 인과적 관계에 대한 의심으로, 이에 대해서는 방법론적 가치 부분에서 후술(後述)하기로 한다. 다른 하나는 집단 표상과 개인의 인식 능력의 관계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니담은 집단 표상과 개인의 인식 능력이 구분되지 않고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었다고 지적한다. 즉 사회에서 제공된 범주가 인식 내용 자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니담의 반론은 개인의 인식 능력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오히려 범주 없이는 사회가 형성될 수 없다고 반론(反論)을 편다. 사회 형성 이전에 범주를 형성할 수 있는 개인의 인식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 제기는 사회가 먼저냐 개인이 먼저냐 하는, 통속적이고도 순환론적인 물음의 미궁(迷宮)으로 논의를 빠트릴 여지가 있다. 뒤르케임은 분명히 범주의 형성이 선험적(a priori)이라는 칸트의 이론에 대한 해결로서 사회라는 실체를 제기하였었다. 니담이 주장하는 개인의 인식 능력이 어디서 기인한 것이냐고 질문을 던져볼 때, 그것은 선험적인 것이라는 말 이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니담의 문제 제기는 칸트의 입장으로 후퇴한 것에 다름 아니게 된다. 결국 그의 주장은 별다른 대안 없이 뒤르케임의 이론을 끌어내리려는 태도일 수밖에 없다.
 
 
텍스트의 가치에 대하여
 
학사적(學史的) 가치
<<원시 분류체계>>(1903)는 후에 뒤르케임의 <<종교 생활의 기본 형태들>>(1912)에서 나타나는 생각들의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원시 분류체계>>에서 제시된 내용들은 이후의 작업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채로 요약적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텍스트를 통해 뒤르케임의 생각의 변화 과정을 엿보기보다는, <<기본 형태들>>의 논의의 기반이 되는 분석과 경험적 자료들을 <<원시 분류체계>>를 통해 제공받을 수 있다. 
이 저작이 이후 다른 학자들의 연구에 끼친 영향은 광범위하지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은 사회 구조와 범주 사이의 관계에 관한 연구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왼쪽과 오른쪽의 방향적 범주에 드러난 지적, 도덕적 표상에 관한 연구가 그러하다. Hertz를 비롯한 연구가들은 왼손과 오른손의 의미를 밝히는 과정에서 <<원시 분류체계>>에서 나타난 이원적 상징분류체계에 주목하였으며 왼손과 오른손의 사용에 사회 사고의 구조가 반영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이 저작은 네덜란드 사회인류학 전통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 저작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연구 중에는 마르셀 모스, 레비스트로스, 조셉 니담 등의 저서들 눈에 띈다.
 
방법론적 가치
①이 저작은 인간의 행위를 인과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분석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보여준다. 이는 20세기 초의 지적 정황(政況)의 반영이다. 니담은 뒤르케임의 작업 목표가 하나의 사실을 다른 사실과 연관시켜 그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물에 대하 이해가 가능해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 저작과 <<기본 형태들>>는 그러한 뒤르케임의 노력의 부산물로 볼 수 있다. 니담은 사회를 등장시켜 그 인과관계를 설명하려는 뒤르케임의 기획은 실패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반(反)환원주의적 입장에서, 어떠한 영역도 다른 영역의 원인이나 모델로 작용될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담이 이 점을 방법론적 가치로 꼽은 것은 당대(當代)의 지적 성향에 대한 파악과 더불어, 학자는 그 지적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교훈(?)을 얻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②이 저작은 ‘사실이 정확한 의미와 관습의 맥락에서 탐구될 수 있는 제한되고 명확하게 규정된 사회’를 연구 대상으로 한다. 이러한 원칙은 <<기본 형태들>>의 서론에서도 뚜렷하게 제시된 바 있다. 이는 프레이저 류(類)의 널널한 비교 방법에 대비되는 방법론으로서, 프랑스 사회학 전통에 있어서 연구의 출발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③이 저작은 전체성 속에서 사실의 영역을 조망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따로 이해한다면 오해될 수 있는 부분들을 전체 체계 속에서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태도이다. 이 원칙은 이후 프랑스 사회학 전통의 특징이 되기도 한다. 이는 당연한 일반론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미덕을 지닌 연구는 드물며 이에 대한 모범으로 이 저작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이론적 가치
①이 저작은 제기한 분류체계에 대한 관심은, 인간 사고와 사회 활동을 이해하는데 있어 근본적인 물음이다. 예를 들어 가계 제도는 범주와 분류의 원칙을 통해서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인도 연구(뒤메질)에서도 사회와 종교적 분류체계의 일반적 관계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졌다. 
②이 저작에서는 상징과 사회구조의 관계성에 주목하였다. 예를 들어 가계 제도와 상징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닌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단순한 단선적 가계 제도하에서는 상징과 사회 사이의 상응성이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복잡하게 규정된 가계 체제하에서는 상징과 사회 질서가 상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뒤르케임과 모스는 규정된 인척 관계 하에서만 이러한 상응성이 발생함을 이 저작에서 이미 지적하였다. 
③신화에는 반전의 주제(the theme of reversal)가 흔히 나타난다. 현재에는 금기(禁忌)가 되는 행위가 신화 속에서는 행해지는 경우가 많으며, 예를 들어 기원 신화가 근친상간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신화적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범주의 형성 시기와 그 이전의 혼돈(混沌)의 시기를 상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화에는 범주 형성 이전에 대한 기억이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즉, 카오스의 상태에 코스모스를 부여함으로서 세계가 형성되었다고 이해하는 관점이 요구된다. 뒤르케임과 모스의 작업은 분류체계를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지 않았고, 문화의 한 측면으로 분리해 내었다. 사회인류학의 초점은 질서를 설명하는데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무질서를 상정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분류체계에 대한 연구는 역으로 무질서에 대한 관점까지도 열어 준 것이다. 
④이 저작의 궁극적인 성취는 사회학 연구에서 ‘분류체계’라는 분석 개념(analytical notion)을 인식시켰다는데 있다. 학문의 근본적인 발전은 경험적 일반화를 거쳐서 생성된 개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회학은 구조, 연대, 교환, 양극성 등의 개념들을 통해서 자신의 학문적 사고를 정교화시켜왔다. 분류체계 역시 학문을 발달시킨 이론적 밑천(theoretical capital)으로 꼽힌다. 하나의 개념을 제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저작의 가치는 충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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