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개종이라기보다는 대화Conversion and Conversation
개인의 극적인 회심이라는 바울 모델의 개종 개념은 근대 서구 학문에서도 깊이 뿌리박혀 있다. 영적 개인주의라는 부르주아 이상까지 흡수한 이 개념은, 사회 과학 영역에서는 특히 베버 전통의 학자들에 의해서 분석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학자들은 제3세계 기독교 확장을, ‘토착’ 종교들에 비해 더 이성화된 신앙이 요구되었던 필요에 의해 설명한다. 개종은 지적이고 경험적 위기에 대한 개인적인 반응인 것이다. 다음과 같은 호튼(Robin Horton)의 테제가 대표적인 논의이다: “아프리카인의 개종은 근대화에 직면하여 의미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전통적’ 우주론이 지역의 ‘소우주’ 바깥의 존재를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적 정체성의 변환이 일어났다.”1)
저자들은 기존의 개종 모델이 설명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던진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사회 정체성, 문화 양식, 의례 실천 등이 복음전도와의 만남에 의해 변화된 다양하고 점진적이고 암시적이고 ‘혼합적인’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가? 남부 츠와나 사람들에서 나타난, 침입과 되받아치기, 도전과 응전의 복합적인 변증법을 포착할 수 있는가? 이 지역 교회에서 ‘타락’과 관련해서 잦은 출교가 있었다는 사실은, 개종의 머릿수가 선교사들이 의도한 영적 봉헌의 양을 가리키는 믿을만한 지표가 아님을 말해준다. 중요한 것은 츠와나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교회의 실천들을 선택적으로 차용하였는가이다. 그들은 일종의 조직신학이나 보편적 진리, 그리고 한 종교에 속하는 것이 다른 모든 것들에의 참여를 배제한다는 개인적 신앙 고백의 의미에 속박되지 않았다. 다른 지역의 성스러움의 기술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물질적 영역 뿐 아니라 영적인 영역의 브리콜뢰르(손재주꾼)였다.
개종에 대한 저자들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선교사들은 츠와나 문명화의 역사를 개종의 획득이나 상실(won or lost)의 연대기로 서술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왜 그들의 시각으로는 문화 변동이나 영적 브리콜라주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설명할 수 없는지는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가 왜 ‘개종’을 자체로 중요한 분석 범주로 삼기를 주저하는지도 분명하다. … 종교적 정체성의 변화는 메시지 못지않게 새로운 매체의 문제이며, 내용 못지않게 문화적 형태의 문제이다.” 그래서 개종(conversion)보다는 대화 과정(conversation)에, 수동적 변화보다는 주고받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개종 개념의 일반적 문제점에 대해서 두 가지를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개종 개념은 개인의 영적 정체성의 변화를 문화적 변화와 뒤섞어서, 주체적 경험과 집합적 존재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흐리게 한다. 둘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연결의 성격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둘째, 명사로서의 ‘개종’은 종교적 ‘믿음’을 물상화하고 상징과 의미의 질서를 추상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추상화는 영적인 봉헌을 경쟁하는 신앙들 사이에서의 선택의 문제로, ‘믿음의 체계’를 문화적 각인들이 제거된 교리로 환원시켜버린다. 근대 개신교 개종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가 배어있는 구성물이다. 그 개념은 물질적인 시장 경제를 영적인 영역에서 되울림하는 것으로, 개인의 신념을 자원 분배의 유형으로 표현하는 도덕 경제에 대한 환유(換喩)이다.2)
1. 긴 대화: 식민 담론의 확립 과정
①자리잡기 다툼
선교 초기에는 선교 부지를 어느 곳에 잡을 것이냐가 큰 쟁점이 된다. 처음에 런던 선교회를 불러들인 츠와나 족장 모티비는 전통적인 공간 구성을 흩뜨리지 않으면서 선교 부지를 그의 영역 가장자리에 두고 싶어 했고, 반면에 선교사들은 선교 부지를 영감을 주는 모범으로서, 신의 나라의 중심으로서 가시화시키고 싶어 했다. 그 결과 건물은 수도 영역 안에 자리잡게 된다. 불안한 정치적 상황에 때문에 선교사의 발언권이 강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남쪽 줄루족 소요 이후, 선교사의 권유로 족장이 방어에 용이한 강변으로 거처를 옮기는가 하면, 더 안전한 새로운 정착지를 모색하기도 한다. 선교사들은 치수 공사 등을 통해 전통적 공간을 그들의 유럽 문명화의 이성적인 계획 내에 편입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츠와나 사람들은 공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들 우주의 상징적인 중심인 마을(모체motse)의 형태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였다.
감리교 선교회의 정착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마을 중심에서 “떨어져 있지만 접근 가능한” 곳에 터를 잡았다. 그들의 주거는 말끔하게 담장이 둘러쳐진 건물로, 츠와나 인들의 거주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다른 세계를 이루었다.3)
②물 다툼
선교사들은 관개 시설의 건설을 통하여 “버려진 포도원에 기독교인 농부들”을 키우고자 했다. 그러나 수로와 우물을 파는 그들의 공사는 지역의 가치관과 이익에 상충되는 것으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 해밀턴 목사가 샘에서부터 집 정원까지 수로를 낼 때, 수로가 족장 부인의 통과하자 땅주인은 공사를 거부했다. 족장에게 항의를 했지만, 족장은 모계 쪽에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고 발뺌하였고 선교사들은 물을 길으러 멀리 돌아가야 했다.
물을 지배하는 것은 츠와나의 권력구조와 상징체계에 핵심적인 것이기 때문에, 물을 놓고 벌어지는 다툼은 물질적인 것 이상의 심각한 성격을 갖는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츠와나 기우사(祈雨師, rainmaker)와 선교사들 간의 대립이다. 전통적으로 츠와나 족장은 그의 의례적 영험함의 본질을 조상의 빗물단지(rainpot)에 모아두고, 기우사는 구름을 불러들여 그 본질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다. 그 힘은 오직 공동체가 도덕적으로 올바른 상태, ‘청렴한’(tsididi) 상태에 있어야지만 행사될 수 있다. 기우사는 조상의 힘을 산 자들과 매개하는 자리에 있었으며, 조상의 음덕이 미치기 위해서는 사회적 조화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기우사는 선교사들의 숙적이었다. 선교사 눈에는 미신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들이었지만, 사회적 힘은 위력적이었다. 선교사들은 기우제에 참가하기를 거부했는데, 그 때문에 가뭄이 생겼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4) 게다가 선교사의 존재는 때문에 부정이 타서 기우제가 제대로 치러지지 않는다는 공격도 받아야 했다. 선교사인 의사(medical doctor)와 기우의(祈雨醫, rain doctor) 사이에서 벌어진 다음 논쟁은 두 세계관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의사: 당신은 당신이 정말로 구름에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것은 하느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우의: 우리는 같은 것을 믿고 있어요. 비를 만든 것은 하느님이지만, 나는 이 무구(巫具, medicines)들을 이용해 그 분께 기도를 드려 비를 불러온 것이고, 그렇게 온 비는 물론 내 것이지요.
……
의사: 하지만 우리 구세주의 작별 말씀에서 우리가 분명히 들은 것은, 오직 하느님의 이름으로만 기도할 수 있지, 무구를 통해서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우의: 옳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는 달리 말씀하셨죠. ……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작은 물건을 하나 주셨는데, 당신들은 그것에 대해 모릅니다. 그 분은 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무구들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죠. 우리는 당신이 소유한 물건들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무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책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무시하지 않습니다. 당신들도 우리의 작은 지식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
의사: 나는 비의 가치에 대해서는 당신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주물로 구름에 마법을 걸 수 없어요. 당신은 구름이 보일 때까지 기다리고, 그러고 나서 주물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만 속한 영예를 차지하죠.
기우의: 나는 나의 주물/약품을 사용하고 당신은 당신의 것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둘 다 의사이지 사기꾼이 아닙니다. 당신은 환자에게 약품을 주죠. 때로는 하느님이 기꺼이 당신의 약품을 통해 환자를 낫게 하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아서 환자가 죽기도 합니다. 환자가 치료될 때, 당신은 하느님이 한 것의 영예를 차지하죠. 나 또한 그렇습니다. 때로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비를 주고, 때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를 줄 때 우리는 마법의 영예를 차지합니다. 환자가 죽을 때, 당신은 당신 약품에 대한 신뢰를 접지는 않습니다. 나 또한 비가 오지 않을 때 마찬가지입니다. 내 주물/약품은 치워버리기를 원하면서, 왜 당신의 것은 계속 쓰려고 하는 거지요?
비의 문제에 있어서 선교사들은 역설적인 정황에 놓여 있었다. 한편으로 그들은 물에 대한 주술을 비신화화하는 기술 혁신과 기상학적인 과학적 설명을 소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물질에 대한 궁극적 권위를 하느님에게로만 되돌려 놓으려 했다. 즉, 하느님만 비를 줄 수 있으며, 그 분을 향한 기도를 통해서만 비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이다. 결국 선교사들은 기우사들과 주술 영역에서의 대결을 펼치게 된다. 그들은 기우 예배를 드려 사탄의 활동을 막는 역사하심을 보이고자 했다. 감리교 선교회의 다음 기록이 인상적이다.
설교자는 사람들에게 기우사의 능력을 믿지 말라고 권면하였고, 하느님께 기도드려서 그 분이 우리 땅을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천국의 감로(甘露)를 보내주시게 하자고 하였다. 사람들은 하느님께 기도드렸다. … 잠시 후 하늘에 먹구름이 모여들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밤까지 계속 내렸다. 사람들은 합당한 내리심에 크게 기뻐하였고, 기우사들은 부끄러워 낙담하였다.
③말 다툼
선교사들이 가장 주력한 것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그들은 츠와나 언어를 익혀 번역하는 일에 매달렸다. 언어 학습은 언어의 식민화 과정이기도 했다. 츠와나 사람들의 말, 세츠와나는 표준적인 유럽언어의 문법에 맞추어 정리되었으며, ‘원주민 방언’이 되었다. 또한 19세기 선교지에서 이루어진 반투 언어 연구, 언어들의 분류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가상적인 인종 집단으로 나누는 것을 정당화해주었다.5)
츠와나의 말 세츠와나는 단순히 말이 아니라 츠와나 문화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어에 관련된 작업은 두 세계관, 세츠와나setswana(츠와나사람曰)와 세크고아sekgoa(백인曰) 간의 상징 투쟁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선교사 모팻은 복음서에 나오는 ‘귀신’에 대한 번역어로 바디모badimo를 사용하였다. 바디모는 츠와나 사회를 지탱하는 조상들의 혼령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바디모에 대한 세츠와나와 세크고아의 차이는 심대했다.6)
츠와나 사람들에게 말씀(마호코mahoko)은 신성한 힘을 지닌 것이었다. 언어에 깃든 ‘주술적 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이름이 단지 중립적인 기호가 아니라 그 ‘주인’의 본질적 부분을 이루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모든 용어들은 지시하는 대상에 참여한다. 언어의 힘은, 알맞은 조건에서 발화되기만 한다면, 그것이 표상하는 사건이나 상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츠와나 사람들이 기독교의 기도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당연한 일이며, 하느님으로 번역된 모디모modimo는 대단한 금기여서, 단지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생각되었다.
물론 선교사들도 말씀의 잠재력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긴 하다.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기 시작할 때, 그들의 눈물이 몸에 있는 붉은 칠을 씻어내버릴 것이다.
그러나 츠와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언어의 능력은 서구인들의 생각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들은 복음으로써의 말씀에 대해서도 힘이 있고 물질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인식했다. 더 나아가 성경은 백인들의 힘이 담긴 언어의 저장소로서 인식되기도 했다. 성경에 대한 물질적 인식은 그것이 의례적 효험을 지닌 점복의 도구로 사용된 것에서도 엿보인다.
2. 개종 다툼
①선교사들의 가르침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한 맥락은 교육이었다. 학교 교육은 개종의 모델을 제공해주었고, 또 개종은 학교 교육의 모델을 제공해주었다. 이것은 츠와나 용어로 선교사를 모루티moruti(선생님), 예비 교인을 바루튀barutwi(학생)이라고 부른 데서 잘 나타난다. 문자 교육은 교리문답 과정에서 함께 이루어졌다.
교육은 기독교인이라는 새로운 주체 형성을 위한 것인데, 그 결과는 생활 영역의 변화에 미치게 된다. 한 예가 되는 것이 교회력이 적용되면서 기독교의 도덕적 질서가 일상 생활에 파고드는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을 중요한 활동으로 생각하였다.7)
②츠와나 신자들
기독교 말씀에 대한 츠와나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들은 선교에서 들은 이야기를 매우 문자적이고 직접적인 용어로 이해하였다. 선교사들이 묘사한 죄의 대가와 회개의 열매는 생생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개신교의 신을 전통의 한가한 신격 모디모modimo와는 다른 실질적인 존재로 인식하였다.
“하느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 분은 머리카락이 있습니까?”“하늘나라에서 우리는 무슨 음식을 먹게 되나요?”
그들은 기독교 신이 당면한 위험에서 구해주는 존재라고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임종 시의 개종이 많이 있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츠와나 사람들, 특히 사회적 유력자들은 기독교의 교리를 관습 체계에 대한 전명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복음의 빛이 미치는 곳에서는, 야만의 순수성은 원죄가 되어 사망과 정죄에 이르는 길이 되었다. 기우제, 성인식, 일부다체제 등에 대한 정죄는 그들 권력에 대한 위협이었다.
반면에 선교사 거주지에 의해 형성되는 물질적인 안정성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특히 난세에 사회적으로 주변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안정을 제공해줄 수 있는 의지처가 되었다.8)
겁에 질려서 산에 살던 원주민들은 우리가 조용히 정착하여 평화롭게 사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 그들은 내려와서 선교지 근처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③차이의 인식
긴 대화 과정에서 분명하게 인식되었던 것은 세츠와나와 세크고아, 츠와나적 가치와 유럽적 가치 간의 차이였다. 전도자들은 비유럽인들과의 대조를 통해 유럽인들의 자기정체성을 확립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문명과 야만이 만나는 변경지대에서 계속적으로 그러한 인식 과정을 유지하였다. 반면에 츠와나 사람들에게 선교는 자신들의 관습과 믿음 체계에 반대하는 백인들과의 만남이었다. 백인은 새로운 타자였다. 이전의 토템 연합체 내부에서의 타인과의 만남이나 다양한 경로를 통한 다른 부족 사람들과의 만남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새로운 보편주의와 지구적 헤게모니를 요청하는 만남이었다.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개종이란 차이의 제거 과정, 즉 츠와나 인이 문명화된 인간으로서 편입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츠와나 사람들에게 그러한 개종 개념은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문화 상대주의적 태도로 세츠와나와 세크고아를 서로 다른 앎과 존재의 방식으로 보았다.
백인들의 하느님은 남쪽에 살고, 우리들의 하느님은 북쪽에 산다.“당신들은 우리의 관습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니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백성들을 위해 관습을 행하라고 하더라.”
츠와나 사람들은 신부대(新婦代), 일부다처제, 통과 의례 등의 관습들이 어떤 독특한 의미가 있는지를 선교사들에게 설명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그런 그들에게 이교와 기독교간에 양자택일을 하라는 사고방식은 전적으로 괴팍하게 보일 따름이었다.
츠와나 언어로 개종자에 해당하는 말은 “동의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 모두메디modumedi이다. 믿음(투멜로tumelo)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개념이며, 원래 사회 공동체의 범위를 규정하는 개념은 금기의 집합을 뜻하는 멜리아melia이다. 이 점에서 츠와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율법(law)에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현재까지 츠와나 기독교의 많은 형태들에서 엄격한 율법주의가 나타난다는 사실은, ‘개종’이 언제나 세츠와나의 형태에 의해 매개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1) Robin Horton, "African Conversion," Africa 41 (1971): 85-108. 개종에 대한 최근의 논의에서도 호튼의 논의가 이론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짐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 글에서는 전통 종교/보편종교, 거시우주/미시우주, 합리화 등의 개념들이 논의의 틀을 이루고 있다. Robert W. Hefner, "World Building and the Rationality of Conversion," in Robert W. Hefner (ed.), Conversion to Christianity: Historical and Anthropological Perspectives on a Great Transformation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2)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나는 피터 버거의 <<Sacred Canopy>>를 읽을 때 자본주의 시장 모델이 이론적 논의에 배여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그가 종교 다원주의를 말할 때,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종교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대목에서는, 종교를 마치 자본주의 시장에서 상품 구매를 하는 것처럼 선택 가능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시장 논리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종교에 대한 서술에 녹아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3) 한국 기독교사에서 선교 부지 선정은 공간 상징과 정치적 상황에 관련되어 논쟁의 대상이 된 경우가 많다. 1)명동성당은 가톨릭 교회의 위엄을 표상하는 건축이었지만, 조선 궁궐을 굽어다보는 언덕 위에 건축되어 많은 반대와 반발심을 불러일으켰다. 2)초기 개신교 선교 사업은 대사관과 외국인 주택이 있는 정동의 컴플렉스(complex)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은 서울 안이지만 외국의 권력에 의해 지배되는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나중에 상동교회는 남대문 근처에 터를 잡으면서 ‘민중 속으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게 된다. 3)한편 선교사 거주지들이 담장으로 말끔하게 구획된, “사막의 오아시스”를 이루고 살았던 것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것. 류대영, <<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48-64.
4) 한국 개신교 선교 초기에, 개신교인들은 미신이라는 이유로 마을에서 행해지는 동제(洞祭)나 우물제에 참가하기를 거부한다. 이에 화가 난 마을 사람들이 개신교인들에게 우물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서 분쟁이 일어난 사례들이 있다.
5) 메소아메리카에 알파벳의 도입을 통해 해당 문화권의 기호 체계를 파괴하고 식민화한 사례 연구로는 다음을 참고할 것. Walter D. Mignolo, The Darker Side of the Renaissance: Literacy, Territoryality, and Colonization (Ann Arbor: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95), ch.2.
6) 번역과정에서 전통 문화를 악마화시키는 일은 다른 지역에서도 빈번했다. 다음은 아프리카 에웨 족 선교 과정에서 전통의 신격들이 악마화되어 버린 사례에 대한 연구이다. Birgit Meyer, "Beyond syncretism: Translation and Diabolization in the Appropriation of Protestantism in Africa", in Stewart, Charles & Shaw, Rosalind (ed.), Syncretism/Anti-Syncretism (New York: Routledege, 1994).
7) 한국 개신교 초기에도 엄격한 주일성수가 강요되었다. 이것은 농촌에서 문제가 되었는데, 품앗이와 같은 공동 노동에 기반한 농촌 사회에서 일요일은 일을 하지 않는 개신교 신자는 따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8) 한국 개신교사에서 신자가 급증한 첫 계기는, 청일전쟁 때 피난하던 민중들이 선교사가 기독교 깃발을 내건 교회 안으로 들어가 (양국 군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으므로) 보호받게 된 사건이었다. 그것은 민중들이 기독교를 “힘의 실체”로 뚜렷이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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