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에 코마로프 부부의 <<Of Revelation and Revolution>> 두 권을 읽었다. 많은 양이었다. 페이지 수도 적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소화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이제 어마어마한 책에 대한 어마어마한 양의 발제문을 올려놓으려 한다.
이 책 처음에 등장하는 노래 한 곡을 소개한다. 지금의 남아프리카공화국 국가인 "God Bless Africa"(Nkosi Sikelel' iAfrika)이다. 이 노래는 1897년 요하네스버그에서 감리교 선교사에 의해 작곡된, 전형적인 찬송가풍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맞서 싸우는 민중들의 저항가로 사랑받았다. 저자들은 백인이라는 외세와 싸우는 과정에서 기독교 상징체계를 사용하는 이 장면을 소개함으로써 책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암시한다. 기독교 선교(revelation)가 아프리카인들의 투쟁(revolution)과 어떠한 관련을 갖는가, 책 제목의 영어 단어 장난이 품고 있는 이러한 문제의식은 책 전체를 걸쳐서 다양한 지점에서 탐구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NBKjWRjwMkY&t=16s
1. Introduction
백인들의 앞잡이인 화란 개혁교회가 마페킹에 들어설 수 없다고 취디 사람들이 항의하는 모습. 그리고 투투 주교가 인종분리정책에 대항해 행진할 때 군중들이 찬송가 풍의, 지금은 국가가 된 "God Bless Africa"(Nkosi Sikelel' iAfrika)를 부르는 모습. 저자들은 이 두 장면을 오버랩 시키면서 책을 연다. 그것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기독교의 위치가 백인 지배의 수단이나 아프리카 해방을 위한 수단, 어느 편의 입장에서도 일면적으로 서술될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 기독교 상징이 전유되고 사용되어온 기나긴 상징 투쟁의 복합적인 과정이 이 책의 주제가 된다.
선교 인류학의 기존 연구에서 선교사는 행위 주체(agent)로서 제대로 고찰되지 않았다. 선교사들의 행위 동기와 연관된 사회적 배경에 대한 면밀한 고찰이 뒷받침될 필요가 있다. 또한 선교 결과에 대한 연구가 정치 경제적 관점에서만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권력이 실제로 행사된 의미체계의 영역을 놓치게 된다. 문화 선교는 상징적인 동시에 실천적인 운동이었는데, 이 영향이 의미와 물질의 차원에서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설명하는 일이 요구된다. 여기서의 이론적인 쟁점은 “구조와 행위주체”의 관계이다. 선교사와 아프리카 인은 모두 역사적 환경에 수동적으로 반응한 것이 아니라 인간 행위자로서 주체성과 의미를 갖고 실천하였으며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 책은 단순한 종교 변동 연구를 넘어서서, “식민주의와 의식, 문화와 권력을 다루는 역사인류학이며, 식민주체와 객체를 동시에, 그리고 구조와 행위주체에 관심을 갖는 인류학 연구”가 될 것이다.
역사인류학에 있어서 포스트모던 비평은 다음과 같은 주의할 점들을 제기한다. ①역사 내에서 의미와 행위, 사건과 과정들을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 ②문화는 과잉결정을 하는 폐쇄적인 기호 체계가 아니라 경쟁하는 다양한 가치들의 집합이라는 것. ③권력은 항상 문화, 의식, 표상에 함축되어 있는 다면적인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 ④역사 서술은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만들어가는 작업이라는 것. 그러나 저자들은 그 문제들을 수용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모든 의미가 의문의 대상이고 모든 권력이 고정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역사는 오랫동안 세계에 질서와 안정성을 부여하는 헤게모니를 생산해올 수 있었던가?” 사람들은 어쨌거나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영원히 안정되어 있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법인데, 그러한 인식이 생성된 바탕을 물을 필요가 있다는 것.
이를 위해 저자들이 주목하는 것이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설명이다. 사회의 지배적인 개념은 지배의 내용을 직접 진술한다기보다는, 인식의 지도를 작성하거나 세계를 분류하는 상징적 힘을 축적하게 한다. 지배적 사유는 옳다고, 합당하다고, 믿을만하다고, 정말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의 범위를 규정한다. 가능한 동기와 행위의 범위 안에 사회 세계가 형성되도록 한다. 이것이 저자들이 생각하는 헤게모니이다. 헤게모니는 “경험된 실재를 형성하는, 삶의 의미와 가치, 관계와 실천들로 이루어진 지배 체계”이다. 헤게모니는 사회 성원들에 의하여 당연한 것으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강제된다는 인식 자체가 없기 때문에 의문이 제기되지 않는다. 그것은 구속으로, 관습으로, 가치로 내면화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참되고’ ‘보편적인’ 것으로 설정된 정통이다.
그러나 헤게모니에서 그러한 자연스러움이 탈각될 때, 그것은 이데올로기로 전락한다. 그것이 더 이상 보편적인 질서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것이 무언가를 강제하고 있음이 보이기 시작할 때, 그것은 의문의 대상, 언급의 대상, 논란의 대상이 된다. 헤게모니가 이데올로기‘들’ 중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정통과 이단의 논쟁 와중으로 들어간다.
지배자의 논리가 피지배자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저항이 생겨난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헤게모니적으로 구성된 세계’와 ‘피지배자에 의해 실천적으로 이해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표상된 세계’ 간의 불연속성, 맑스와 엥겔스가 말한 ‘모순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질 때 저항, 이데올로기 투쟁이 일어난다.
저항의 문제에서 더 정교화되어 논의되어야 할 문제가 인간의 의식과 의식을 담고 있는 표상 양식이라는 부분이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는 식민주의와 저항 분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 자리한다. 그것은 부분적인 인식, 미완성의 각성, 모호한 지각, 그리고 때로는 창조적 긴장의 영역이다. 이 인간 경험의 리미널한 영역에서 사람들은 일어난 일들을 경험하고 알게 되지만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를 집어 말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문화에서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 사이에 위치하는 영역으로, 창조가 일어나는 지점이다. 이 영역을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역사 인류학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방법론이라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행위 주체(agent)와 의식(consciousness)의 관계의 문제가 날카롭게 제기되고 있다. 다른 말로 의식적인 행위 주체만인 의미가 있다는 엘리트주의적 반론에 대해서 대중 전통의 창조성을 논의할 때 중요한 이론적 답변이 이 부분에서 제시되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이야기된 영역이 어떤 식으로 창조성과 연관되는지에 대해서는 2권을 통해서 더 살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저항으로서의 상징 투쟁의 속성에 대해서 간단히 첨언. 지배의 방법이 외적인 강제로부터 암시적인 설득까지 범위가 있는 것처럼, 저항에 있어서도 직접적인 반대 운동도 있는 반면 무언의 반항이나 몸짓과 도상을 통한 저항이 존재한다. 간접적이고 암시적인 방식은 역사적 인식의 반성적 사고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산하는 수단이다.
츠와나 사람들과 선교사들의 만남에 대해서, 적지 않은 이야기 역사들이 있지만, 이들은 직선적인 영웅담으로 구성된, 전기로서의 근대 역사에 입각한 기록들이다. 저자들은 이 자료에 대한 독해를 강조한다. 이야기 내용보다는 ‘이야기하기’에 주목할 수 있다. 이야기하기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기호의 작용, 구조와 침묵, 숨겨진 참조 등이 작용하여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선교사의 글에는 아프리카 보고서의 관례가 나타난다. 문명화 진행 과정이라는 내러티브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의도치 않은 것들도 실리기 마련이다. 이성화된 텍스트 아래에는, ‘비이성적인’ 행위에 대한 당황스러운 묘사, 조롱, 저항 등에서 타자에 대한 관찰이 간직되어 있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 ①남부 츠와나 사람들: 츠와나는 토착의 중요성을 지닌 이름은 아니라. 발 강과 몰로포 강 상이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붙여진, 식민화에 의해 형성된 실재이다. 이들은 16세기 경에 이 지역에 들어온 것으로 생각되며 19세기에 영국 선교사들과 첫 만남을 갖는다. ②케이프 식민지 사람들: 이 지역에는 정치적 이해 관계가 대립되어 얽혀 있는 유럽 주민들이 거주한다. 영국 관료들, 영국 정착인들, 그리고 보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출신의 사람들. 영국계 사람들은 이들을 무식한 사람들로 취급하였다. ③런던 선교회(LMS): 이 모임은 1795년 만들어져 1812년부터 남아프리카 지역에 선교를 하였다. 대다수가 회중교회 사람들인 비국교회 단체로, 웨슬리의 부흥운동 정신에 영향 받은 바 있다. 보어인들은 이들의 활동에 반감을 가졌다. ④감리교도: 웨슬리 감리교 선교회(WMMS)에서 파견된 사람들로, 식민지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로이 활동한 이들은 영국 식민 사회에서 하나의 비정상으로 취급받았다.
2. British Beginnings
19세기 영국 사회에서 해외 선교에 대해 갖는 이미지는 다양하였다. 선교사들은 디포우의 <로빈슨 크로우소우>에서 다소 냉소적으로 그려졌고,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서는 냉혹한 남성인 동시에 나름대로의 당위성을 지닌 인물로 그려졌으며, 디킨스에게는 풍자의 대상이 되었으며, 시드니 스미스라는 언론인에게는 영국의 해외 정책을 방해하는 쓸모없는 사람들이라는 혹평의 대상이 되었다. 반면에 빅토리아시기에 유행한 출판물의 영웅담에서 선교사들, 특히 리빙스턴과 같은 이들은 주인공으로서 흠모의 대상이 된다. 워즈워스의 소네트에는 선교사에 대한 은유들이 모여져 있다. 황무지에 씨뿌리는 정원사, 상인, 기사 등의 그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들에서 선교사들은 식민지배의 익명적 대행자로 그려지기 일쑤였다. 개인으로서, 영국 사회의 성원으로서의 그들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 저자들은 1810-1850년에 영국 선교사들이 성장하고 활동한 영국 사회의 맥락을 조명한다. 그럼으로써 유럽과 아프리카의 만남에서 “누가 누구를 만났는지”를 양방향에서의 역사적 과정을 추적하며 정교하게 그리고자 한다.
일단 이 시기는 산업화에 의해 사회 계층이 급변하여 해체 재구성되는 시기이다. 사회 계층의 양극화가 나타난다. 윌리엄 도드라는 인물은 당시 글에서 사회 계층을 8개로 나누었고, 처음 4개를 지배 계층, 뒤의 4개를 피지배 계층으로 보았다. 선교사가 포함된 교회 사람들은 흥미롭게도 지배 계층의 말단인 4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이들은 두 계층 사이의 중간적 성격을 갖는, ‘지배 계층 중에서 지배받는 분파’의 위치이다. 이들은 사회 변화의 와중에 자기 계발을 통해서 하위에서부터 지금의 위치로 올라온, ‘상승 운동의 에토스’를 갖고 있는데, 이 태도는 타자를 대할 때도 영향을 주게 된다. 이들이 꿈꾸었던 세계는 다음의 세 가지 사회적 상상 세계들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겠다.
1. 개인화되고 산업화된 문명 사회: 이 시기는 공리주의적 개인주의가 일어난 시기이다. 훈육된, 자수성가의 개인, 부의 축적을 통한 성공, 자유 시장 등의 가치들이 형성되었다. 물론 이러한 벤담과 밀 식의 고전적 자유주의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 이 세계관은 헤게모니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인성에 관한 생각에 영향을 미쳐서, 스스로 성장하여 자신을 건설하는 능력을 가진 자율적인 개인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가치들이 인간의 특성들로 내면화되어서 자기 통제, 자기 부정, 자기 존중, 자기 희생 들이 가치로 자리잡는다. 자기 발전은 ‘시간=돈’이라는 관념과 연결되어서, 부의 축적은 기독교적 가치로 재승인 받았다. 이 시대 들어 부의 축적은 참욕이라기보다는 덕목으로 인정받았으며, 부를 쌓는 활동은 세계의 자원을 이용해 자신의 죄성(罪性)을 속죄한다는 적극적인 해석에까지 다다르게 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선교사들은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하위 계층에서 상위 계층 말단으로 올라선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자기 발전의 가치와 주체에 대한 신념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시간, 근면, 노동, 주체에 대한 그들의 관념들은 선교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기독교가 이러한 사회 질서를 신학화하는 과정에는, 지금의 관점에서는 불평등에 해당하는 내용들도 하느님의 질서로서 인가받게 되는데,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사회적 불평등, 남성우월론적 시각 등이 그것이다.
2. 도시화와 시골: 산업화의 진행에 따라 도시가 형성되고 농촌 사회가 와해되면서 시골의 풍경이 달라졌다. 특히 자영농 요먼이 몰락하는데, 그들의 농촌 생활은 영국 사회에서 잃어버린 목가적 이상향으로 남게 된다. 산업화의 진행 와중에서도 돌아가야 할 유토피아적인 공간으로 설정되었던 것이다. 이 사회적 이상향은 아프리카와의 만남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 영국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산업화에 의해 변화된 시골 출신들이었고, 잃어버린 농촌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아프리카라는 ‘황무지’를 만났을 때, 그 공간을 농업을 통해서 잃어버렸던 낙원, 유토피아를 재건하는 것을 꿈꾸었다는 사실은 이해될 수 있다. 시골에 대한 대중적인 정서는 종교적 공간 개념과도 결합해서, 황야에 있는 새로운 에덴이라는 오래된 이미지와도 만난다. 시골은 도시에 비해 더 거룩한 곳이자 더 큰 도덕적 순수성을 지닌 곳으로 생각되었다.
3. 하느님 나라: 근대 사회에 들어서 교회가 행사하던 헤게모니는 이제 의심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정치나 사회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은 점점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영국에서는 종교개혁을 겪으면서 교회 내에서도 단일한 헤게모니는 사라졌다. 이제 하느님 나라를 영국 사회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은 힘들어졌고, 대신 그 이상은 새로운 식민지 사회에서 추구되었다. 아메리카 식민지를 상실하고, 구(舊) 영국 제국이 붕괴되는 상황에서 다른 식민지에서 기독교적 사회의 이상이 추구되었다. 비국교도 개신교도들의 경우, 그들은 영 제국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갖고 있지 않았고 정교분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들의 선교 활동 양상에 있어서도 식민지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활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서양 정치체에 상관하지 않고 ‘순수한 복음’을 세계에 전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졌다.
실제로는 기독교, 상업, 문명은 분리될 수 없는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선교사들은 노예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본국에서부터 노예제 폐지론자들이었는데, 이것은 자유주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종교 언어를 통해 나타난 것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아프리카인들이 자율성을 획득해 농업에 종사하면 요먼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고, 또 이것은 노예 무역에 대한 대안적 산업으로서 제시되기도 하였다.
남아프리카에 온 선교사들 대부분은 부르주아의 말단이라는 사회적 배경에,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사변적인 경향보다는 농업과 상공업 기술과 연관된 실제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두 선교사, 마팻(Robert Moffat)과 리빙스턴(David Livingston)의 생애와 집안 배경은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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