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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발제

Eric Wolf, "Europe and the People Without History"

by 방가房家 2023. 5. 8.

인류학 수업 시간에 읽었던 에릭 울프(Eric Wolf)의 <<Europe and the People Without History>>는 거대한 책이다. 요즘 학자들은 엄두도 내지 않는 스케일의 이야기이다. 근대 세계의 역사는 유럽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비서구세계(저자는 이런 표현도 싫어할 것이다.)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낸 것이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전의 인류학에서 갖고 있었던 환상, 자신들이 연구하는 ‘원주민’들은 역사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환상을 깨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오히려 인류학의 연구 단위가 되는 인종이나 부족 집단들은 근대에 서구와의 접촉을 통해서 생겨난 정치적 단위들이라는 것이 저자가 누누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책은 큰 이야기이면서도 세계 곳곳의 작은 부분들까지 이야기하게 되는데, 그것은 저자가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물질”의 이동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예와 유럽 공장의 공산품이기도 하지만, 모피, 면화, 커피, 사탕수수, 아편 등 생필품과 기호품들을 다 포괄한다. 그러한 물건들이 지역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고, 문화적 상상력, 그리고 적지 않은 곳에서는 종교적 상상력을 형성하였는지를 세세하게 보여준다. 이와 비슷한 관점에서, 약간 범위를 좁혀 서술한 책으로는 시드니 민츠의 <<설탕과 권력>>(지호, 1999)가 있다.




과연 이 책을 읽고 나서 스타벅스에 가면 메뉴판이 달리 보인다. 자바, 수마트라, 에티오피아, 케냐, 멕시코 등, 전에는 이국적이라고만 보이던 그 이름들이 이 책에서 백인들이 원주민들의 삶을 변형시켜 커피라는 고혈을 짜내던 정확히 그 지역들이라는 것이 눈에 확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무조건 달려갔던 그 사람들과, 그에 짝짜꿍이 되었던 지역 엘리트들이 세계 역사를 이렇게 만들어 온 것이다.

(이 책의 서론과 5-12장의 요약이다.(근대 이전의 역사적 배경을 다룬 1-4장이 생략되었다.) 그 중 9장은 내가 발제를 맡은 부분이라 약간 더 상세하다. 무식하게 많은 양이지만 그냥 일괄적으로 올림!)




1. Introduction
이 책의 중심 주장은 인류 세계가 중층적인 상호 연관된 과정들의 총체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과학 분야에서 흔히 쓰이는 국가, 사회, 문화와 같은 추상적 용어들이 실체로 변모하야 구체적인 관계들의 이해를 가로막고 있다는 점을, 저자는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특히 사회와 문화가 독자성을 지닌 것으로 인식되고, 세계가 서구라는 단위와 소위 원시 사회의 “역사 없는 사람들”로 나눠지고, 서구를 중심으로 한 발전의 내러티브가 도덕적 성공 이야기로 구성되는 현재의 담론 체제에서는 잘못된 이해가 가중되고 있다. 결국 이름들에 실체성을 부여하고 있는 현재의 모델은, 마치 세계를 당구대의 다마들같은 독자적인 단위들의 부대낌으로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사회과학의 발달과정을 되짚으면서 왜 현재와 같은 세계 이해의 모델이 형성되었는지를 논구한다. 초기 사회이론가들이 사회라는 새로운 개념을 구성하게 된 가장 중요한 지적인 의도는, 그들이 당시를 사회적 무질서와 혼돈의 시기로 파악하고 사회적 분열이라는 독에 대한 해독제로서 사회라는 덩어리를 상상해낸 것이다. 이렇게 상상된 ‘사회’는 몇 가지 특성을 지닌다. 사회는 독자적인(sui generis) 실체로 인식되었고, 기본적으로 개인들 간의 관계에 중요성을 두었으며, 공동의 믿음과 관습에 의해 유지된다고 생각되었다. 사회는 독자적인 것으로 상정되었을 뿐 아니라 자체적인 권리를 가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정치경제학에서 방점은 개인의 주체적인 선택에 찍힌다. 정치학에서는 개인의 결정, 주어진 독자적인 단위로서의 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는지가 연구되었다. 사회학에서는 집단의 가치에 대한 합의가 중점이 되었다. 공동의 믿음, 성스러움에 대한 봉헌이 어떻게 공동체를 사회로 전환시키는가가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나마 베버같은 고전 사회학자들의 근대에 대한 비판적 자세는 이후의 근대화 이론들에 묻히게 된다. 근대에 가치가 부여되고 전통사회와 대조되어 발전의 도식이 제시되면서 사회들 간의 관계성에 대한 인식이 묻히게 되었다.
진화론 도식을 가졌던 초기 인류학에는 역사에 대한 관심이 살아있었으며, 지구에 대한 전체 그림을 제시하는 등 관계성에 대한 인식이 있다. 그러나 현장 조사라는 인류학 방법론이 강하게 대두하고, 하나의 조사 방법론이 이론적인 전제로 탈바꿈하면서, 시야가 개별적인 문화 단위들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졌으며, 개별 사회의 통합에만 주목하게 된다. 또한 언어학의 발달과 더불어 독자적인 체계로서의 지역 소우주의 의미 체계에 대한 연구가 주가 된다. 그러나 개별 사례들을 넘어서서 과정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면, 사례들을 세계에 대한 샘플로서 사용한다는 것은 환상임이 여실히 드러난다. 인류학이 자신의 연구 대상을 역사 없는 사람들이라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서구와 만난 최근 500년의 역사를 거세하는 일이 된다. 민족지역사학이 발달할수록, 그들의 역사와 우리(서구)들의 역사는 둘이 아니라 동일한 역사를 이루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맑스는 생산 양식, 계급, 권력 등에 대해서 중요한 질문들을 제시해주었다. 그의 관점은 지금의 이론 작업에 중요한 교훈들을 준다. 1)우리는 세계 시장의 성장과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을 이해하지 않으면 현재 세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2)우리는 이 성장과 발전에 대한 이론을 수립해야 한다. 3)우리는 지역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변화를 야기한 과정들을 전개함에 있어서 이론과 역사를 모두 관련시킬 수 있어야 한다. 4) 그래서 이론적으로 풍부한 역사(theoretically informed history)와 역사적으로 풍부한 이론(historically informed theory)이 결합될 필요가 있다.
이론적으로 풍부한 역사 작업으로는, 세계를 개발과 저개발 지역으로 나누어 분석한 프랭크와 세계체제론을 제시한 월러스틴이 있다. 그들이 제시한 자본주의의 발달이라는 전체적인 큰 그림을 그리면서도, 인류학자들이 연구한 지역 사회 사람들이 그 변화에 대해 보인 반응들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5. Iberians in America
16세기부터 이베리아 반도의 두 왕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신세계 지배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아메리카에 식민 도시들을 건설하여 식민지배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도시에는 행정, 종교 기구, 의회와 시장들이 갖추어져 인디언들의 바다 가운데 있는 스페인의 소우주를 이루었다. 서구와의 접촉 이후 가장 큰 변화는 전염병으로 인해 신대륙 인구가 격감한 것이었다. 전통 체계가 붕괴되었고, 이질적인 농업과 가축이 도입되었다.
 
초기에 신대륙에서 스페인 지배자들이 추구한 것은 은을 채취해서 본국으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대규모의 탄광이 설치되었고 현지인들이 계약 노동을 통해 동원되었다. 또 은을 제련하는 시설도 갖추어졌는데, 여기에는 노예들이 유독한 공정을 진행하는 데 동원되었다. 이렇게 제작된 은은 대규모로 스페인에 유입되었는데, 스페인 정부의 과다한 지출을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그 외에, 양홍(洋紅, cochineal), 인디고, 카카오 등이 재배되었다.
 
생산 시설을 지원해 줄 음식의 공급을 위해 새로운 농경 체제가 도입되고, 원주민 격감에 따라 노예 도입의 필요성이 생기면서 체제가 변하기 시작하였다. 대략 다음과 같은 정치 경제 체제가 형성된다. 광산에서는 상인에게 산물을 팔고, 상인은 이를 유럽 상품과 교환하여 막대한 이윤을 남긴다. 광산 소유주는 하시엔다 주인과 관리인에게 식량 공급을 압박한다. 하시엔다 소유주는 원주민 공동체에 낮은 임금을 통해 압력을 가한다. 이 위계 체제 끝단에 인디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이전의 사회 체계와는 다른 것으로, 인디언 상류층이 서구인과의 매개 집단으로 형성되었다. 대부분 기독교 개종자인 이들은 전통적인 영향력을 교회라는 새로운 위계 안에 통합시켰다. 이 공동체에서는 서구와는 달리 교회와 정치 권력이 일원화되었다. 한편, 이들의 종교는 기독교와 전통이 혼합된 이중성을 보인다. 특히 공간보다는 시간적 조직화에 관심이 많은 서구 기독교와는 달리, 전통 종교는 공간의 성화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공간의 성화라는 전통적인 관심을 바탕으로 이들 기독교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었다.
 
스페인이 은을 주 타겟으로 한 데 반해, 포르투갈이 브라질에서 주로 재배한 것은 설탕이었다. 그런데 여러가지 채산성의 이유로 해서 설탕 재배는 점차 브라질에서 카리브해 연안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아프리카 노예의 사용,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세력의 진출 등 여러 변화가 생기게 된다. 스페인이 몰락함에 따라 유럽으로의 대량의 은 수출이 줄어들게 되고, 활로를 잃은 은들은 다른 경로들을 통해 거래될 수밖에 없었는데, 대표적인 수단은 밀수출이었다. 마닐라를 통한 아시아로의 유입이 이 때 일어나게 된다. 한편 탈출한 노예들과 일부 유럽인들이 결합하여 해적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은 식민지배에 대한 대항 공동체의 성격도 띈 것으로 보인다. 카리브 해 연안은 스페인 식민 지배의 약점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곳은 신대륙의 관문이면서도, 밀수출업자, 농장주, 사업가들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스페인 정부의 지배를 벗어나 국제 경제를 형성하던 곳이기도 했다.

6. The Fur Trade
유럽에 부를 안겨준 다른 식민지 재화들에 비하면, 북미의 모피는 대단치 않은 것이리라. 그러나 모피 거래가 북미 원주민들의 생활 양식을 바꾸어놓은 역사적 과정은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모피 무역의 역사는 러시아에서 사작되지만, 신대륙에서는 알곤킨 족과의 만남이 처음이다. 허드슨 만과 세인트 로렌스 강을 따라 무역이 시작되었으며, 유럽 상인들로부터 생필품을 받고 비버 가죽을 넘겨주는 교환이 이루어졌다.
 
무역은 북동 끝단에서 시작되어, 비버의 멸종을 따라 점점 내륙으로 들어가는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처음 메인 해안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브타키 족인데, 이들의 사회 체제는 무역에 의해 가족 단위로 분화되었고, 그것이 선교에서 편하게 작용하였다고 한다. 이후 무역을 담당하게 된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교환 체제를 가지고 있었던 휴런 족이었다. 그러나 무역의 중요성을 인식한 이로쿼이 족이 네덜란드와 영국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와 우호적이었던 휴런 족에 전쟁을 걸어서 승리하였고, 무역을 독점하게 된다. 휴런 족은 5내지 6개의 연맹(nation)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조직이라기보다는 서구와의 접촉 이후 이전에는 나누어져 있던 부족들이 결합된 새로운 정치 조직이라고 보아야 한다. 가족 생활의 측면에서도, 원래는 모권제가 강한 집단이었는데, 모피 사냥의 중요성이 부여된 이후 점차 사냥을 담당하는 남성의 권력이 강조되는 사회로 변하게 된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새로운 사회 조직을 형성하면서, 이를 위해 의례적인 수단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전통 사회에서는 조상의 날(the Feast of the Dead)이 사회적인 결속을 다지는 날이었다. 이제 연맹과 부족들이 새로 생성되어 결합되는 새로운 맥락에서, 미데위윈이라는 의례가 새로운 사회의 형성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조상의 날에서는 지역 권력의 승계가 이루어졌다면, 미데위윈에서는 개인과 집단의 집적적인 상호 관계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로 지역과 혈연을 초월하는 새 위계적 연합이 이루어졌다.
 
모피 무역의 무대가 더욱 더 중앙 지역으로 이전하고, 북미에 말이라는 새로운 가축이 소개되면서 무역의 양상은 변화하게 된다. 북미 원주민 사회에서 말은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고, 총과 말로 무장한 새로운 개념의 집단이 출현한다. 대평원 지역을 점령한 사람들은 다코타 족이었다. 대평원 지역의 버팔로 가죽과 포가 새로운 무역 상품으로 떠오르면서, 들소 사냥은 북미 원주민들에게 새로운 부의 원천이 되었다. 들소 사냥이 주 경제적 생활이 되어버린 다코타 사람들에게, 명예에 기반한 전통적인 초월성에 대한 인식은 의문시되고 사냥에 대한 개인적인 능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난다. 이것은 새로운 종교적 인식의 기초가 된다. 새로운 조직 형태를 이루기 위해서 역시 전통적인 의례 요소들이 새로운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전통적인 입문 의례, 파우니의 약 주머니, 샤이엔의 성스러운 화살, 아라파호의 성스러운 파이프와 바퀴 등의 상징들이 결합되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라파호 농경 부락에서 기인한 선 댄스 축제였다. 선 댄스에서는 개인적으로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가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세계의 갱신에 대한 약속을 얻을 수 있었다. 의례의 중심은 전통적인 혈연 관계를 통한 결속보다는 개인에 두어졌다. 전쟁, 사냥, 무역을 통한 개인적인 성취가 새로운 리더쉽의 근원으로 부상하였다.
 
북서쪽 해안에서는 치누크, 콰기우틀 족들과의 모피 거래가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포틀래취를 행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울프가 지적하는 것은, 유럽인들과의 거래 이후 이들 원주민 부족장들의 재산 규묘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민족지를 통해 보고된 포틀래취는 이전의 사회에서는 없었던 엄청난 규모의 소비가 이루어지는, 의례의 새로운 양상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경쟁적인 포틀래취는 접촉 이후 경제적 상황에서 이루어진 주도권 다툼이다. 그러므로 포틀래취 비교 연구는 전통 경제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문화적응(접변) 연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유럽과의 접촉 이후 모피나 들소 고기 거래는 북미 원주민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전통적인 부족 체제가 해체되고 새로운 단위가 형성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의례적 수단들이 새로운 결합을 위해 동원되었다. 조상의 날, 미데위윈, 포틀래취 등은 이 변화의 과정에 상응하는 상징적 대응의 중요한 예들이며, 선 댄스 역시 새로운 이동과 경제 수단에 의해 형성된 삶의 자리를 위한 새로운 의례였다.

7. The Slave Trade
처음에 노예가 필요했던 것은 15세기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에서의 은광과 플랜테이션, 포르투갈 식민지에서의 사탕수수 농장에 필요한 인원이었다. 17세기에는 담배 농장에 대한 수요가 추가된다. 18세기에 노예 공급은 절정에 이르는데, 18세기와 19세기 전반에 신세계에 공급된 노예는 전역사적으로 80%를 차지한다. 처음 무역을 시작한 이들은 서아프리카 섬에서 노예를 이용한 재배를 한 포르투갈 인들이었는데, 점차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로 주체가 바뀐다. 노예 수급 지역은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시작되어 더욱 내륙으로, 그리고 중앙아프리카 지역으로 남하하는 추세를 보였는데, 이러한 수급 지역의 변화는 아프리카계 아메리카인의 문화에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왜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동원되었는가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힘들겠지만, 중요한 것은 아메리카인들을 직접 부려 쓰기에는 탈출과 반란의 위험이 컸음이 중요한 이유가 된다. 대신 아프리카인들을 데려와서 친족조직과 문화적 연결을 끊고 철저한 격리 상태에서 노동을 시켰다. 포르투갈의 경영이 아프리카 노예를 데려와 사용하는 방식의 모델이 되었다. 노예 무역은 유럽인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의 분업과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유럽인은 투자하고 무역을 조직하였다. 반면에 노예의 포획, 운송, 운반을 기다리는 동안 통제하고 유지하는 일은 아프리카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아메리카에 노예를 분배하고 일을 하도록 정착시키는 일은 다시 유럽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유럽의 진출과 이에 따른 아프리카 측의 협업에 따라서 아프리카의 정치 구조가 재편되어, 국가조직이 강화된다든지 이전에 국가가 형성되지 않았던 지역에 국가들이 발달하였다.
 
서아프리카 황금 해안 지역에서는 아산테가 유럽과의 무역을 통해 무장을 갖추고 팽창하였다. 아잔테 상징인 왕좌(royal stool)의 힘은 유럽에서 무기를 획득하는 능력과 무역을 통제하는 능력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보다 동쪽에는 요루바 왕국 오요가 니제르강 유역에서부터 해안으로 확장하였다. 오요의 통치자는 자신의 계보를 요루바 족의 성스러운 도시 일레이페(Ile-Ife)의 최초의 왕이자 이 땅의 창조자에 소급된다고 주장하였다. 이 왕조는 19세기 들어 노예무역이 감소하고 교역 유형이 변화하면서 힘을 잃게 된다. 다호메이도 비슷한 유형의 발달을 보이는데, 국가가 무역을 독점적으로 통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베넹의 경우에는 유럽 진출 이전부터 국가 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오요와 마찬가지로 일레이페의 오두아에 자신의 연원을 두었다. 한편 서아프리카 니제르 하류에는 국가를 형성하지는 않았지만 유럽에 의해 야기된 변화에 대응해 생긴 사회조직들이 존재하였다. 18세기 경 아보 지역에는 카누를 타고 무장한 집단이 노예무역을 하였는데, 이 집단이 발전하여 지금의 이보 사람들을 형성하게 된다. 에픽 사람들도 노예를 잡으며 은뎀 에픽 신에 대한 숭배를 중심으로 결사를 조직하였다.
중앙아프리카 지역에는 포르투갈의 진출과 관련하여 콩고 왕국이 변화를 겪는다. 은징가 은벰바 왕이 개종을 하는 등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통해 발달하였으나, 포르투갈이 노예무역의 파트너로서 왕가 이외의 세력들과도 제휴하면서 사회조직이 와해되었고 왕국이 붕괴하였다. 이 과정에서 모계제 전승은 가부장적인 쪽으로 권력을 넘기게 된다. 콩고 왕국의 와해 이후 중앙아프리카에서 내륙지역에서는 노예를 잡아오는 다른 세력인 임방갈라 무리가 활동하였다. 땅의 의례적 주인인 왕에 의해 통치된 루바 왕국이나 왕권과 의례가 결합된 음와안트 야브에 의해 통치된 룬다 왕국에도 유럽과의 교역이 영향을 미친다. 노예와 상아가 해안 지역으로 보내어지고 아메리카 작물인 옥수수와 카사바가 소개되었다. 동부 아프리카의 경우 노예와 상아가 주요 무역 대상이었는데, 이 지역의 경우에는 아프리카 동해안으로 아랍의 이슬람 상인들과의 교역로가 원래 존재했기 때문에 교역의 양상이 좀 달랐다.
흔히 아프리카의 역사는 야만인 지역에 유럽이 진출해 노예를 잡아간 것으로 서술되어왔지만, 이러한 서술에서 아프리카의 과거 역사가 지워져 있다. 이것은 아프리카 인들의 협업에 의해 노예무역이 이루어진 것을 간과한 것이다. 노예에 대한 요구 때문에, 한편으로는 새로운 종속적 체계와 노예사냥을 위한 조직화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을 역사 없음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그것은 단일한 역사적 발전에서 산출된 다양항 결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울프의 관점이다.

8. Trade and Conquest in the Orient
동남아시아 항로는 원래 이슬람 상인들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16세기에 포르투갈이 뛰어들면서 유럽의 진출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은 향료 무역을 중심으로 항로를 개척하여, 고아, 말라카 등의 항구를 선점하였다. 포르투갈이 진출할 시기에 유럽의 배들은 총을 실어 무장을 하였다. 16세기 이후 배들은 갑판이 대포를 설치하여 상선과 군함의 역할을 한 척의 배가 겸하게 되었다.[우리나라에서 이양선(異樣船)이라고 부르는 배의 형태가 아시아 진출 초기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포르투갈의 진출에는 종교적 동기도 강하게 작용하였다. 그들이 함포를 발사할 때 외치는 "Santigo e a elles!"(성 야고보여 그들을 향해!)에 그러한 정서가 배어있다.
네덜란드의 경우엔 정치적 동기가 지배적이었고, 네덜란드 회사가 조직되어 무역에 독점적인 권한을 행사하였다. 이 회사는 군사적인 결정을 내릴 권한을 가졌다. 그들은 말라카를 포르투갈로부터 빼앗았으며 인도네시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영국은 네덜란드에 비해 후발주자로서 경제적 이득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고, 마드라스(1639)와 캘커타(1690)를 확보하였다. 마드라스에는 외국 상인들로 이루어진 “백인” 지역과 이를 뒷받침하는 인도인 인력들로 이루어진 “흑인” 지역이라는 이원적 구성이 이루어졌다. 영국이 진출할 때는 무굴 제국이 인도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여러 이유에 의해 세력이 약해진다. 종교적 이유에서 볼 때는 이슬람의 지배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있어 데칸 고원에는 힌두교 왕국 비자얀나가르가 있었으며, 힌두 신비주의와 수피즘에 기반하여 하나의 신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 박티를 강조하는 종교운동(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시크교)이 새로 일어났다. 무굴 제국의 쇠퇴를 틈타 영국이 이득을 얻어 세력을 확대하였다. 벵갈 지역의 중간 상인 계층은 동인도회사와의 무역을 통해 이득을 추구하였고, 영국 쪽에서도 무굴 쪽 지방 관리 나밥보다는 자민다르의 지지를 얻었다. 이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영국은 플라시 전투(1757)에서 승리를 얻었고, 이 승리 이후 동인도 회사의 성격은 무역 조직의 성격보다는 정부의 형태, 즉 군사력과 행정 조직을 운영하게 되었다. 영국 무역의 역할도 근본적인 변화를 겪어, 인도의 무역 상대로서의 역할에서 멀리 떨어진 사회적 상위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정치 체제도 이에 상응하여 군사적 지배자로서 군림하게 된다. 이러한 확장 과정은 장기적인 계획 아래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경제적 진출 과정에서 인도 지역의 위기와 전쟁에 편승하여 지배권을 얻어갔다고 할 수 있겠다. 영국 지배가 전통적 지배와 달라던 것은 토지와 같은 재산에 대한 권리보다는, 세금을 통해 인력과 노동에 의한 생산품에 대한 지배권을 갖는 것이었다. 일을 관리하고 세금을 획득하기 위해서 인도의 관료 계층이 형성되었다. 그런데 인도 관리와 판사들은 영국 법의 입장에서 볼 때는 불법적인 방식인, 토착적인 방법을 통해서 일을 진행하였다. 지배를 이루는 군대와 행정은 상부의 유럽인과 하부의 인도인으로 된 이원 구조로 이루어졌다. 관료는 대부분 벵갈 지역의 번역가, 브로커, 하위 행정관, 영세 상인과 토지소유주들로부터 충원되었으며, 이들을 다른 지역의 관리로 파견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새로운 행정 계층을 바드랄록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유럽의 기술을 바탕으로, 브라만 전통이나 불교 유입 이전의 위대한 벵갈의 과거를 복원하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세포이 반란에 깔린 이데올로기적 바탕에도 비슷한 동기를 찾을 수 있다. 반란자들은 무굴의 권력을 복원하려는 희망, 기독교의 침입에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며 지역 귀족들을 바탕으로 한 소요를 일으켰다.
인도의 산업 발달은 기실 중국에 진출하기 위한 통로 역할을 하였다. 유럽은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큰 이득을 볼 것이라고 기대하였지만, 실제적인 이득은 크지 않았다. 중국으로부터 비단, 도자기, 약품을 들여오고 면직물을 수출하는 무역을 하였는데, 중국 차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무역의 수지는 맞지 않게 된다. 대규모의 은이 중국으로 유입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에 대한 해결로 영국은 인도의 면화와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무력 충돌로 이어진다. 유럽은 중국에 수출하기 위해 태평양 지역에서 상품을 개발하였는데, 중요한 것으로 백단향(sandalwood), 해삼(sea cucumber) 등이 있다. 대규모 토착 노동력을 조직해서 산물을 중국에 공급하였는데, 이 교역을 통해 태평양 지역 군도들에도 무장을 갖춘 정치체들이 등장하게 된다.

제9장 산업 혁명
 
1. 영국의 변화
중세 유럽의 정치적 환경으로 인해 상업적인 부는 토지 획득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상업적으로 재투자되어야 했다. 유럽 상인이 거둔 이득이 세습적 부가 되지 못하고 자본이 되어야 했다는 점, 다른 말로 상업이 재화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생산의 영역에 관여해야 했다는 점이 자본주의를 형성한 유럽의 독특한 환경이었다.(여기서 자본이란 기계와 재료의 구매, 그리고 인력의 구매를 의미한다.)
유럽 중에서도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배경은 다음 네 단계로 볼 수 있다. ①토지 소유자들이 농지를 양들을 위한 목초지로 전환하였다. ②영국에서 귀족들은 장사에 관여하지 않았고, 상인은 토지를 획득할 수 없었는데, 그 대신 상인과 토지 소유 귀족들 사이의 긴밀한 상호작용이 형성되었다. ③농업이 상업화되면서 많은 영국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다른 일을 찾아나선다. 17세기 말에는 40%의 농민이 땅을 떠나 유동적인 ‘자유’ 노동자층을 형성하였다. ④왕권의 약화로 상류 귀족층과 상인이 타격을 받았고, 그보다 낮은 단위의 토지소유주와 상업 종사자들이 지역 단위에서 활동할 자유가 허여되었다.
영국의 초기 직물 산업에는 네덜란드와 인도라는 두 경쟁자가 있었는데, 경쟁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체질을 강화하였다. 질이 좋은 네덜란드 직물에 대항하기 위해, 생산지를 농촌으로 옮기고 기계화를 통해서 훨씬 싼 가격의 직물을 생산하였다. 반면에 가격이 싼 인도 면직물(calico)에 대해서는, 동인도사회사에 요청해 인도 제품 수입을 금지하는 한편 그것의 복제품을 생산하고, 나중에는 기계화를 통해 캘리코의 대체품을 수출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공정의 기계화 과정에서 중요한 사안은 방적(紡績)과 직조(織造) 과정에 걸리는 시간의 차이를 어떻게 조율하는가이다. 처음에는 방적에 시간이 많이 걸린 반면에 직조는 상대적으로 빨리 끝났다. 1779년에 방적기(mule)가 소개되고 계속적인 발달을 통해, 많은 양을 처리할 뿐만 아니라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고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100파운드 면화를 생산하는데 인도인의 손으로는 50000시간, 1779년 기계로는 2000시간, 1795년 기계로 300시간, 1825년 기계로 135시간이 소요되었다.) 방적 기술이 발달하면서 오히려 직조의 속도가 늦어지게 되었는데, 인력으로 하는 직물 임금이 싼 탓에 직조 기계는 1830년대에나 되어서 도입되었다.
흩어져있는 생산 조직들을 모아서 공장이라는 새로운 생산 양식이 등장하게 된다. 공장을 통해서, 변화하는 시장의 조건에 대응하여 생산 과정을 조율하는 단일화된 기술적인 경영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체계가 노동 방식에 가져온 변화는 심대하다. ①사용자의 입장에서, 수송과 관리 비용의 절감, 그리고 노동력에 대한 통제 강화의 효과. ②노동력을 숙련도에 의해 분화해서 생산 능률을 최적화함. ③작업을 조율함으로써 계속적인 노동을 가능하게 함. 전통적인 노동에서라면 이편에 요구된 일만 끝나면 쉴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경우가 사라지게 되었다. 기계를 놀리는 것은 사용자에게 손해가 되기 때문에 계속 가동시켜야 했다. ④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변화는 노동 계급의 형성이다. 대규모의 인구 이동을 통해 도시에는 노동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공장에서 강요하는 가혹한 노동에 적대적이었고,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대립이 형성되었다.
한편 노사간 대립 외에 다른 경계들도 그어졌다. 남성 노동자와 (저임금을 받는) 여성과 어린이 노동자의 경계, 취업자와 미취업자 간의 경계가 생겼으며, 특히 아일랜드계 노동자와 영국 노동자간의 대립이 나타났다. 맑스는 영국 노동자가 아일랜드 노동자를 대할 때 통치 국가의 일원이 피치자를 대한다는 느낌을 지녔으며, 종교적(반가톨릭 감정), 사회적, 민족적 편견이 부가되어 계급적인 차원을 보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랭카셔 공장들에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서, 미국 남부에서는 노예 플랜테이션이 원주민들의 주거 대신에 들어섰다. 한편 늘어나는 면화 수요 때문에 노예들의 노동 부담은 늘어났다. 이집트에서는 농가가 면화를 재배하는 대토지에 자리를 내주었다. 봄베이 공장에 면화를 공급하기 위해서, 인도 서부에서는 전에는 음식을 재배했던 수만 평의 밭이 면화 재배를 위해 사용되었다.
 
2-1. 면화 공급 지역1: 미국 남부
1800년대 들어 미국은 면화의 주공급지가 된다. 1807년에 영국에 들어오는 면화의 60%는 미국에서 온 것이었다. 한편 미국의 입장에서도 면화 재배는 미국 경제 발달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면화는 1815-60년 기간 미국 수출품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면화 재배는 미국 남부 깊숙이 확대되었고 해당 지역으로의 노예 이동도 잇달았다. 면화 재배의 필요성으로 인해 노예제도는 공고히 유지되었다. 미국 노예제 유지에서 독특한 점은, 다른 지역의 노예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노예 인구가 자체 증식을 통해 충원되었다는 점이다. 1860년에 이르면 다른 곳에서 출생해 미국으로 이송된 노예는 1%에 불과하게 된다. 이것은 새로운 세대에 의해서 문화가, 삶에 대처하는 경험과 양식의 전수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수평적인 유사 친족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노예 경험에 바탕을 둔 지식과 믿음을 계승했다. 그들은 주인의 문화를 수동적으로 내면화한 것이 아니었다. [이점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종교사를 서술할 때 잘 적용되는 명제이다.]
남부 지역이 확대되면서 요청되었던 대량의 음식 공급은 서쪽(미국 중부)의 개척을 통해서 충당되었다. 그러나 그 지역은 제퍼슨이 기대하던 “요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비어있는 땅이 아니라 북미 원주민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그 지역에는 체로키와 크릭 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18세기 들어 연명체를 형성하였고, 유럽인들의 압력에 대응하여 정치체를 강화하고 프랑스, 영국, 스페인 등과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유럽의 영향으로 무장을 하고 곡물과 가축 등을 받아들였다. 1830년 미국 정부는 모든 원주민들을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강제 이동시키는 법령을 반포한다. 강제 이동에 응하지 않는 주민들과는 전쟁을 통해서 관철시켰다. 1840년까지 해당 지역의 4분의 3(12만5천명)의 북미원주민들이 이동 당하였다.
 
2-2. 면화 공급지역2: 이집트
이집트는 비유럽 국가로는 처음으로 유럽의 산업화와 상업화를 따라잡으려는 시도를 보인 사례이다. 1803년부터 이집트를 통치한 메흐메트 알리는 영국에 공급하기 위한 상업적인 목화 재배를 실시한다. 그는 소규모 자작농들의 토지를 대규모 농장에 흡수하여 면화 재배에 집중하였는데, 그 결과 1818년에서 1844년 사이 85-90%를 차지하던 자작농의 토지가 56%로 줄어들었다. 한편 메흐메트 알리는 수에즈 운하 건설로 인한 재무 부담에 시달렸고, 1882년에 영국이 이집트를 차지하게 된다. 영국은 대농장에 면화를 재배하는 방식을 더 강화하였다.
 
2-3. 인도의 섬유 산업
인도에서 생산되는 면화는 미국산과는 달리 처리에 더 많은 비용이 드는 짧은 섬유 품종이어서 영국에서 환영받지는 못했다. 대신에 인도 면화는 중국에 수출되었다.
영국의 면제품이 수입되면서, 인도의 수공업 산업은 거의 파괴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영국의 기술과 인도의 자본이 결합하면서 인도의 자생적인 모직물 산업이 발달하게 된다. 영국은 인도를 중국 수출을 위한 전진 기지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산업 발달이 가능했다. 대표적인 지역은 봄베이이다. 이 지역 첫 번째 공장은 영국의 기술과 파시 인(Parsi, 이란에서 건너온 조로아스터 교도들로 이 지역에서 상공업에 종사하고 있었다)들의 자본이 결합되어 건설되었다. 인도 자본이 투자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력 충원과 운용에 있어서도 인도 십장들(jobber)의 역할이 중요했다. 인력들은 카스트에 관계없이 배치되었는데, 불가촉천민의 경우는 예외였다. 그들이 방적 기계를 만지면 상위 카스트 사람들이 부정(不淨)을 타기 때문에, 천한 일에 따로 배치되었다. 이러한 인도 모직 산업의 발달은, 자본주의 산업 체제 성장의 “주변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산업의 발달을 보여주는 초기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3. 자본주의 위기와 새로운 확장
1826년과 1847-8년에 자본주의 양식의 첫 번째 구조적 위기가 찾아온다. 모직 산업으로 대표되는 초기 산업에 위기가 찾아오자, 영국은 다른 산업의 발달을 통해 타개를 모색한다. 그것은 대규모의 철도 부설 사업이었다. 철도 부설은 철강 생산과 석탄 광산 증가라는 부대적인 결과를 낳았다. 1840년에 4만5천 마일이던 철도 길이는 1880년에는 22만8천 마일로 늘어났다. [한국에서의 철도 부설은 미국이 1883년(측량 시작)부터 관심을 가졌으나, 결국엔 일본에 의해 1899년 개통되었다.]
철도 부설 이전의 철강 산업은 중공업(重工業)이 아니었다. 철강은 무기를 만들 때 동원되는, 전시에만 필요했던 산업이었다. 철도 부설 이후에 지속적인 중요성을 획득하였다. 19세기 중반 영국의 철 생산량은 2천5백만 톤에 달했다.

10. Crisis and Differentiation in Capitalism
10장에서 울프는 자본주의 체제와 거기서 야기되는 모순, 그리고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성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를 이윤 추구의 형태로 보는데,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를 사회 노동력을 통해 자연을 변형시키는 질적으로 다른 양식으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맑스는 자본을 부의 집적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기계, 원재료, 노동력이라는 다른 요소들을 결합한 전략적인 자금 요소로 보았다. 다시 말해, 부가 자본이 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인력을 살 수 있을 때, 더 생산하기 위한 도구를 살 수 있을 때를 말한다. 울프는 이 맑스의 견해를 바탕으로 해서, 프랭크와 월러스틴과는 달리, 생산의 자본주의적 양식은 18세기 후반까지는 성립되지 않았다고 본다.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 확립된 후에야 자본주의적 교환 관계가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맑스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자본의 과다 축적과 과잉 생산에서 온다고 보았다. 레닌과 룩셈부르크와 같은 맑시스트 이론가들은 자본주의가 이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외부로의 확장을 시도한다고 보았으며,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팽창의 관련성을 제시하였다. 레닌은 독점 자본주의, 수출 자본, 식민지 지배, 전쟁으로 이어지는 연결을 주장한다. 그러나 레닌은 독점 자본주의를 너무 강조하였는데, 역사적으로 서구사회의 확장에는 산업과 함께 전사 전통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왕정 국가가 결합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전쟁이나 식민지 지배에는 산업의 요인 말고도 이들 왕정 전통이 작용하였다. 룩셈부르크의 경우 자본주의 위기의 다른 원인에 주목하였는데, 그것은 체제가 소비될 수 있는 구매력을 넘어서는 재화를 생산하는 경향을 갖는다는 점이다. 체제는 새 구매자를 요구하게 되고,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다른 지역의 구매자를 찾아 진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적 양식이 비자본주의적인 해외 다른 지역 양식에 대한 지배를 확립하는 과정이 일어난다.
 
또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맑스가 생각했던 순수한 자본주의 양식이 확장되어 나가는 데 차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지점에서 자본주의 양식은 생산 방식으로서 노동력에 자본을 투자하는 데 있어 고비율의 자본을 운용하는 부류와 저비율의 자본을 운용하는 부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양식은 시대에 따라 이익의 상승과 하강의 국면이 뚜렷이 나타난다. 1826-47의 위기, 1848-1873의 활황, 1873-1894의 대 공황, 1894-1913의 붐, 1914-1939의 공황 등이 연속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한 지역에 자본주의가 영향을 미쳤다고 할 때, 그것은 자본주의의 동일한 국면에 적용된 것이 아니다. 그 양식은 시대에 따라서, 그리고 다른 세계 지역의 요구에 따라서 “자본주의”가 정확히 무엇인지가 분석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의 확장 발달은 “불균등하게” 이루어지며, 이에 따라 해당 지역의 토착 세력들이 자본의 대행자로 형성되는 경위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자본주의의 경계 지역에 나타나는 이들은 친족 중심이거나 공물 경제 집단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형성되기도 하는데, 그러나 교환이 증가되수록 이러한 지역 집단의 자율성을 제약을 받고 쇠퇴하게 된다. 공물체제의 엘리트들, 변방의 요소들은 점차 자본주의 시장으로 편입되고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간접적인 기반으로 연결되는 운명을 갖는다.

11. Movement of Commodities
이전의 자본적 농업에 부가되어, 19세기 후반 새로운 농업 형태가 등장한다. 지역 농업에 단일 품목의 작물이 요구되었고, 다른 지역에는 농장의 인력에 공급할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농사가 요구되었다.
1873년의 대불황으로 인해 자본주의와 나머지 세계의 만남에 새로운 양상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더 대규모의 체제 아래 자본적 산물의 관계들이 지배받게 된 것이다. 19세기 말 영국은 산업국가의 독점적 지위를 잃게 되지만, 그래도 영국을 국제 경쟁에서 버티게 해준 원동력은 인도에 대한 지배였다. 해외 시장 점령의 중요성이 증가하였다. 동시에, 미국과 러시아의 대규모 밀 재배가, 교통 수단의 발달과 함께 유럽의 농업을 위협하였다. 국내 계층들의 불안과 더불어, 유럽 국가들에겐 더 싼 노동력과 재료의 공급이 요구되었고, 이것이 정치적으로 제국주의라는 형태로 해외에 진출하는 것을 부추기게 되었다.
각 지역의 농업은 특화되었다. 원래 아담 스미스나 리카르도 같은 이들이 상상한 자유 농업은 각지에서 최적의 농산물을 재배하여 다른 지역 산물과 최적의 교환을 하는 것이었지만, 현실에서는 한 쪽만의 이익을 위한 비대칭적 교환만이 일어났으며 각 지역에 작물을 재배하도록 하는 원리는 강제와 제한이었다. 대표적인 특화 농업 형식은 플랜테이션이다. 1807년 영국은 노예 무역을 금지하는데,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산업 자본주의의 헤게모니가 높아짐에 따라 노예보다는 자유 노동력을 선호하게 되었다는 데 큰 이유가 있다. 결과적으로 영국의 사탕수수 농장의 노예 형태는 확장되는 플랜테이션 농업과 다른 지역 소규모 생산자의 환금작물에 밀려나게 되었다.
주요한 식량 재배로는 유럽과 아메리카의 밀, 아시아의 쌀, 가축, 그리고 플랜테이션 작물인 바나나가 있었다. ①교통과 농기구의 발달과 더불어 미국 중부 대평원 지역에 밀이 재배되어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미국의 밀은 유럽의 농업을 위협하여 많은 농민들이 실직하였는데, 역설적으로 이들은 미국으로 이주하여 인력을 제공한다. 아르헨티나와 러시아 남부 스텝 지역도 유럽의 식량 공급원이 되었다. ②버마에는 영국 자본으로 랭군 지역에 쌀농사가 지어져서 인도 노동자들에게 공급되었다. 타일랜드에서는 방콕 북쪽의 방찬 지역에 중국인들에 쌀농사가 시행되었다. 이 지역 인류학 연구에서 “느슨하게 구조화된 사회 체제”라고 명명된 것은, 지역 고유의 특성이라기보다는 상업 작물의 팽창의 결과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③철도와 증기선으로 인해 변방 지역이 고기의 공급지가 되었다. 대표적인 곳은 카우보이가 있던 미국 서부로 남북 전쟁 이후 대평원 지역과 텍사스 지역에서 소를 잡아 시카고 지역의 가공을 통해 수출되었다. 아르헨티나 팜파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설비와 더불어 주요 공급지가 되며, 호주도 주 공급지가 되었다. ④미국 회사에 의해 중부 아메리카에 바나나 재배가 행해졌다. 콜롬비아 지역에도 마찬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이것은 <백년동안의 고독>의 마콘도 지역의 배경이 된 지역에 일어났던 변화였다.
고무의 주산지가 된 곳은 브라질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문두루쿠라는 사람들은 원래 아마존 계곡에 사는 전투적인 집단이었다가, 노예를 잡고 관리하는 일에 고용되었는데, 이로 인해 남녀 역할의 분화가 심해지고 모계 주거를 바탕으로 부계적 승계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이루게 된다. 민족지적 비정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사례는 고무 재배로 인한 역사적 변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 아시아에서는 말레이 지방, 그리고 실론 섬에서 고무 재배가 이루어졌다. 실론에는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인도 남부에서 타밀 족이 대량 이주하는데, 이것이 후의 불행의 씨앗이 된다. 서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노예 매매가 끝난 이후 야자유를 생산하였다. 노예무역에 의존했던 국가 체제로는 새로운 농장 체제에 적응하기 힘들었고, 대부분 노예 출신이며 선교를 통해 교육받은 새로운 상업 엘리트가 형성되었다.
각성제가 세계적으로 보급된 이유는 중독성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차라리 노동에 요구되는 자본주의적 시간 관념의 도입으로, 순간적인 에너지의 공급이 필요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티 타임”이나 “커피 브레이크”는 이와 관련된 말이리라. 커피는 에티오피아 원산으로 18세기 네덜란드인들이 자바에서, 19세기 말부터는 브라질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었다. 멕시코 치파스도 커피가 재배된 곳인데, 이곳의 지나칸탄, 차물라 등의 사람들은 고대 마야인의 잔류, 원시 부족이 아니라 자본주의 농업에 적응한 부족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코코아는 중앙아메리카로부터 서아프리카에 소개되어 가나의 아콰핌 산맥에서 재배된다. 가나 지역의 재배가 이 지역 집단들이 새로운 토지소유 방식에 적응하여 형성된 것에 반해, 상아 해안 지역은 프랑스 자본에 의한 식민지 방식이 적용되었다. 아편의 경우에는 19세기 말 인도차이나 내륙 고산지대에서 재배되어서 버마나 타일랜드와 중국 간 무역의 상품이 되었다. 몽(Hmong)을 비롯한 이 지역 부족들은 아편 생산과 무역을 통하여 친족 관계를 강화하였다. 이 지역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는 에드문드 리치에 의해 연구된 카친 족이다. 그들의 사회는 위계적 모델과 평등적 모델 사이의 변환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고유한 특질은 아니다. 평등주의로의 변화는 19세기 후반의 변화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스타벅스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지역의 커피들, “홍차의 꿈” 실론티, 가나 초콜렛 등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기호품과 관련된 모든 지명들이 이 부분에서 언급된다.]
다이아몬드는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개발되었다. 유럽인의 진출에 영향을 받아 지역 주민들이 규합되어 줄루 정치체를 형성하였다. 특히 샤카는 주술적 권위를 자신에 집중시키고 결혼 규제를 통해, 권력을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줄루 전통을 새로이 창출한다. 쿠말로, 츠와나, 스와지 등 다른 집단들도 이 시기에 형성되는데, 영국과의 전쟁을 통해 차례로 복속되었다.

12. The New Labores
노동 계급의 형성은 분명 새로운 현상이지만, 이들에 대한 연구는 그들을 이해하는 방향에서 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들은 반역사적인 요소로, 아노미적 존재로, 문화에 대한 적대자로 여겨지며, 사회주의적 연구자들도 사회적 행위 주체로서보다는 투쟁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상태로 그들을 이야기한다. 자본주의 생상 양식의 특징은 노동력에 유연성을 요구해서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해서 노동 고용을 조정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임금의 차등으로 인해 노동자들 사이에 계급화가 이루어졌는데, 그 외에도 노동 계급을 결정하는 것에는 친족 관계, 회합, 지역, 통근 거리와 이웃의 산업 지역 등의 요소가 작용한다.
노동자의 이주는 세 시기로 볼 수 있다. ①산업화 초기에 영국에서 일어난 이동. 아일랜드인의 이주가 여기에 속한다. ②유럽인들의 미국으로의 대규모 이주 ③탄광과 플랜테이션으로 인한 세계적인 이주. 미국으로의 이주를 보면, 18세기 말에는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그리고 독일 남서부 사람들의 이주가, 19세기 초반에는 토지를 상실한 독일, 스칸디나비아 농민들이, 그리고 1890년대 들어서는 남유럽과 동유럽 이주민들이 늘어나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발칸, 폴란드, 러시아 유대인들이 유입된다. 이탈리아 이주민의 경우 1870년대 농업 위기로 인해 남부 농민들을 중심으로 1861년부터 1911년까지 400백만이 해외로 이주한다. 1800년대에는 남아메리카로의 이주가 많았으나 1900년대 들어 미국으로 이주가 급증한다.
중국인들은 동남아시아로 대거 이동하는데, 이동의 거점이 된 지역은 싱가포르였다. 아편전쟁 이후 “쿨리” 거래가 열리자 브로커들에 의해서 중국 노동 인력들이 거래되었는데, 이 인력들은 비밀 조직(secret societies)에 의해 통제되는 동시에 노동자의 이익을 보장해주기도 하였다. 영국이 1867년 이후 싱가포르 지배를 확립한 이후, 싱가포르에는 영국 관리, 말레이 보조원, 중국 하급 관리로 이루어진 위계가 형성되었다. 규제에도 불구하고 중국 상인들의 조직이 번성하게 된다. 이 조직은 종교적인 성격까지 지니며 중국인들의 망을 조직화하였다. 한편 1852-75년에 20만의 중국인들이 캘리포니아 금광과 철도 부설에 투입되는데, 이 지역에서도 여섯 회사라고 불리는 조직이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유입은 1882년 법령에 의해 정지된다. 미 서부의 반중국적 감수성은 인종주의의 전조로 볼 수 있다.
노동자들이 모인 지역에는 이질적인 집단들의 공존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 “다원적 사회”는 자본주의 양식의 경향, 특히 노동자들을 자본의 필요에 따라 “제어 가능한 무리”로 두려는 경향에 의해 형성된 측면이 강하다. 우리는 이 집단의 이질성을 지금의 민족 개념의 렌즈를 통해 판단해서는 안 된다. 민족 개념이 근대 유럽 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정치적 필요에 의해 형성된 집단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울러 인디언이라든지 흑인과 같은 인종(race)적 구분이 상업적인 진출에 주민들을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붙여진, 다시 말해 경제적 정치적 필요에 의해 형성된 말이며, 이들이 스스로에 부여하는 집단 정체성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후기에서 울프는 맑시즘 시각을 통해 인류학 논의를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를 정리해준다. 우선 이 책의 목표는 흔히 인류학 저서에서 “원시인”, 무시간적이고 역사가 부재한 사람들이라고 불리던 이들, “차가운” 역사의 사람들이 우리(서구인)와 분리되지 않는 역사적 과정의 산물임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 맑스의 이론 중에서, 사회 생활은 인간이 생산을 통해 자연과 관계하는 방식에 의해 형성된다는 기본 관념, 가치에 대한 노동 이론, 상업 자본과 산업 자본의 구분, 자본주의 발달 단계에 대한 생각들이 적극적이 이 저서에 사용되었다.
기존 인류학 논의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각각의 집단들이 독특한 정신을 지니는 사회를 구성한다는 문화 개념이다. 그러나 역사적 변화 안에 사회의 실재를 놓는다면, 고정되고 단일한 기존의 문화 개념은 분명히 유동적이고 변화되는 부분으로 바뀌어 질 것이다. 분명 문화에는 특질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경제적이고 정치적 힘을 결정짓는 요인이라기 보다는 그에 대한 반응이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짓는다는 맑시즘 테제가 뚜렷이 드러난다.] 분명 문화 연구는 물질적 부분인 자연과 정신적 부분인 문화의 관계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자연을 다루는 사유의 측면(신화적 사고)은 순수한 형태가 아니라, 어떠한 생산 양식을 통해서 인간이 자연을 변화시키는지에 의해서 결정된다. 의미가 자연적으로 사물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발전되어 부여된다는 전제에서는, 울프의 주장이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기존 인류학자들과 만나는 부분이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 강조점, 레비-스트로스가 재료를 갖고 어떠한 사고 작용을 하였는지에 집중하였다면, 울프는 재료가 주어지는 “사회적 과정”에 논의를 집중하고, 재료가 사유에 끼치는 제약성을 일깨워 준다는 데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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