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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의례(클럭혼)

by 방가房家 2023. 5. 8.

클럭혼의 신화-의례에 대한 대표적인 논문인

Clyde Kluckhohn, "Myth and Rituals: A General Theory," The Harvard Theological Review 35-1 (Jan., 1942): 45-79.를 나름대로 요약하고 내 생각과 관련자료를 덧붙인 글.
신화와 의례
 
1. 신화는 성스러운 이야기이며 의례와 상호 관계를 갖는다.
뒤르켐적 의미에서 성스러움을 지닌 이야기를 신화하고 할 수 있겠다. 신화가 의례적 맥락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에도 성스러움의 맛은 여전히 존재한다. 신화는 의례와 어떠한 관련성을 지닌다는 것이 중요한 특성이다.
 
2. 신화와 의례의 관계는 어느 것의 우선성의 문제가 아니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고전 그리스처럼 신화가 의례와 떨어져서 존속하는 경우도 있고, 초기 로마인이나 모하브 족의 예처럼 신화 없이 의례가 발달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신화와 의례는 상호 연관성을 지닌다. 이들이 상호적이라고 했을 때 무엇이 무엇을 낳았느냐는 우선성의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변함에 따라, 즉 실제적 행위의 변화에 따라 여성에 대한 이상적 유형, 즉 신화가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면에 위에서부터 부과된 나치 신화에 의해서 행위가 창출되는 것도 목격할 수 있다. 이처럼 어느 것이 우선하는지는 경우에 따라 다르고 어느 한쪽을 확정짓는 것은 닭과 달걀과 같은 무익한 논쟁이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양자 간의 긴밀한 상호의존성이다. 후크가 신화가 의례를 정당화한다고, 다른 말로, 신화는 인간 행위의 언어적 혹은 상징적 근거라고 이야기한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는 더 나아가 신화가 의례로부터 떨어지면 생명력을 잃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신화 없는 의례도 존재하고 의례 없는 신화도 존재한다. 연관성 테제는 신화와 의례가 상호관계를 갖는 강한 경향성이 있다고 다듬어 제시될 필요가 있다.
 
3. 나바호족의 신화와 의례
나바호족에서는 의례와 연관되지 않은 신화가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고, 꿈과 환시(幻視)로부터 신화와 의례가 생성되는 모습도 관찰할 수 있다. 신화를 음송하는 한 나바호 가수는 자신이 부르는 노래 내용에 따라 모래 그림과 의례 행위들이 수정된다고 이야기한다. 반면에 어떤 의례에는 아무 이야기도 전해지지 않았는데 나중에 관련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4. 신화와 의례의 밀접한 관련성은 그 둘의 기능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제시될 수 있다.
상호 연관성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론화시킬 수 있을까? 클럭혼은 기본적으로 기능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신화와 의례의 사회적 기능을 수용하면서, 심리학적 고찰을 곁들여 개인적 차원에서의 역할에도 주목하고자 한다. 그는 신화는 사회 제도에 대한 정당화의 역할을 한다는 기능주의 이론가, 특히 말리노프스키의 입장을 지지한다. 그러면서도 클럭혼이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개인의 삶의 차원에서 신화와 의례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의 문제이다. 또한 그러한 고찰을 통해서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신화와 제의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개인은 사회로부터 세계에 대처하는 재료를 제공받지만, 반대로 개인적인 꿈, 개인적인 의례를 통해 새로운 재료를 생성해 추가시키기도 한다.
 
5. 신화와 의례가 개인적 차원에서 갖는 의미가 탐구될 필요가 있다.
신화와 의례는 개인이 직면하는 인생의 문제들에 대처하는 조정 반응(adjustive response)들을 제공하는 문화적 창고 역할을 한다. 신화와 의례는 혼란스러운 변화의 세계에서 잡을 수 있는 고정 지점들을 제공한다.
신화와 의례는 공통의 심리적 기반을 갖는다. 의례는, 사회의 근본적 필요(경제적 필요, 생물학적 필요, 사회적 필요, 성적 필요 등)를 상징적으로 극화한, 강박적인 반복 행위이다. 그리고 신화는 동일한 필요의 이성화이다. 그것은 예식의 형태로 표현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문화적으로 인지된 필요는 사회에 따라 다양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필요는 오직 측정한 개인 내에서 발생하고 존재한다.



6. 신화는 의례의 대본이라고 다소 도발적인 형태로 의례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신화의례학파의 문제제기는 아직도 유효한 물음으로 남아있다. 우선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으로 그들은 신화에 있어 의례의 필수불가결성을 주장한다. 그러는 한편 제인 해리슨의 논의에서는
말해진 것/행해진 것이라는 표현 매체의 측면에서의 고찰도 등장한다. 여기서 이러한 물음이 가능하다. 의례는 신화의 본질적인 부분인가, 아니면 표현 매체이거나 중요한 맥락으로서 의미를 지닌 것인가? 다른 식으로 말해, 의례가 제거된 신화는 그 본질적 생명력을 상실하는가?
클럭혼이 이 문제를 신중히 대한다. 그는 극단적 입장을 지양하며 신화 없는 의례, 의례 없는 신화의 존재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상호연관성을 강조하면서도 독자성도 인정한다. 그에게 신화와 의례는 인간의 꿈이 표현되는 양식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보인다.
의례 없는 신화를 독자적으로 인정할 지, 아니면 무언가가 상실된 과도기적이고 미완의 상태로 볼 지는 아직 중요한 문제이다. 그 답변에 따라 신화에 대한 보수적인 입장과 그렇지 않은 입장이 갈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통 사회에서 의례와 신화의 긴밀한 관계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의례와의 유대를 지속하기 힘든 ‘현대의 신화’는 과연 어떠한가? 탈의례화된 현대의 신화는 엘리아데의 말대로 신화의 잔존 형태인가? 신화 없는 의례와 의례 없는 신화를 논의하는 웬디 도니거의 입장은 엘리아데를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현대의 신화학자 중 많은 이들은 신화가 영화, 연극, 드라마, 그리고 게임의 형태로 생명력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한다. 현대에 길가메쉬 신화가 생명력을 얻는다면 그것은 게임을 통해서가 아닐까? 의례는 전통사회에서 신화를 표현하고 간직하는 하나의 매체이고, 사회적 맥락의 변화에 의해서 다른 매체로 바뀔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신화와 그 본성상 떨어질 수 없는 것인지, 그 질문 신화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물음이 된다.
 
 
첨부) 신화 없는 의례 / 의례 없는 신화1)
 
Orthopraxy and Heteropraxy: Ritual without Myth
도니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리보다 실천에 있어서 더 완고하고 보수적이다(more orthoprax than orthodox)'라는 프리츠 슈탈의 견해를 받아들여서 낯선 것을 수용하는데 있어서 신화보다는 의례가 더 문제가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가 더 이상 그 의례와 연관된 신화를 믿지 않게 된 순간에도 의례를 수행하는 것을 멈추긴 쉽지 않다. 이 경우 어떤 이들은 새로운 신화를 찾아서 이를 새롭게 설명하려 들고,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신화 없이 의례 자체만을 계속 수행하기도 하며, 한편 새로운 신화를 만들고 의례를 거기에 맞게 수정하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신화를 상실한 의례를 놓고 우리는 의례가 더 이상 아무 의미도 갖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신화를 상실한 의례의 존재론적 위치는 잊혀진 꿈과 다를 바 없다. 여기서 도니거는 스페인의 유대인들 예를 든다. 박해를 피해 Seder(유월절밤 축제)를 지내기 위해 유대인들은 집밖에 망보는 사람을 두었고, 그들은 이단재판소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테이블을 내놓고 카드놀이를 하곤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부 유대인들은 문제의 의례 자체를 행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래도 그들은 그 때가 되면 테이블을 밖에 내놓고 카드 놀이를 했다. 심지어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까지도 아무 의미가 없어진 그 행동을 되풀이 했다. 도니거는 이것이 막스 뮐러가 신화를 이야기하면서 언급한 '언어의 질병' 현상과 유사한 과정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들의 옛 의례가 신화적 의미를 상실했을 때 그 의례를 바꿀 수 있을까? 바꿀 수는 있다. 그러나 그건 무척 힘들다. 예배에 쓰이는 성서구절을 새롭게 번역하려고 할 때 일반적인 성서 번역 개정 작업에서보다 더 강한 저항에 부딪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도니거 자신도 옛 것과 새 것, 여러 종교의 상징 등이 혼합된 짜깁기 결혼식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새로운 의례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신화가 사라진 상태에서조차도 이전의 의례를 고수하려 한다.
 
Myth without Ritual
그러나 이처럼 신화보다 더 튼튼한 의례도 궁극적으로 상실될 수 있다. 앞의 스페인 유대인의 경우와 정반대되는 예가 있다. "발 솀-토브(Baal Shem-Tov)는 그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자 숲의 어느 장소에 가서 불을 피우고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그 일이 잘 해결되었다. 한 세대가 지난 후 어떤 사람에게 똑같은 일이 닥치자 그 역시 똑같은 장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불을 피울 수가 없어서 그저 기도만 드렸다. 역시 그의 문제도 해결되었다. 또 한 세대가 지난 후 한 랍비역시 똑같은 일에 부닥쳤다. 그도 똑같은 장소에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불도 피울 수 없었고 그 기도문도 기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그 장소에 찾아간 것만으로도 그의 문제는 해결되었다. 또 한 세대가 흐른 후 이번에도 똑같은 일에 처하게 된 한 랍비는 이제 그 장소마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방 안에 앉아서 말했다. 이제는 불도 피울 수 없고 기도문도 모르고 장소마저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이야기만은 알고 있다고. 그가 이야기를 말한 것은 그 전과 똑같은 효과를 낳았다." 이는 의례는 사라지고 신화만 남은 상황을 나타내 준다. 여기선 다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도 이야기는 남는다. 마치 그리스 영웅들의 삶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영웅의 승리자체가 아니라 그 승리를 노래하는 핀다로스의 시였던 것처럼.
위에 인용한 예는 유대인들이 희생제의를 그만두게 된 이유를 이야기 해 준다. 성전 파괴 이전에 이미 유대인의 희생제의는 완전히 신화화되어 있었다. 즉, 의례에서 희생제의와 연관된 성서를 낭독하는 것으로 이미 실제 희생제의를 대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도니거는 단편화되고 증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응축되고 단순해지는 것, 불필요한 것을 줄여가는 것도 의례의 본성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단순화과정의 하나가(그러고 아마 가장 극단적인 것이) 의례 전부를 없애버리고 단지 이를 문자로만, 즉 신화로만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마치 직접 들어보진 못하고 악보로만 남은 교향곡 같은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잔영은 남아있다. 의례가 더 이상 수행되지 않고 신화만 남은 상태에서도 의례의 신화적 잔영은 남아있는 것이다.
신화를 상실한 의례에는 뚜렷한 의미만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남아있다. 이는 마치 내용은 빠지고 껍질만 남은 책과 같다. 이때 그 불분명함이 오히려 모호한 의미들을 신비롭게 포장할 수도 있다. 반면 의례를 상실한 신화는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뚜렷한 의미만 남아있는 경우이다. 도니거는 의례가 신화보다 더 변하기 힘들다고 보기 때문에 후자보다는 전자의 사람들이 더 많다고 이야기 한다. 의례 없이 신화에만 매달리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1) Wendy Doniger, Other People's Myth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8), 125-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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