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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발제

조선 초 유교의 정통 확립과 이단 배척

by 방가房家 2023. 5. 6.

조선 성리학이 지금의 종교사에 남긴 가장 큰 영향 중 하나는 정통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유교사의 맥락에서 이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고 다듬어졌는지 정리해두고 싶었는데, 이번에 읽은 도이힐러의 글은 이 문제를 명쾌하게(너무 명쾌해서 걱정일 정도로) 잘 정리해주어서 참 고마웠다. 이 학자의 글은 이번에 처음 읽는데, 한국 학자의 글에서는 잘 보지 못했던 신선한 시각을 많이 얻은 글이다. 이 글에서는 이황이 정통 개념을 형성하고 이단을 배척하는 정통파의 보스처럼 그려지는 일종의 내러티브가 느껴지는데, 이러한 서술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는 지적도 받겠지만, 일단은 흥미롭다. 유교사를 한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었기에. 다음은 Martina Deuchler, "Reject the False and Uphold the Straight: Attitudes Toward Heterodox Thought in Early Yi Korea" in Theodore de Bary & JaHyun Kim Haboush, eds., The Rise of Neo-Confucianism in Korea (New York: Coumbia University Press, 1985). 의 요약이다.
이 요약문은 원자료 본문과 연결시켜 정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민추 웹페이지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았다. 나같은 인간도 이렇게 고문서 자료를 헤집고 다닐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



조선 초 유교의 정통 확립과 이단 배척
 
(1) 조선 왕조의 성립이후 신유학은 이전에 불교가 점유하였던 영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에서도 권위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정도전은 불교와 논쟁하며 한국에 처음으로 이단(異端) 개념을 도입하며 정학(正學)과 이단의 구분을 제시하였다. [정도전, <불씨잡변>, <<삼봉집>>] 권근은 천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연결시키는 이론적 설명을 통하여 유교의 종교적 측면을 제시하였다. [권근, <<입학도설>>] 김굉필이 유교와 불교를 각각 정(正)·직(直)과 사(邪)·곡(曲)이라 칭한 것은 당시 유불에 대한 전형적인 범주 설정을 보여준다. [성종실록 11년 경자(1480, 성화 16) 6월 16일(을축)]
 
(2) 유교적 정체성의 형성: 한국의 신유학 정통은 중국과는 독자적으로 형성되었다. 정주학파를 수호하는 것이 조선 유학의 기초가 되었고, 한국은 자신이 정주학 전통의 수호자를 자임하게 된다. 최부가 “지금 우리 조선은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유도(儒道)를 존숭”한다고 선언한 것이 당대 분위기를 보여준다. [최부, <<표해록(漂海錄)>> 제2권 무신년(1488, 성종 19) 2월] 조선 유교의 도통은 명의 매개 없이 송의 전통에 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3) 지적 경계: 사림을 중심으로 신유학의 형이상학적 요소에 대한 이해에 매진하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난다.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가 열리고 <<대학>>을 중심으로 정심(正心)을 논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이후 조선의 유교 정통이 확립되는 자양분이 된다.
 
(4) 다른 사유의 침범: 16세기에 왕양명, 육상산 등의 저서가 조선에 유입되고 심학(心學)이 소개되면서 조선 유교계의 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5) 이황의 정학(正學) 확립과 이단 배척: 양명학의 위협에 대처해 조선 성리학 정통을 확립한 학자가 이황이다. 그는 조선 유학을 주희를 계승하는 자리에 놓는 도통(道統)을 확립하는 작업을 하였다.[<<송계원명이학통록>>] 그에게 정학(正學)은 정주학을 절대적인 학문의 표준으로 삼고 정진하는 것이었다. 이에서 벗어난 것을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전통적으로 이단은 불교에 적용되는 범주여서 불교는 “음란한 노래나 예쁜 여자처럼” 멀리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황이 생각한 더 큰 위협은 유교의 모습으로 가장하고 불교적인 교설을 퍼뜨리는 무리들이었다. 그리하여 명의 양명학자들의 불교적 성향을 비판하는 작업을 전개하였다.1) [<<퇴계집>>] 후학들은 이황을 “사설(邪說)을 억누르고 정학(正學)을 부식(扶植)시킨 공”(이 대목의 영어 표현이 이 글 제목이다)을 세웠다고 칭송한다. [선조실록 선조 9년 병자(1576, 만력 4) 4월 24일(정해)]
 
(7) 다양성의 위협: 조선에서 양명학을 수용한 학자들로는 남언경과 노수신, 장유 등이 있는데, 이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은 단편적이다.
 
(8) 중국의 변절에 맞서 도를 지킴: 이황의 제자인 윤근수는 북경에서 중국 학자들과 만나 중국 유교가 양명학의 가르침에 빠져 그른 길로 빠져들었으니 정주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라고 권하였다고 한다. (이 장면은 매우 재미있다. 당신들은 정통의 가르침을 잊었노라고 유럽(때로는 미국) 기독교에게 호통을 치는 한국 개신교인의 모습이 떠올라서이다.) 류성룡과 허봉에게서도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서애선생연보>>28세조] 윤근수는 또 육상산이 공자묘에 함께 배향되는 것을 보고 메스꺼움을 느꼈다고 한다. 성리학자들은 유교 정통이 중국이 아니라 한국에 존재한다고 인식하였다. 조선 성리학자들이 주희와 함께 문묘에 배향된 것이 이 생각을 의례적으로 나타낸다.

1) 금장태, <퇴계의 양명학 비판>, <<퇴계의 삶과 철학>>(서울대학교출판부, 1998)을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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