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메리 더글러스의 <<깨끗함과 위험>>(Purity and Danger) 앞부분(1-3장)을 읽고 수업시간에 발표를 해야했던 일이 있었다. 그땐 책을 내 삶의 경험에 견주어보려고 무지하게 노력하던 시기였다. 책을 읽으며 제일감으로 떠오른 것은 이젠 사회적으로 잊혀진 경험이 되어버린 방위 시절이었고, 그것이 발표문의 처음이 되었다. 당시 내 머리 속에 있던 건 모두 집어넣으려 애쓴, 꽤 혼란스러운 발표였다.
당시 발표문에선 더글러스와 리치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려 애썼는데, 지금 보기에 그리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3.1부터의 내용은 무효에 가깝다.
당시 발표문에선 더글러스와 리치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려 애썼는데, 지금 보기에 그리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3.1부터의 내용은 무효에 가깝다.
1.1 위험한 방위
방위병은, 불쾌한 존재이다. 그것은 방위가 분류체계 상에서 경계에 위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방위는 '군인/민간인'의 분류체계 내에서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민간인이 아닌 것은 확실하고, 그렇다고 파리를 새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방위는 '흠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상인/병신'의 분류체계도 교란시킨다. 어딘가가 문제가 있으니까 방위일텐데 겉으로는 멀쩡하니 혼란스러울 뿐이다. 이러한 애매한 존재가 배태된 것은 제도와 통념(通念)간의 간극(間隙) 때문이다. 첫 번째로는 행정 명칭상의 군인과 통념상의 군인 개념 사이의 괴리 때문에 군인/민간인 사이에 경계 영역이 형성된다. 두 번째로는 군사 행정적인 정상 등급인 1, 2급과 통념상의 '정상'이 다르기 때문에 정상인/병신 사이의 경계 영역이 설정된다.
문제는 '정상'을 규정함으로써 생긴다. 정상은 필연적으로 그 경계에 비정상을 배태시킨다. 더글라스의 지적한대로, "어떤 분류체계든지 반드시 비정상(anomaly)을 산출하며, 어떤 문화든지 그 문화적 가정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건들과 맞닥뜨리기 마련이다(Douglas:39)". 그렇다면 이러한 비정상에 대하여 문화는 어떠한 방식으로 대처하는가? 더글라스는 이에 대해 다섯 가지 유형을 제시한다(Douglas:39-40).
①문화는 애매한 존재를 둘 중의 하나의 범주에 포함시킴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누에족은 기형아를 하마의 범주에 복속시킴으로써 범주의 혼란을 예방한다.
②비정상적인 존재는 물리적으로 통제되어 제거되기도 한다. 쌍둥이 살해함으로써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벽에 울어야 할 닭이 밤에 울면 모가지를 비틀어 버린다.
③비정상적인 존재들을 기피하는 규정을 설정함으로써 그들이 분류체계를 위협할 소지를 없앤다.
④비정상을 위험한 것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관념의 설정으로 비정상과 접하고 싶어하는 개인적 욕구를 차단하고 체계를 공고하게 한다.
⑤신화나 제의에서는 애매한 존재를 의미론적으로 승화시켜, 존재의 다른 차원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통로로 이용한다. 에드먼드 리치가 모세나 예수를 분석하는 것은 이러한 시점에서이다.
국방부는 이중 제1안을 택하였다. 그들은 방위를 상근예비역과 공익근무요원으로 분해하여 각각 군인과 민간인의 신분으로 귀속시켰다. 그러나 이 조치는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방위 제도는 부활하게 되었다. 반면에 사회에서는 제3안을 택하여 방위를 처리하였다. 이는 문화적인 것으로서, 방위를 사회의 터부로 인식한 것이다. 더글라스의 레위기 분석에도 나오듯이, 각 생물에는 생활 영역과 행동 방식이 규정되어 있다. 우리 사회에서 군인이 살아야 하는 곳은 병영이며, 그렇지 못한 군인(?)과는 접촉해서는 안된다. 이는 휴가나온 일반 군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1.2 분류체계 연구와 제물론(齊物論)
문화를 분류체계로서 이해한다는 것은 개념의 상대화 작업을 의미한다. 앞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정상/비정상의 개념은 사회적 집단마다,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르게 설정될 수 있다. 그것은 실재로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라 실재와 해석자 사이의 매개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에드먼드 리치는 이 점을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하고 있다(Leach 1979:157). 분류개념이란 연속체를 이루고 있는 실재에 구분점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물론 이 구분점에 있어 절대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문화적으로 결정될 뿐이다. 우리는 자신의 개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살고 있기 때문에 문화 이전의 실재, 즉 혼돈(混沌)의 상태가 존재함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분류체계에 대한 연구는 이에 대한 깨달음을 그 출발점으로 한다.
이는 장자(莊子)의 언어로 해설될 수 있다. 장자는 문화를 인위(人爲)의 산물이라고 설파한다. 인위란 시비(是非)를 가리는 구분행위를 말한다. 문화가 주장하는 선악(善惡), 미추(美醜), 정사(正邪), 화복(禍福) 등의 개념쌍들은 시비지심(是非之心)의 산물로서, 도의 관점에서 볼 때는 동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자연(自然)을 토막내는 인위적 개념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으며 절대적 관점에서 이를 가지런히 할 수 있다는 것이 제물론(齊物論)의 논리이다.
장자와 상징인류학자들은 동일한 사고의 출발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사유(思惟)는, 문화의 분류체계가 절대적이 아니라는 깨달음에서 출발하며, 그 이전의 신화적인 세계, 분별(分別)이 존재하지 않는 신비주의적(神秘主義的)인 세계에 대한 체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물론 이후의 논리 전개는 확연히 다르다. 장자는 인위(人爲)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강조하였고, 반면에 인류학자들은 인위, 문화, 분류체계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 그 인위를 분석함으로써 세상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2.1 인류학사에 내재한 문제 극복
더글라스가 분류체계를 다루면서 제일 먼저 주력하였던 것은 서구의 개념이 절대화되어 다른 문화를 판단하는 잣대로까지 사용되었던, 당시의 학계의 문제를 시정하고자 한 것이었다. 인류학이 이른바 원시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주술적 사회, 윤리의 부재, 분리 능력의 결여 등 여러 가지 편견이 녹아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이 방면의 선구자였던 로버트슨 스미스까지 소급된다. 스미스는 당대의 분위기에 의해 두 가지 입장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나는 진화론적 입장이었고 하나는 기독교의 우월성을 입증하려고 한 당시 신학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스미스가 원시 종교를 연구한 기본적인 입장은 그 열등함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윤리성 여부로서 종교의 발달을 평가하였다. 그는 주술과 종교를 나누면서 주술은 윤리성이 결여되어 있고 기계적인 원리에 기반하였다하여 종교와 구분하였다. 또한 원시 사회에서는 성스러움과 더러움을 구별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였다. 스미스의 연구는 뒤르켐과 프레이저로 계승된다.
뒤르켐은 탁월한 학자였지만, 종교와 주술의 구분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연구성과를 제약하게 된다. 그는 성스러움이 분리(separation)와 접촉적 전염(contagion)이라는 두 원리를 지닌다는 설명을 제시하였지만 그것을 종교라는 영역에만 한정시킴으로써 원시 종교에 대한 이해에는 실패하였다. 프레이저의 경우에는 그 폐해가 더욱 심각하다. 그는 스미스 이론의 부차적인 측면인 주술 분야를 집중적으로 탐구하였으며, 주술의 윤리성 부재, 주술의 종교 아님 등의 전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또 주술-종교-과학이라는 발전단계를 수립하여 주술을 현대세계와 결정적으로 절연(絶緣)시켰다. 그 잘못된 가정은 지금까지도 지배적으로 남아 있는 형편이다.
서구의 원시사회 연구를 반성해 볼 때, 그것은 서구 문화의 절대적 우위를 보증하기 위해 쌓아올린 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어찌 보면 그것은 서구의 분류체계로 다른 문화를 평가하고 배제하는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편협한 개념으로는 자신의 문화마저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더글라스는 '종교' 속에 함유된 선입관들을 제거함으로써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려고 한다. 주술과 대비되는 종교 개념은 물론이고, '종교는 영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라는 좁은 이해도 거부한다. 그녀는 우리의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현상들을 포괄할 수 있는 범주를 통해 작업을 시작한다. 그래서 굳이 종교라는 개념을 고집하지 않고 깨끗함/더러움이라는 범주를 제안한다.
2.2 깨끗함/더러움 연구의 전제
원시 문화와 현대인의 관념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글라스는 우리의 관념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연구의 출발점을 설정하고 있으며 그 단초가 되는 것은 더러움의 관념이다. 예를 들어, 남이 먹던 침이 질펀한 아이스크림을, 내가 먹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일단 더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왜 그런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대답은 하기 힘들 것이다. 혹자(或者)는 침속에 병균이 있어서 더럽다고 느낄지도 모르나, 그런 경우에 있어서도 대부분은 병균이 어떤 것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이유를 댄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확한 과학적 근거도 없이 그런 생각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사이비 위생학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설득력있는 다음과 같은 반박에 부딪힐 것이다.- "안 죽는다, 먹어라."
더글라스는 더러움의 관념의 인식의 근저에는 위생(hygiene)에 대한 주의와 관습(convention)에 대한 존중이라는 두 가지 관념이 존재한다고 정리한다(Douglas:7). 그러나 더러움에 대한 기존의 태도는 의학적 유물론적 입장에서의 접근이나, 위생과의 관련성을 아예 부정하는 접근 방식이어서 그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었다. 이러한 접근은 초점이 어긋난 것이며, 더러움의 문제는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고찰될 때, 즉 분류체계를 고려할 때 제대로 다루어질 수 있다고 그녀는 제안한다. "오염 행위는 존중되어 온 분류체계에 대해 모순되거나 혼동시키는 사물/생각에 대한 혐오로부터 비롯한다(Douglas:36)".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식의 혼동 속에서 견고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경향성이 있으며 사물을 이 질서에 따라 편입시키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 모습은 니체가 아폴로를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쇼펜하우어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 "끝없이 펼쳐진 채 포효하며 산악같은 파도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광란의 바다 위에서, 하나의 조각배 위에 그 허약한 배를 크게 믿으며 한 뱃사람이 앉아있는 것처럼, 고통의 세계 한가운데에 개개의 인간들은 '개별화의 원리'를 믿고 의지하며 고요히 앉아있다"
그런데 이 분류체계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문화는 공동체의 가치를 표준화하고, 개인들의 경험을 중재한다. 문화는 우선 기본적인 범주와, 생각과 가치가 깔끔하게 정돈되는 적극적인 형태를 제공한다(Douglas:38-9)". 그렇게 제공된 분류체계는 사회 성원의 동의에 의해 끊임없이 강화되어 가는 과정을 거친다.
2.3 깨끗함/성스러움
이상의 논의를 기반으로 해서 더글라스는 자신의 문화의 분류체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모색하며, 서구 문화의 중심에 있는 성서의 해석을 통해 분류체계의 핵심을 짚어 낸다. 그녀가 레위기를 분석하는 것은 그 금기 규정의 이유를 해명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리치가 그녀의 분석을 바탕으로 서구 사회의 일반적 통념을 설득력있게 설명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Leach 1979), 그녀의 작업은 성서를 통해 서구인들의 일반적인 깨끗함/더러움의 관념을 고찰하는 것이다.
첫 번째, 깨끗함의 관념은 분리(set apart)에 근거한다. 성서의 맥락에서 깨끗함은 성스러움(Holiness), 은총(blessing)과 동의어로서, 그것은 신이 정해 준 질서이다. 더 나아가 이 질서를 지킴으로써 신의 보호를 받아 번영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신을 따르는 착함(goodness)이라는 개념 속에는 원래부터 배제의 문법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두 번째, 깨끗함이란 신체적인 완전함(physical perfection)을 의미한다. 그것은 '흠없음', 완전성(wholeness)을 뜻한다. 이는 고대 병영의 청결에 대한 관습에서 잘 나타난다. 그리고 이 관념은 사회적인 맥락에서는 완결(completeness)의 관념으로 나타나, 일의 완수를 강조하게 된다.
세 번째로, 깨끗함이란 신이 창조한 범주를 뚜렷이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레위기의 기피에 대한 규정이 나타내는 바이다. 창세기에서 신은 생물의 활동 영역과 방식을 규정해준다. 가축은 네발 달리고 굽이 갈라진 것이어야 하며, 육해공의 동물은 각각 네발짐승, 비늘 있는 물고기, 두 날개의 새들로 규정된다. 네발 달린 동물은 뛰거나 걸어다녀야 한다. 네발 달린 주제에 날아다니는 놈들, 땅에 사는 주제에 기어다니는 놈들, 물고기도 아닌데 물 속에 사는 놈들은 창조의 질서를 어기는 놈들이어서 불결하고, 먹어서는 안되는 것들이다.
2.4 배설물, 분비물 그리고 포르노
아까 제기하였던 문제, 즉 왜 침은 더러운가라는 문제는 분류체계의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탐구되어야 한다. 즉 깨끗함/더러움의 관념은 경계선의 설정으로 생기는 것이고, 역으로 말해 우리가 더러움을 느끼는 지점에서 그 경계를 발견할 수 있다. 더글라스는 '몸'을 더러움의 외부적 경계(external boundary)라고 지적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리치의 설명으로 대신할 수 있다 : "나의 대변, 나의 오줌, 나의 정액, 나의 땀은 나의 일부인가, 일부가 아닌가? 신체의 구멍은 문에 해당하며, 모든 분비물은 의례적 손상의 부산물처럼 '장소에 맞지 않는 물건'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배설물은 논리적으로 터부의 초점이 된다(Leach 1976:99 ; Leach 1979:158)". 같은 침이라도 입 속에 있는 침을 더럽지 않지만, 그것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더러운 것이 된다. 몸은 깨끗함/더러움의 경계이기 때문에 분비물, 배설물은 대표적인 '더러운 것'들이다.
이러한 설명은 포르노를 보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다. 육체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포르노를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포르노는 '더러워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포르노가 더러운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순진한 의견일지는 몰라도) 포르노의 더러움을 이루는 가장 큰 요소는 빨기(sucking)일 것이다. 정액, 침, 땀, 모유, 정액의 변형인 우유, 이러한 것들이 빨기의 대상이 된다. 앞서 말한 대로 이런 것들은 가장 더러운 것들이고, 이것들을 다시 몸 안에 들인다는 역설을 통해서 포르노는 더러움의 카타르시스를 추구한다. 이는 똥을 먹는 충격적인 제의와 등가(等價)의 의미를 지닌다. 포르노의 제의적인 측면이 이야기될 수 있다면 이러한 측면에서일 것이다. 왜냐하면 더러운 것은 동시에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포르노는 경계 지점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고, 그 지점은 터부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빨기'는 터부의 파괴인 것이다.
3.1 리치의 분류체계 분석
에드먼드 리치의 분석은 더글라스의 생각을 발전시켜서 정교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리치의 분석의 특징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인 도식을 도입하여 분류체계에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설명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이항대립이다. 예를 들어 그는 애완동물을 인간과 동물 사이의 매개적 범주로 설정하고 있다(Leach 1979:161). 그런데 '인간-애완동물-동물'은 도식은 '길들여짐-사냥감-야생'의 도식과 대응한다. 이는 명백히 레비-스트로스의 문명과 자연의 이항 대립적 구도에 따라 분석된 것이다. 또한 더글라스에 의해 삼원 체계로 제시되었던 창세기의 창조질서도 리치에 의해 이항 대립으로 분해되고 있다(Leach 1979:159). 이를 위해 리치는 이항 대립의 중첩(Leach 1976:90)을 사용한다. 즉 새, 길짐승, 물고기는 우선 온혈(溫血)/냉혈(冷血)의 이항 대립에 의해 새, 길짐승/물고기로 일단 나뉘어진 후 그 하위 분화로 새/길질승의 구분이 나타난다. 새로운 매개변수의 도입을 통해 삼분법(三分法)이 중첩된 이항대립으로 전환된 것이다.
한편 리치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경계 지점이다. 이 영역은 더글라스가 가리키는 위험(danger)이라는 영역인데, 리치는 이를 레비-스트로스의 매개항의 개념을 통하여 분석한다. 예를 들어 예수, 모세 등 성서의 주요 인물의 위치는 바로 이 경계 지점으로 분석되고 있다. 또 아브라함, 요셉, 모세에 있어서 황야를 공간적 매개항으로 분석한다(Leach 1985:162).
3.2 리치와 더글라스
리치와 더글라스는 거의 동일한 분석을 전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둘 간의 미묘한 차이점을 지적하려고 한다. 그것은 리치가 레비-스트로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생기는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본질적이기보다는 표현상의 차이점에 해당하는 것이다.
더글라스는 깨끗함/더러움을 이항 대립적인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양자는 동등한 개념이 아니다. 깨끗함이 우선적으로 발생하고, 더러움은 그 부산물로서 발생한다. 분류체계로 지정되는 것은 깨끗함의 범주이며, 더러움은 그것의 잔여 범주로서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더러움은 깨끗함의 범주에 접점을 이루는 경계 부분, 즉 위험이 발생하는 그 부분에 존재하는 것이다. 접점에서 떨어져 바깥 멀리 있는 부분들은 논리적으로는 더러움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인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분석할 이유가 없다. 이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더글라스는 그녀의 책 제목은 '깨끗함과 더러움(Purity and Impurity)'이라고 짓지 않고 '깨끗함과 위험(Purity and Danger)'이라고 지었던 것이다.
리치의 생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표현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그는 종교의 기본 구조를 삶과 죽음의 이항 대립으로 파악하였다(Leach 1979:158, Leach 1976:131). 종교에서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이라는 두 세계의 대립을 기반으로 한다. 종교는 그 경계 영역에 위치한다. 이것은 이항 대립적인 다이어그램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 세상에 한해서이다. 우리가 저 세상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이 세상 안의 저 세상(경계 영역)일 뿐이다. 이 세상 안에 포함되지 않는 저 세상은 가상 영역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굳이 저 세상을 이 세상의 논리적 등가물로서 표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3.3 이항대립적 표현에 대한 문제제기
위에서 이야기된 것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이항 대립으로 표현된 두 범주는 사실 비균질적이다. 깨끗함과 더러움은 동일한 위상을 지니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보아도, P/Q와 P/∼P는 같은 성질의 것일 수 없다. 이항대립이 수여하는 논리적 등가성은 매끄러운 그림을 낳는다. 그러나 그만큼의 오해의 위험이 뒤따른다. 매끈한 도식 속에 숨어 있는 가치의 균질화의 위험을 항상 고려해야 한다. 리치도 이러한 문제점은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커뮤니케이션 대립항이 직접적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경우는 실제로 일어날 수 없다. 우선 마음 속에는 미발달의 형이상학적 관념 A가 생겨난다(Leach 1976:95)".
둘째, 실제로 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한 범주와 그 주변일 뿐이다. 사실 우리의 분석 대상은 깨끗함/더러움이 아니라 깨끗함/위험함인 것이다. 인식되지도 않고 분석 대상도 아닌 것을 구태여 동등한 범주로 설정할 필요는 없다.
내가 문제삼고 싶은 것은 리치의 이해에 레비-스트로스적인 방법론이 너무 깊이 개입하지 않았나하는 것이다. 분명 더글라스의 깨끗함/더러움은 레비-스트로스의 이항대립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도 더글라스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적 이해를 고집한다면 거기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이론적인 측면에서도 이런 위험성은 지적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3분법을 중첩된 이항대립으로 대치할 때 개입된 온혈/냉혈이라는 매개항에 대해서 리치는 설득력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아마 다른 텍스트에서 이 매개항의 도입에 대한 언급이 있었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이론의 매끈함이 이론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경우가 되기 때문이다.
참고도서
Mary Douglas, Purity and Danger
Edmund Leach, 1976, Culture and Communication({문화와 커뮤니케이션})
Edmund Leach, 1979, Anthropological Aspects of Language
Edmund Leach, 1985, Structural Interpretation of Biblical Myth({성서의 구조인류학})
Mary Douglas, Purity and Danger
Edmund Leach, 1976, Culture and Communication({문화와 커뮤니케이션})
Edmund Leach, 1979, Anthropological Aspects of Language
Edmund Leach, 1985, Structural Interpretation of Biblical Myth({성서의 구조인류학})
[오랜만에 더글러스의 책을 다시 읽었다. 그 학설의 논의가 왜 그렇게 이루어지는지 전체 그림이 확실히 들어오고 글의 연결이 분명히 이해가 되지만, 책을 재미있게 읽겠다는 열정은 이제 없이 건조한 메모를 남긴다.]
메리 더글러스는 이른바 원시인들의 의례적 금기와 현대인들의 위생 관념에 있어서 사유 방식이 연속선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 연속성을 어떻게 우리 문화에 잇댈 수 있느냐가 한국에서 그녀의 책을 읽는 중요한 방향이다.
종래 인류학에서 주술을 기계적인 절차의 실행에 따른 결과에 대한 기대로 보았던 잘못을 시정하는 작업, 레위기 음식 금기가 창조 질서의 세계관에 따른 분류에서 벗어난 것들에 적용됨을 밝히는 작업, 그리고 원시인의 주술과 현대 서구인의 기적에 대한 관념을 절묘하게 대칭시키면서 도달하는 것은, 두 사회가 사회적 영역의 분화에 있어서의 차이를 보임에도 불구하고(이 분화의 개념은 뒤르켐의 유기적 연대와 기계적 연대의 구분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과 현대 서구인들이 사고하는 방식이 다르지 않다는 결론이다. 그녀가 인용한 터너의 은뎀부족 주술치료사의 사회적 치료 이야기(70-71), 레비스트로스 책에서 쿠나 주술사의 치유 노래가 작용하는 방식(71-72), 에반스프리차드 연구에서 아잔데 사람들이 운명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방식(90-91) 등의 예들은 그들과 우리의 거리가 상상의 것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들이다. 깨끗함에 대한 관념이라는 공통성은 ‘비교’ 작업의 토대가 된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비교 작업은 영어 단어 "pure/purity"를 새로 다듬는 작업이기도 하다. 영미인의 일상에서 등장하는 관념, 인류학 현지조사 보고서들에서 등장하는 관념, 히브리 성서 사제문서에서 등장하는 관념들이 "pure/purity"라는 단어를 통해 공통적으로 담김을 밝히는 일은, 이 단어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이 책을 읽는 일은, 원시인과 현대 서구인의 연속선상에 서구화된 현대 한국 사람들의 사유와 한국 민간 신앙의 맥락을 함께 놓는 일이다. 메리 더글러스의 조사 대상이었던 아프리카 문화에 상응하는 풍부한 금기 문화를 지닌 우리나라 민간 신앙은 좋은 비교의 대상이 된다. 공통성을 기반으로 다른 문화의 맥락을 넘나든다는 점에서 번역은 필연적으로 비교의 인식을 수반한다. 예를 들어, 레위기에서 'become unclean'라는 표현은 공동번역(그리고 표준새번역에서 계속)에서 ‘부정(不淨) 탄다’로 번역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우리 민간 신앙과의 비교의 인식이 작동한 중요한 변화라고 생각된다. 'purity'의 번역도 중요한 문제일텐데, 성서의 공들인 번역 정결이 무난한 번역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깨끗함’도 버리기 아까운 표현이다. 민간 신앙에서 부정의 반대 개념으로 정(淨)이 아니라 ‘깨끗함’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현대인의 위생적 관념과의 연결이 용이한 이 단어가 지니는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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