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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메모

역경의 절차

by 방가房家 2023. 4. 30.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될 때 산스크리트에서 한문이라는 두 문명의 근간이 되는 언어 사이에서 번역된 과정은 세계 문화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작업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책이 하나 있어 즐겁게 읽고 궁금했던 부분을 메모해 둔다. 하나는 번역 원칙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번역이 이루어졌던 역장(譯場)에서 얼마나 체계적으로 번역이 이루어졌나를 설명한 부분이다. 나는 요즘도 틈틈이 혼자서 앓아가며 번역을 하고 있는데, 현대에 행해지는 이 주먹구구식의 번역에 비해 고대에 행해졌던 이 번역 절차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현장[현장법사]은 후대에 ‘오종불번’(五種不飜)이라고 부르는 번역방식을 사용하였다. 산스크리트어 그대로 음역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5가지 유형의 어휘를 말한다.
(1)다라니와 같은 비밀스러운 어휘는 번역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반야심경>>에 나오는 ‘반야바라밀다 주(呪)’[의 경우]……현장은 이를 중국어로 별도로 번역하지 않고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와 같이 음역하는 데에 그쳤다.
(2)산스크리트어 ‘바가와뜨’와 같이 여러 가지 뜻이 있는 어휘는 번역하지 않는다.……현장은 이 어휘에 다양한 의미의 스펙트럼이 있기 때문에 그중 한가지 뜻만 취하는 일이 없이 안전하게 ‘박가범’(薄伽梵)으로 음역을 하는 데에 그쳤다.
(3)인도에는 있으나 중국에는 없는 사물을 가리키는 어휘는 번역하지 않는다. 한 예를 잠부(jambu) 나무는 중국에 없는 나무이기 때문에 이는 ‘염부수’(閻浮樹)로 음역하였다.
(4)이전 시기에 음역을 하여 이미 관용어로 굳어진 어휘는 따로 번역하지 않는다. 한 예로 ‘위없는 깨달음’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어휘 ‘아눗따라보디’는 현장 이전에 ‘아뇩보리’(阿耨菩提)로 음역되어 이미 관용적으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어휘는 따로 번역하지 않고 기존의 전승돼온 음역을 그대로 차용하였다.
(5)산스크리트 원어에 워낙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경우 이러한 어휘는 번역하지 않는다. 한 예로 산스크리트어 ‘쁘라즈냐’는 ‘지혜’(知慧)로 한역되곤 하지만 ‘반야지’(般若智)를 뜻할 때처럼 중국어 ‘지혜’보다 차원이 높은 의미영역이 별도로 있기 때문에 ‘반야’(般若)로 음역하는 데에 그쳤다.
이종철, <<중국 불경의 탄생: 인도 불경의 번역과 두 문화의 만남>>(창비, 2008), 30-31.
 
<<송고승전>>이나 <<불조통기>>의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 시대 역장(譯場)은 10개 부서로 이루어진다.
(1)역주(譯註): 산스크리트어 사본을 읽으며 번역, 강해
(2)증의(證義): 번역문의 타당성 검토
(3)증문(證文): 사본을 제대로 읽었는가를 검토
(4)서자(書字): 역주가 중국어를 몰라 번역을 못한 부분이 있을 때 이를 원문 그대로 중국어로 음사. 역주가 중국어에 능숙할 때는 불필요.
(5)필수(筆受): 산스크리트 음역을 의역으로 고치는 등 번역문 교정
(6)참역(參譯): 번역문을 다시 산스크리트어로 고쳐본 뒤 산스크리트어 원문과 맞는지 대조함으로써 번역문의 타당성 재검토
(7)간정(刊定): 길거나 중복되는 번역문을 간결한 문장으로 교정
(8)윤문(潤文): 윤문 작업
(9)범패(梵唄): 번역문을 낭독하기 좋도록 교정
(10)감호대사(監護大使): 번역작업을 보호하는 고급관리. 번역이 끝난 후 황제에게 번역본을 진상
이종철, <<중국 불경의 탄생: 인도 불경의 번역과 두 문화의 만남>>(창비, 2008),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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