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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메모

그들을 연구하듯이 우리를 연구하는 것

by 방가房家 2023. 4. 26.

학계에서 솔직한 글을 만나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그것은 ‘예의 없음’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런 글에서 좋은 느낌을 받는다. 그것이 내 생각과는 반대일지라도.

세속적인 현대 미국 대학에서 가장 서글픈 사실은 성서에 관한 표준 강좌들이 커리큘럼 중에서 가장 형편없으며 게다가 썩어가는 중이라는 점이다. 무수히 많은 학생들이 대학에서 성서를 공부함으로써 오히려 신앙을 잃어버린다. 이는 대학의 성서 학자들이 근대 대학에서 확립된 ‘역사비평’ 방법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인데, 성서연구에 대한 이러한 접근법은 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주의에 연원을 두고 있다.
……
대학의 성서 비판가들은 자신들의 방법으로 무장한 채, 수세기에 걸친 기독교 교회의 ‘그릇된 해석’을 단죄하곤 했다.……역사적 비판가들은 처음으로 성서 텍스트의 권위를 거부하고 그 대신에 그것이 서로 경쟁하는 정치적 세력의 산물이라 이해했으니 우리는 그들을 ‘해체주의자’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성서 텍스트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고도로 사변적인(그리고 더러는 환상적인) 고찰을 제시하면서도, 이 비판자들은 수세기에 걸친 전통 속에서 신자들 사이에서 정전이 된 텍스트를 수용하고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쓸모있는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다.
(마크 C. 헨리, 강유원 외 편역, <<인문학 스터디>> (라티오, 2009, 142-43)

고전학을 공부하시는 분들의 똥고집이 느껴지는 책이다. 문학 분야에서 포스트모던 비평을 쓰레기 취급하는 데서부터 느껴지던 것이었지만, 신학 분야에 와서는 정도가 더 심해진다.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에 대한 적의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는 십분 이해가 가지만 대학이 신앙심을 지켜주기 위한 곳이 아니고, 더구나 성서 독서의 목적을 신앙심 함양으로 못박지 않는 한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미국 대학에서만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새겨들을 만한 부분은 ‘신자들이 성서 텍스트를 어떻게 수용하고 해석하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없다는 비판이다. 사실 새로운 학문적 성과를 등에 업은 성서 비평가가 “성서의 진짜 의미를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특히 신약학 분야에서) 새로운 성서 해석이 종교 전체의 판도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편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쩐지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에만 매진하는 연구는 ‘텍스트가 신자들에게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은 이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나는 그것(무언가 가르쳐주려는 태도)이 신학적인 연구가 갖는 성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기도 한다.

신학을 시작하는 올바른 방법은 신앙에서 시작하는 것이지 신앙이 아닌 것, 즉 ‘믿지 않음’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 대학에서는 ‘믿지 않음’에서 신학 연구를 시작한다. 그러한 대학 강좌는 아마존 유역을 따라 거주하는 석기시대의 부족이 지난 관습과 믿음체계를 검토하듯이 기독교도들의 관습과 믿음 체계를 탐구한다. 이렇게 인류학적인 방법으로 기독교도의 예배를 해석하는 것은 지성에 관한 역사라기보다는 사회사의 일종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신학이 아니다.(149)

이것은 신학이 아니다……. 틀린 말도 아니고 객관적인 진술처럼 보이지만, 거기엔 당연히 가치평가가 들어있다. 아마존에 사는 원주민이 ‘석기시대 사람’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판단은 19세기 사회진화론의 잔존물(survival)이라고 치자. 핵심이 되는 것은 그들을 연구하듯이 기독교를 연구한다는 것에 대한 몸서리침이다. 이것이 지난 백여년간 종교학에 대한 반발의 핵심에 있는 감정이고, 지금도 서구 사회에 잔존해 있는(그리고 기독교를 통해서 우리나라에서 수입되고 있는)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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