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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얻어배우는 것

한국인의 종교 경험

by 방가房家 2023. 4. 19.

어제 하루만에 광주에 갔다왔다. 전남대에서 열린 한국종교학회(http://www.kahr21.org)에 참석하였는데, 주제 발표인 차옥숭 선생님의 “종교경험과 종교연구”는 참으로 아름다운 발표였다. 얼핏 보면 거의 종교인들과의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는 이 논문은 그저 “해석 이전”의 자료들의 나열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문에서 그런 오해의 잘못이 여지없이 지적된다: “종교 경험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이미 체험 그 자체가 아니며, 그 체험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언어로 표현해낸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언어화된 형태로 갖고 있는 자료는 이미 해석이다. 학자들이 생각하는 해석은 사실 해석된 것을 다시 해석하는 일이다.
손수 인터뷰한 내용들에서, 한국 사람들이 어떠한 구체적 삶 속에서 자신의 종교 경험을 해석하고 표현하는지가 참으로 생생하게 표현된다. 이론적인 공부 속에만 있던 내게는 눈이 번쩍 뜨이는 소중한 공부였다. 그 사례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겠고, 결론의 일부만 여기 베껴 놓는다. 다음의 인용문은, 근대의 한국인들의 종교적 삶이 우리의 어려운 처지를 극복하고 함께 살아나가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하였다. 이들의 종교적 삶을 놓고 기복주의라고 매도할 수 있을까? 그건 학자들이 흔히 행하는 언어폭력에 불과하다.

“남에게 베풀고 난 후에 얻는 기쁨은 천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지요”라고 말하는 어느 무당을 대하면서, 중추신경협착증에 걸려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난 후 부모 없는 아이들을 기르면서 얻는 기쁨이 너무 커서 “고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기쁨 속에 고통이 감추어지는 것 같아요. 그 고통 속에서 나는 개인적인 욕망이나 욕심을 완전히 버릴 수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고통은 하느님의 축복이었어요”라고 고백하는 어느 가톨릭 신자의 모습 속에서, 그리고 밤늦게 찾아간 나에게 “도(道)요? 콩 한쪽이라도 나누어 먹는 것이 도요, 도의 실천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오.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바로 도의 실천이라오”라고 쩌렁쩌렁하게 말하던 89세의 증산교 할머니의 고백에서, 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조그마한 조약돌로 필요한 곳에 쓰이다가 대생명 속에 하나가 되겠다는 원불교인의 고백 속에서 필자는 나를 온전히 내어주는 삶, 나의 기운을 청정하게 하여 모든 생명과 소통하고 화해하는, 그래서 모든 생명이 밝고 맑은 청정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진정한 종교인의 모습을 본다.

사실 차선생님은 5년 전부터 [한국인의 종교경험]이라는 시리즈를 차례차례 출판해오셨다. 우리집 책장에도 한 권 꽂혀 있는데, 게으름으로 펴보지 않았다. 이제야 그 작업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나 할까. 1년 밖에 나간 것 갖고 얘기하는 게 좀 쑥스럽지만, 사실 지금의 미국 종교학계에서도 종교인의 구체적인 일상을 기술하면서 종교경험을 정교하게 구성하는 것이 중요한 흐름이다. 그 대표적인 저작이 [맘마 롤라]라는 책이다. 한 부두교 여성 사제 맘마 롤라의 삶을 밀착 취재하여 엮은 이 책이 최근의 연구 흐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저작이다(라고 알고 있다).
나 개인적으로 한국의 근대를 남들에게 설명해주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종교인들의 체험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면 정말 다른 차원의 이해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배고픔이 입신의 주요한 배경이 된 무당의 이야기, 일본 징용병들의 한을 푸는 진혼굿을 했던 무당이 이야기 한 소절 들려주는 것만큼, 한국 근대사가 한국인의 의식에 남긴 흔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이 또 있을까?

한국인의 종교 경험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한아름 안고 돌아가게 생겼다.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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