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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얻어배우는 것

'천도'와 기독교

by 방가房家 2023. 4. 25.

며칠 전 참석한 포럼에서 와타나베 교수의 발표 중 메이지 시대 지식인의 재미있는 입장을 소개한 것이 있어 간략히 옮겨놓는다. (한편 와타나베 교수는 답변하는 도중에 동아시아인들이 동도(東道)를 이야기한 순간, 그것은 유교에서 이야기하는 보편적인 도(道)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좋은 가르침이었다.)

1. 메이지 초기 일본 지식인들 중 일부는 기독교가 ‘문명개화,’ ‘문명,’ ‘개화,' 즉 ’civilization'의 일부를 이룬다고 생각했다.
2. 나카무라 마사나오는 “우리나라 인민으로 하여금 그 성질을 개조하게 하여 구미 제국의 인민의 고등한 수준과 같게‘ 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기독교의 보급을 주장한다. 현재 구미 번영의 근간은 기독교이며 따라서 우선 천황이 세례를 받아 친히 교회의 주(主)가 되어 인민에게 솔선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3. 나카무라 마사나오는 1874년 감리교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동시에 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기독교를 보편적인 ‘천도(天道)’의 가르침으로 이해하였다. 그가 간행한 중국의 기독교 전도서 <<천도소원>>(天道遡源)의 서두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도의 큰 근원(道之大源)은 하늘(天)에서 나온다. 하늘이란 우주의 대주재, 진신(眞神)이다. 유교와 기독교는 그 도의 넓고 좁음의 차이는 있지만 옳고 그름의 차이는 없다. 어찌 양자가 거스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4. 후쿠자와 유키치도 ‘천도’의 실재를 믿어 “천도는 만인을 돕는다”고 단언한다.(<<福翁百話>>, 1896) “불교든 예수교든 상관없다. 이를 북돋워 다수의 민심을 누그러뜨려야 한다.”
5. 이들은 본래 유교를 배운 자들로서 인류 모두에게 보편타당한 ‘천도’, ‘천리’의 실재를 믿고 그것이 도덕과 질서의 기초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서양에 있어서도 당연히 그것이 ‘문명’의 근간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것이 서양에서는 기독교라는 모습을 하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교(敎)란 모두 보편적인 천조의 도덕을 널리 알리는 것임에 틀림없다.
문명(文明)이란 본래 유교의 말이다. ‘도’가 행해지고 ‘덕’이 실현되어 빛나는 모습이다. ‘civilization’을 ‘문명’이라고 번역했을 때 이미 그와 같은 이해가 전제되어 있었다. 쓰다 마미치도 “각자가 도리에 명달한 상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문명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와타나베 히로시, <‘문명개화’와 ‘천도’> (UT-SNU Forum 발표문))
 

위의 일본 지식인들은 합치되는 입장에서 기독교를 파악한 것인데, 이러한 입장은 우리나라 개화기 지식인들, 특히 기독교를 받아들인 인사들이 가졌던 입장과 거의 같다.


기독교를 전하는 일이 문명을 전하는 것인가? 이것은 초기 선교 역사에서부터 중요한 쟁점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William R. Hutchison, <<Errand to the World>>(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의 1장 "'Civilizing': From Necessity to Virtue"에 잘 정리되어 있다. 기독교를 문명과 일치시키는 입장과 문명으로부터 기독교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입장이 공존해왔고, 선교사에게는 두 극단 사이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하는 것이 언제나 요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천도(天道)의 하나로 기독교를 이해한 것도 한국 종교사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고, 그래서 많은 비교 거리를 남긴다. 예를 들어, 수운 최제우가 이해한 서학도 그러하다. 유명한 언급들을 보면,
“내가 하는 바 도는 천도(天道)요, 동에서 낳아서 동에서 학을 이루었으니 동학이라면 오히려 가하려니와 서학이라 함은 가하지 않다.”

이것은 심문받는 과정에서 동학이 서학과 다름을 이야기한 것이다. 다름을 이야기한 것에도 불구하고 천도라는 공통된 범주 안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동경대전>>에서 동학과 서학의 차이를 분명히 한 부분에서도 그러하다.
서학과 우리의 학은 같은 듯하나 다름이 있으니, 비는 듯하나 성실함이 없다. 그러하니 운(運)은 하나이고 도(道)는 같지만 리(理)는 다르다. 우리 도는 스스로 화하여 이루어지며, 그 마음을 지키고 그 기운을 바르게 하며, 그 성품을 따르고 그 가르침을 받아 스스로 됨 가운데에서 나온다. 서양인의 말에는 순서가 없고 글에 옳고 그름의 구별이 없고, 한울님을 위하는 단초가 없으며, 단지 자신의 몸을 위한 계책만을 축원할 뿐이니, 그들의 몸에는 기화(氣化)의 신령함이 없고 학문에는 한울님의 가르침이 없다.

최초의 개신교 신학자라고 불리는 최병헌이 기독교를 진리로서 위치시키는 데 동원된 수사도 비슷한 면이 있다. “하늘에 동양 하늘, 서양 하늘이 없이 하나의 하늘이듯 진리에도 동양 진리와 서양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일 뿐이다.”라는 논리로 기독교 변증을 시작한다. 물론 기독교를 내세우려는 의도를 갖고 하는 이야기이지만 기본 전제로 설정된 부분에 눈길이 간다.
“도라 하는 것이 근본 하나요 둘이 없으니, 우리가 무슨 교를 하든지 사욕을 막고 천리를 잇게 하며 악한 것을 징계하고 착한 것을 권면하여 독실히 행하면 거룩한 지경에 이를지라. 하필 왈 공자교니 예수교니 부처교니 분별할 것이 무엇이뇨.” (최병헌, “삼인문답,”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900년 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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