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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잡기

종교학의 천국

by 방가房家 2023. 4. 18.

(2004.10.1)

화창한 캠퍼스의 오후, 어느 녀석이 퍼질러 앉아 낯익은 책을 읽고 있다. 엘리아데의 [성과 속]이다. 호, 제법인데... 얼마 후 전산실에서 옆의 애가 프리젠테이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곁눈질로 보았는데 역시 엘리아데의 [성과 속]의 개요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여기저기서 종교학 공부에 여념이 없군... 공연히 뿌듯해진다. 종교학 세상에나 온 기분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종교학을 접했으면 하는 것, 평소에 많이 하던 생각이다. 그래서 한때는 고등학교에서 종교학을 가르치는 일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많은 고등학교에 있는 “종교” 시간에, 의석이를 굶기는 교리교육 말고 인간을 이해하는 수단으로서 종교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면 어떨까 하는 달콤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종교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공부하는 것이 이런 것이고 이래서 좋은 거라는 이야기를 남에게 자주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버릇이 들어 (내 성격과는 맞지 않게) 내가 하는 걸 자랑하고 권하는 전도사 스타일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 책 정말 좋은 것 같아요, 한 번 읽어봐요. 세미나라도 같이 할까요?” “애리조나 날씨 정말 좋아요. 꼭 한 번 와보세요.” 그리고 요즘같으면 “블로그 이거 괜찮아요. 한번 해보세요.” 이런 식이다. 주변 사람들을 꼬시는 일이 잦고, 사실 그 꼬심의 힘이 꽤 된다고 자부한다. 그런 일들이 종교학을 공부한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 블로그질을 하는 것에도 사람들을 종교학으로 꼬시는 저의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확히 표현하면 그것은 저의라기보다는 버릇이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학교를 바라본다면, 확실히 이 곳은 예외적일 정도로 종교학의 천국이다. 일단 전제되어야 할 것은 미국에서 종교학이라는 학문은 한국보다 훨씬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립대와 사립대마다 주요 학과로 설치되어 있고 중요한 교양 과목으로 개설되어 있다. 한국에서 종교학 하면, “그런 과도 있어요?”가 흔히 듣는 질문이지만 미국에서는 적어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편을 감안하더라도, 우리 학교 종교학과의 비중은 이상할 정도로 크다. 철학이나 사회학같은 주요 학과보다도 규모가 크다.
최근 십 년 사이에 우리학교 종교학과 교수는, 열 명 남짓에서부터 이십 명이 넘는 숫자로 미친 듯이 늘어났다. 현재 21명의 교수가 있는데 올해 또 채용 공고를 내었다. 이 숫자는 내가 알기로 미국 전역에서 1,2등을 다투는 수치이다. 한국에 있는 모든 종교학과들(서강대, 서울대, 한신대, 가톨릭대)에 있는 (종교학하는) 교수들을 다 모은다면 20명이 조금 덜 될 것이다. 미국의 한 주립대가 한국 전체를 능가하는 교수를 보유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21명이라는 숫자는 참 어마어마하다.
애리조나 주립대학에는 5만 7천여명의 학생이 등록해 있다. 미국 전역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라고 한다. 아마 학부생의 5만이 넘지 않을까 싶다. 통계에 따르면 이 학생들 중 3분의 1 이상이 종교학과 개설과목을 수강하고 졸업한다고 한다. 종교학이 교양과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 과연 이번 학기에 우리과에서 개설된 과목을 세어보니 98개이다. 대부분은 학부과목이고, 그 중에는 내가 지금 TA를 하고 있는 과목처럼 400명짜리 대형강의들도 꽤 있다. 21명의 교수 외에도 35명 이상의 강사들이 장기 계약이 되어 있고 이들이 투입되어 이 엄청난 양의 강의를 소화하고 있다. 이 곳에선 참 많은 사람들이 종교학을 가르치고 또 배운다. 확실히 예외적이다. 미국 사막 한가운데 종교학의 낙원이 건설되어 있다.

** 좀 자제하려고 했는데, 한마디 마저 덧붙인다. 학문 세계에서도 “쪽수가 힘이다”라는 말이 진실로 통용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대학원에서 장래가 불투명한 것을 잘 알면서도 대학원생들을 뽑을 수 있는 만큼 많이 뽑는 것은 바로 쪽수를 확보해야지 학문이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뽑아놓으면 죽이되든 밥이되든 과의 입장에서는 손해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 쪽수의 논리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기회가 또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게 내가 이 글에서 쪽수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의 한 이유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학의 저변을 넓히고 싶다는 개인적인 바램과 쪽수의 냉혹한 논리가 이 글에서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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