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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_자료/문헌

[번역] 타일러의 애니미즘 논의중에서 1

by 방가房家 2023. 4. 16.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의 <<원시 문화Primitive Culture>>를 직접 읽은 전공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인류학에서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두 권의 책 중에서 나한테 꼭 필요한 부분(애니미즘 논의가 시작되는 11장)만 골라 읽었으니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번에 이 부분만 읽으면서도 고전이 지닌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종교학사에서 타일러라고 하면 원시인 철학자에 대한 상상의 논의를 갖고 애니미즘을 제시한 종교진화론자 정도로 알고 넘어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19세기의 여러 자료들을 대하다가 타일러의 글을 접하니까 비로소 그가 당대의 핵심적인 지적 의제를 제시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읽은 부분의 일부를 꾸역꾸역 번역한 이유는 감동(!)을 받은 대목들이 있어서인데, 앞부분에서 그런 대목을 짚으면 다음과 같다.
-그의 종교 논의는 비서구 세계 사람들에게 ‘종교가 없다’고 말하는 자료들에 대한 반론에서 시작된다! 종교 없음에서 종교 있음으로 전환하는 것이 종교학 논의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이보다 명확하게 보여줄 수 없다.
-그는 종교 없음을 말하는 자료들의 불충분함을 지적한다. 서술이 일관되지 못하다는 것, 대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로 지적되지만, 무엇보다도 기독교 관찰자들이 ‘자신과 같지 않음’을 ‘없음’으로 서술하였다는 것을 잘 지적한다.

 

Edward B. Tylor, <<Primitive Culture: Researches into the Development of Mythology, Philosophy, Religion, Art, and Custom>> (London: John Murray, 1871), 1: 377-83.

 
도대체 종교 개념을 갖지 않을 정도로 낮은 수준의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부족이 존재할까, 아니 존재했을까? 이것은 실제적으로 종교의 보편성에 대한 물음이다. 오랜 기간 동안 사람들은 종교의 보편성을 긍정하거나 부정해왔다. 긍정하는 의견이나 부정하는 의견 모두 불충분한 자료에 근거를 둔 것이었지만, 그 사실과는 대조적으로 양쪽의 주장은 확신에 찬 것이었다. 문명화를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연속적으로 상승하는 것으로 보면서 문명화를 설명하는 발달 이론을 추구하는 민족지학자라면, 아무 종교도 없는 부족에 대한 설명들에 특별히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 설명들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되는 바에 따르면, 조상들에게 종교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종교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이후 종교적 조건이 생겨나는 모태가 되는, 인류의 종교이전 상태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서부터 종교 발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는 것은 권할만한 게 못되는 것 같다. 이론적으로는 안성맞춤인 자리가 편리하게 마련되어 있을지는 몰라도, 그 곳을 채울 현실의 자료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는 언어가 없는 부족이나 불을 사용하지 않는 부족이 있다는 주장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사태의 속성상 그런 부족이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할만한 것은 없지만, 현실에서 그런 부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 없는 야만 부족이 실제로 있다는 주장은, 이론적으로 가능하고 또 실제로 그럴 수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증거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일반적인 표현상으로는 어떤 야만 민족에 종교 현상이 부재하다고 주장하는 저자가, 사실은 그의 표현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스스로 내보이는 일이 적지 않게 일어난다. [두 쪽에 걸쳐 사례들이 나열된다(378-79)]
이런 사례들은 넓은 의미의 단어를 좁은 의미로 사용하는 중에 의미의 폭과 일반성에 대한 판단이 얼마나 기만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랭Lang, 모팻Moffat, 아자라Azara는 민족지학자들이 방문 부족들에 대한 유의미한 지식을 얻는 데 도움을 받은 저자들이긴 하지만, 고등한 민족의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신학이 결여된 것을 절대 종교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교리가 자신과 같지 않은 부족에 종교 없음의 속성을 부여하였다. 이것은 신학자들이 자신과는 다른 신격을 가진 사람들에 무신론이라는 속성을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도에 침입한 고대 아리아인들이 인도 토착 부족을 아데바adeva 즉 ‘신이 없다’고 묘사했던 시기부터 시작해서, 그리스인들은 이에 해당되는 단어 아테오이άΘεοι를 고대 신들을 믿지 않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갖다 붙였다. 비교적 현대에는 마법과 사도전승을 믿지 않는 이들이 무신론자라고 비난을 받았으며, 오늘날의 논쟁에서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종의 진화 이론을 옹호하는 자연주의자들이 무신론의 의견을 갖고 있다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것들은 사실 신학적 문제에 대한 공정한 판단이 왜곡되는 일반적 경향의 한 예일 뿐이다. 그 결과 중 하나는, 높은 수준의 관점을 지닌 연구자들에게는 놀랄 일이지만, 하등한 민족의 종교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잘못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어떤 선교사들은 그들이 선교하는 원시인들의 심성을 철저하게 이해하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크란츠, 도브리초퍼, 샤를부아, 엘리스, 하디, 칼라웨이, 윌슨, 윌리엄스와 같은 사람들은 종교적 믿음의 낮은 단계에 대한 탁월한 지식들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 세계”는 선교 지도에 까맣게 칠해진 지구 대부분의 지역에 살고 있는 이교도들의 믿음을 경멸하고 비난하는데 급급하여 그들을 이해할 시간이나 여력이 남아있지 않다. 이러한 사람들이 낮은 단계 종교의 속성이나 의미를 이해하려고 공정하게 노력하는 사람들과 같을 수 없다. [*약간 지루하게 전개되는 논의 전개를 생략하였음(380-81)] 인류의 종교 어느 것도 다른 종교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현대 기독교 사상과 원리들 역시 멀리 기독교 이전 시대를 지나 인류 문명의 기원, 어쩌면 인간 존재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얻을 수 있는 지적인 단서들에 좌우되는 것이다. 
원시인의 종교들을 연구할 충분한 기회를 가진 관찰자는 눈으로 본 사실들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에 기반을 둔 판단을 내리지도 않은 사람들의 성급한 부정否定은 별로 가치가 없다. 16세기 여행자가 남긴 플로리다 원주민에 대한 설명이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우리가 발견한 이 민족의 종교에 대해 가볍게 언급하겠다. 그들에게 언어가 없었을 뿐더러, 우리는 몸짓이나 기호로도 그들에게 종교나 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우리는 그들이게 종교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플로리다 사람들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면, 그들에게 종교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더 나은 앎은 마찬가지로 다른 많은 성급한 단정들도 뒤집어 놓았다. [*이하 세 쪽에 걸쳐 사례들이 나열된다(38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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