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카스 광고를 보다보면 마음이 훈훈해질 때도 있지만 가끔은 마음이 답답해질 때도 있다. 10여 년 전에 “젊음, 지킬 것은 지킨다”라는 카피로 박카스 광고가 사회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한 젊은 남녀가 죽어라고 뛰는 광고였다. 뛰어가는 애들 머리 위로 “딴 건 다 괜찮은데 귀가시간은 지켜야지.”라는 아버님이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 아이 집에 겨우 도착해서 땀을 닦는 이들을 보여주며 “젊음, 지킬 것은 지킨다”라는 카피가 등장한다. 내가 느낀 것은 기성세대에 대한 순응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는 답답함이었다. 이처럼 세련된 방식으로 기성세대의 명령을 전달한다면 그에 대한 반항도 누그러질 수밖에 없는 법. 그런 의미에서 이 광고는 건전한 젊음이라는 미명하에 세대간 갈등 해소에도 도움을 주는 훈훈한 광고이면서도, 내게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광고였다. 선악을 떠나 잘 만든 광고이기에 사회적 반향도 꽤 있었으리라.
(동영상 출처: http://ad.donga.co.kr)
그 다음에 만난 박카스 광고(2000년)의 '해악'은 이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힘든 운동을 마치고 집에 가는 두 청년, 한 친구가 지하철 노약자석의 비어있는 자리에 앉으려 하자 옆의 친구가 이를 제지한다. 우리는 젊으니까... 라는 몸짓을 주고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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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광고를 볼 때 대단한 위험성을 감지했고, 이후의 지하철 문화는 정확하게 내가 감지한 불길한 방향으로 정착되었다. 이제 지하철 양 편의 세 좌석은 ‘노약자를 위해 양보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노인들을 위해 비워두어야 하는’, 건드려서는 안 되는 자리가 되었다. 이러한 인식이 형성된 것을 단순히 광고 하나로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이것에 박카스 광고가 일조한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지하철의 자리양보는 예절의 영역에서 벗어났다. 그것은 이제 율법이 되었다. 이젠 그것을 그저 미풍양속이라고 부를 수 없다. 더 나아가 그것은 터부라고 해도 무방한 단계에 이르렀다. 자리를 비워두어야 한다는 준칙에서 더 나아가, 어느덧 우리들 마음 속에는 그 자리를 건드리기만 해도 큰 일이 날 것만 같은 강박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그 자리를 건드렸다는 이유만으로 겪은 안 좋은 직간접적인 경험들이 무의식에 자리 잡게 되어서 그것을 쳐다보는 것조차 찝찝한, 금지된 영역이 형성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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