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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_자료/영상

"브레이킹 더 웨이브"와 베스의 종교

by 방가房家 2023. 4. 14.

<브레이킹 더 웨이브>는 탁월한 종교영화라고 생각한다. 한 개신교 교회를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종교라는 것이 한 개인에게서 어떤 식으로 의미화되는지를 무서울 정도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신정론이라는 단어를 자꾸 떠올리게 된다.

이 영화는 베스라는 한 여인이 남편이 불구가 되는 사고를 당하고 나서, 남편이 바라는 대로 여러 가지 성적인 방종을 펼치다가 나중에는 극단적인 창녀일까지 하게 되고 마을 사람들의 외면 끝에 결국은 죽게 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이다.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는, 영화를 외면하고 싶은 유혹이 들 정도로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강렬한 어처구니없음이었다.

그러데 그 어처구니없음이 베스의 내면에서는 하느님의 뜻으로 철저히 의미화되어, 정합성을 갖는 행위들의 연쇄로, 다른 말로 정당한 행위들로 수행되었다. 다른 사람들에는 말이 안되는 그 이야기가, 베스의 내면에서는 말이 되는 것이었다. 영화는 베스의 내면에서 그 의미체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철저하게 그리고 있다. 그 “의미 체계”를 나는 종교라고 생각하며(그것은 분명 추상적인 “기독교”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이 영화를 종교영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영화의 중심축은 베스의 기도이다. 베스는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혼자 앉아 하느님과 대화를 하는 기도를 한다. 이 대화의 내용은 전형적인 신정론적인 물음과 답변이다. “하느님 어디 계셔요?”라고 찾고 나서는, “왜 제 남편에게 이런 일이 생겼나요?”라고 눈을 치켜 뜨고 위를 향해 물어본다. 조금 있다 베스는 눈을 내리깔고 근엄한 목소리로 하느님을 흉내내며 “그건 네가 저번에 남편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무리하게 기도했기 때문이지.”(남편이 반신불수가 되어 베스 마을의 병원으로 돌아오게 된 것을 말함)라고 대답한다. 이런 식의 문답을 통해 베스는 자신에게 생긴 시련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을 듣고, 앞으로 무엇을 해나가야 할지에 대한 확신을 찾아나간다. 이런 식의 기도가 영화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영화에 익숙한 이들은 이걸 내러티브를 진행하기 위한 장치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관점에서 보면 영화의 진행이 이 기도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기도의 역할은 중심적이다. 이 기도를 통해 형성되는 베스의 내적 의미의 정합성과,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외부의 시선의 충돌이 이 영화의 중심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배우 에밀리 왓슨의 섬뜩한 베스 연기도 한 몫을 한다. 천진한, 그러면서도 뚝심이 강한 여인의 기도, 눈을 치켜올렸다 내리까는 그 동작들에 진정함이 배어들게 하는 그 연기는, 참 무섭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베스의 기이한 행동들은 철저히 기도들을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영화 도처의 결정적인 장면들에 위와 같은 기도들이 삽입된다. 마지막 죽기 전 질 나쁜 선박으로 창녀일을 하러가는 무모한 일을 벌일 때에도, 베스는 “하느님 계세요?”라고 울부짖듯이 기도한다. 그리고는 한참 후에 “여기있다”라는 답을 받아낸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물음과 답변을 통해 의미를 찾아나가는 과정은 나에게 신정론이라는 논의를, 그리고 종교 일반의 성격을 상기시켜준다. 이 영화는 이 의미화과정의 묘사에 정말 탁월하다.
베스의 행위는 “희생”이라는 추상적 언어의 구체화 과정이며, 결국은 구원론적인 의미로 귀결된다. 베스는 죽고, 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반신불수였던 남편은 기적적으로 회복하여 잘 걸어다닌다. 베스를 지옥에 가라고 선포하는 마을 교회의 장례식에서 몰래 시신을 빼와서, 남편과 그 친구들이 행하는 그들만의 장례식이 행해질 때, 하늘에서는 종이 울리는 환상적인 소리가 들려온다. 베스의 죽음이 한 미친 여자의 죽음이 아니라 의미있는 죽음이라는 암시를 해주는 장면이다. 주변 사람들도 감화를 받는다. 그녀를 설득해 보려고 노력했던 의사는 최후 진술에서 그녀는 미친 게 아니라 “선”(good)을 위해 죽은 것이라는 자기 견해를 잠시 피력한다.

관객들은 아마 이런 식의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래서, 베스의 미친 짓들이 잘한 짓이라는 얘기인가? 남편이 나은 것은 베스의 희생 때문이고 그래서 잘 죽었다는 건가?” 궁금한 질문들이기는 하지만 그런 것들이 영화가 해명하고자 하는 핵심은 아닐 것이다. 종소리나 남편의 소생을 보여주기 때문에, 감독이 그런 결론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감독은 그런 식의 결론에 분명히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런 장면들은 영화가 줄곧 베스의 시선을 따라서 구성되기 때문에 삽입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특이한 구성을 취하는데, 영화 전체가 마치 책처럼 10개의 장(Chapter)으로 구성되고 심지어 마지막엔 에필로그까지 있다. 장이 시작될 때마다 감독은 팝의 명곡들을 꽤 오랫동안(거의 10초?) 들려준다. 모든 노래들이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특히 인상적이었던 두 곡이 있다. 3장(2장?) 마지막 부분에서 베스는 위에서 언급한 기도를 한다. 남편이 왜 큰 부상을 당한 채 자기 곁으로 돌아왔는지를 하느님께 묻고, 자신의 과욕 때문이라는 “왜”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을 들은, 결정적인 기도 장면 말이다. 기도가 끝나고 그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감독이 삽입한 노래는 지금 들리는 Procol Harum의 “The Whiter Shade of Pale”이다. 그런데 하필 노래는 중간 부분의 딱 다음 가사를 들려준다.
She said there is no reason
And the truth is plain to see

이유가 없다니, 베스가 들으면 맥빠질 노래이다. 영화의 마지막 에필로그에 삽입된 노래도 인상적이다. 엘튼 존의 “Your Song”의 앞부분인데, 가사의 첫 소절은 “It's a little bit funny.”이다. ‘지금까지 이야기, 좀 황당하지 않았어?’라고 묻는 투의 노래처럼 들린다. 물론 이런 노래들이 스토리를 부정하는 감독의 숨겨진 의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감독은 이런 노래들의 삽입을 통해 거리를 만들고 그럼으로써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만들어주고 있다. 영화는 베스의 시선을 통해 전개되지만, 보는 이들이 꼭 그걸 따라가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말이다.
베스의 일련의 행동은 베스의 세계, 즉 그녀의 종교의 결과물이다. 영화는 베스의 종교가 어떻게 형성되어 어떻게 귀결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종교 일반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베스의 내적 세계는 아름답다. 숭고한 희생 정신의 점철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아름답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을 말함은 결코 아니다. 의미체계 내적인 완결성과 그 의미체계 외부에서의 부조화. 이 차이가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종교의 문제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종교사회학 용어로 인지 부조화라고 일컫는 이 문제는, 종교의 사회적 현존을 이야기할 때 많이 논의되는 부분이다. 신종교 신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지만, 신종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단지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베스 종교의 내적 완결성을 인정하고 묘사하는 것이 꼭 베스의 행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가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의미체계인지를 잘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그것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에서 실재(reality)인지를 잘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나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를 훌륭한 종교 영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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