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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만남

천주교와 개신교의 충돌

by 방가房家 2007. 5. 31.
한국에서 천주교와 개신교는 초창기부터 대립의 모습을 보였다. 다음 자료들은 양 쪽에서 서로의 교리와 실천을 공격하는 문서들이다. 선교 초기부터 경쟁 의식이 치열했음을 보여준다.



① <예수천주양교변론>
 <예수천주양교변론>은 1908년에 최병헌의 역술(譯述)로 정동교회에서 발행된 천주교 비판서이다. 저자는 외국어 자료들을 참고로 해서 천주교 교리를 비난하는데, 아래 부분은 천주교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외경에 대한 비판이다.

예수교회에서는 삼가 성경을 좇아 유전서 중에 성경 이치로 더불어 합한 것은 가르치되 성경으로 근본을 삼고 성경의 불합한 것은 사람에게 유익함이 없는 줄로 알아 휴지같이 버리고 천주교회에서는 더럽혀 유전서를 성경으로 더불어 같이 중요하게 여겨 그 행하는 뜻이 두 가지 있으니 교회 중 유익한 일을 하는데, 성경 중에 명백히 준행할 구절이 없는 즉 유전서 중에 근사한 구절에 따라 행하며 그 행하는 일이 정녕히 성경에 불합한 즉 유전서에 근사한 것에 따라 그 행하는 일을 돕게 하니 통히 말할진대 그 세세한 뜻을 이루고자 함이니 이것은 두 교회에 크게 같지 아니한 것이니라


최병헌 역술,  『예수텬쥬량교변론』  (정동예수교회 사무소, 1908), pp.18-19.



② <루터개교기략>
이 책은 제임스 게일이 저술하고 이창직이 교열한 것으로 1908년 12월 30일 광학서포에서 총 196면으로 간행되었다. 루터의 생애와 활동을 서술한 책으로, 종교개혁 역사 서술을 통해 개신교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목적일 갖고 있다. 그 의도는 다음 서문에 드러나 있다.


대저  『누터개교긔략』은 비단 예수교회의 역사만 될 뿐 아니라 왼 구라파를 개혁한 역사라 하여도 가할지니 교내인이나 교외인이나 이 시대 형편에 몽매하면 담을 낯(面)하고 선 것 같다 하리로다. (중략)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라파 인민을 불상히 여기사 먼저 구주의 참 빛을 보이셨건마는 사람의 양심이 이욕에 가리운 바 되어 신구약 성경은 폐하야 버리고 방자히 권세 잡은 자가 그 인민을 속박하고 압제하는 정형을 한 입과 한 붓으로 이겨내고 기록하기 어렵도다. (중략) 하나님께서 루터를 보내사 구라파의 큰 마귀 세력을 벽파하셨으니 동양 고서에 나온바 하나님이 공자를 내지 아니하셨으면 만고가 긴 밤과 같겠다 함과 같이 하나님께서 서양세계에 루터를 내지 아니하셨더면 우리 동서양 인민이 모두 흑암 세계에 처하였을 것이오 십자가의 도가 광포지 못하였으리니 이것이 어찌 선생을 보내신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시리오


게일, 이창직 교열,  『누터개교긔략』  (광학서포, 1908), "서문".
 



③<신교지기원>
위 자료가 개신교 입장에서 서술된 종교개혁사라고 한다면, <<신교지기원>>은 천주교 입장에서 기술된 역사로 개신교를 공격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 드망드 주교의 저술로 성서활판소에서 1923년에 간행되었다. 아래에서 개신교를 분열의 종교라고 비난하고 있다.

한번 천주교를 배반하고 교황의 권리를 물리친 후로는 그 신앙상과 정신상에 아무 권리도 가지지 목하여 각 당파의 도리가 서로 다르고 각 사람의 의견이 서로 맞지 못하여, 그 믿는 뜻과 교파가 날로 변하고 찢어져 이제 300여 년간에 벌서 3백여 가지 교파가 생겼으며, 명칭은 예수교라 하나 예수교의 진의를 아주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또한 루터의 도리를 그대로 좇는 자도 하나도 없어 300여 년 동안 300여 번을 더 변하였으니, 이제는 예수교라 함은 물론 도무지 되지 못할 말이니 16세기의 루터교라 하여도 말이 아니 되고 최초 개신교라 하여도 거짓말이 될지라. 보통 열교(裂敎)라 하는 명칭외에는 도무지 무엇이라 명명할 수가 없게 되었도다.


드망즈 주교,  『신교지기원』  (성서활판소, 1923), p.65.



④개신교 자복에 대한 기사
아래의 <경향신문> 기사는 당시 한국 개신교의 자복 행위에 대한 서술을 담은 특이한 자료이다. 천주교에서 고백성사가 7성사의 하나로 체계화되어 있는 것에 반해, 개신교에서는 그러한 고백의 행위가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는 약점을 공격한 것이다. 당시 한국 개신교회의 신앙 행위를 반영한 논쟁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예부터 예수교에 본디 이런 법이 없었는데 이것은 예수교가 변하였나 혹 다른 예수교인가 천주교에는 믿어 좇는 도리에 근원이 둘이 있어 하나는 성경이니 처음부터 믿어 지켜오는 것이오 하나는 교황과 공의회니 시대를 따라 천주교의 가르치는 대로 성경에 있는 심오한 도리를 밝혀 드러내어 새 모양 같은 일이 있거니와 예수교는 성경만 있고 교황과 공의회가 없으니 고치거나 변통하는 법이 없을 것이거늘 이제 이런 새 규칙이 어찌하여 나왔느뇨?  구미각국에 예수교가 많은데 자복(自伏)하는 규칙이 없고 유독 대한에만 생겼으니 대한 예수교는 구미 예수교와 같지 아닌가? 대한인의 영혼은 구미 각국인의 영혼과 다른가?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으니까 한다하나 예수교 시작한지가 지금 사백년이 되었으니 그때에는 성경말씀을 생각지 아니하였던가? 또 어떤 이는 자복하는 법이 있어야 하겠다 하고 어떤 이는 없어도 관계치 않다하니 필경은 서로 합하지 못할 모양이라. 예수교에서 천주교의 고해하는 법을 바 왜 자기 죄를 신부에게 고하여 알게 하느뇨 하니 예수교에서는 어찌 하여 한 사람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 앞에서 하느뇨? 천주교에서 예수 당시에 열 두제자에게 이권을 주사 차차 내려와 신품 받은 이에게 전하여 이권이 있는 줄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죄를 고하는 것이고 이 자복이라 하는 것은 권위 없는 여러 사람에게 하니 무슨 의사인고?  천주교에는 권위 있는 한 사람 앞에 고하고 고함을 들은 이는 천주의 명으로 큰 벌이 있음을 굳이 믿어 죽을지언정 남의 미죄라도 드러내지 못하거니와 예수교에는 아무 여러 사람 앞에 고함으로 모든 사람이 다 그 사람의 잘못함을 알아 전파하는 고로 명성이 상하며 불목이 나면 싸움이 생겨 온갖 근심이 일기조차 시작하니 어떤 의사이뇨? 여러 사람 앞에 자복하게 하는 것은 부끄럽게 하여 다시는 잘못하지 못하게 한다 하니 혹 그럴 듯하나 자복하는 말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럽혀 진 죄를 더 알고 그런 일을 배우기도 쉬울 것이오


“별소문”, <경향신문> 1907.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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