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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선교사문헌

하멜의 종교 서술 2

by 방가房家 2009. 1. 11.

집문당에서 출판된 <<하멜표류기>>를 보고 많이 놀랐다.  다음은 책 중에서 조선의 종교에 대한 서술이다.
 
조선에는 아무런 종교가 없다.  빈민들은 아무런 경외심도 없이 자신들의 우상 앞에서 얼굴을 찌푸린다.  그들은 착한 일을 한 사람은 보답을 받을 것이며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벌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설파되는 교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는 암자와 사찰이 많았으며 수많은 종파가 있다.  어떤 사찰에는 5-6백명 이상의 수도승이 있다.  승려는 스스로 원한다면 기꺼이 자신의 직업을 그만둘 수 있으며 누구든지 승려가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승려들은 노비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  승려들은 군역을 면제받지 않으며 대다수가 번갈아 가며 성이나 요새를 경계하는 일에 복무한다.  만약 그가 깨달음을 얻으면 고승으로 추앙된다.  승려들은 말을 타고 방문을 한다. (신복룡 역주, <<하멜표류기 外>>, (집문당, 1999), 56)
 
우선 “조선에는 아무런 종교가 없다”라는 단정적인 서술이 눈에 띈다.  최근에 네덜란드 원문이 참조된 새 번역이 많이 출판되었는데(하멜의 종교 서술 참조),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신뢰하는 번역((tr. by) Jean-Paul Buys of Taizé, Hamel's Journal and a Description of the Kingdom of Korea 1653-1666 (Seoul, Korea: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1998).)에는 해당 부분의 첫 문장이 이렇다.
 
As regards their religion, temples, monks and religious groups, the ordinary people do pay their idols some superstitious rites, but they have more respect for public authority than for their many gods.
 
“종교와 사원, 종교인들에 대해 말하자면”(As regards their religion, temples, monks and religious groups)이라는 말로 문장을 이끌고 있긴 하지만, 종교가 없다는 내용은 들어있지 않다.  원문에 없는 표현이 삽입된 것이다.
이것은 신복룡 번역 뿐 아니라, 이전에 사용되었던 영어 번역(불어 번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의 공통적인 문제이다.  영어 번역 자체가 “조선에는 종교가 없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며, 그것이 개항기 때 조선을 찾은 서구인들이 읽었던 텍스트이기도 하다.  (그들 대부분은 <<하멜 표류기>>를 읽은 후 한국을 찾았다.)  예를 들어, 당시 한국에 대한 정보를 집약한 대표적인 책인 선교사 그리피스의 <<Corea: The Hermit Nation>>에는 하멜의 서술이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다.
 
His[Hamel's] opinion was somewhat biased, since he remarks that "as for religion, the Coreans have scarcely any... They know nothing of preaching or mysteries, and, therefore, have no disputes about religion." (William E. Griffis, Corea: The Hermit Nation, 9th ed. (New York: AMS Press, 1971), 334. [Reprinted from the edition of 1911. The first edition was published in 1882.])
 
널리 유통되었던 영어 판본이 좋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원문과는 다른 내용이 오랬동안 받아들여졌다.  이 영어 판본은 전에 올려놓은 <<The description of the kingdom of Corea>>과 일치된다고 생각된다.
하나 더 지적하자면 “자신들의 우상 앞에서 얼굴을 찌푸린다”는 문장의 의미도 잘 알 수 없다.  “makes some odd Grimaces before the Idols”라는 표현의 번역일텐데, 영어 표현 자체가 이상하다.  최근의 번역에서는 우상에게 미신적인 제의를 올린다고 표현된 부분이다.
 


<< An account of the shipwreck of a Dutch vessel on the coast of the Isle of Quelpaert, together with the description of the Kingdom of Corea>>에서
 

신복룡 번역에서 정말 놀랐던 점은 내용이 무지하게 짧다는 점이다.  내용이 다른 번역의 반의 반도 안 될 정도로 압축되어 있다.  최근 번역과 다른 것은 물론이고 옛 영어 번역 <<The description of the kingdom of Corea>>과도 달라도 너무 다르다.  두 페이지가 넘는 내용이 두 단락으로 줄여져 있는데, 내용을 요약한 것도 아니고, 문장들을 글 중간에서 그냥 뽑아다가 합쳐놓았다.   쉽게 말해, 열 단락에서 각각 아무 문장 하나씩 뽑아 열문장짜리 한 단락으로 만들었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위에 인용한 대목은 전혀 뜻이 통하지 않는다. 

이것은 번역이 잘못되었다기 보다는(솔직히 난 이 번역자를 신뢰하는 편은 아니지만), 판본의 문제이다.  이 번역의 대본은 Hendrick Hamel, "Narrative and Description of the Kingdom of Korea," A Chronological History of the Voyages and Discoveries in the South Sea or Pacific Ocean Part III (1620-1688), ed., James Burney (London: Luke Hansard and Sons, 1813)이다.  내 힘이 닿는 도서관에 없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구해 보지 못했다.  짐작이 가는 것은, 이 책은 당시 서구 사회에 유행하는 동양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에 편승해서 제작된 여행담 모음집이고, 하멜의 글이 그 하나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대중적인 책에서 하멜의 글, 그것도 그다지 좋지도 않은 영어 번역이 아주 무개념으로 축약되어 실린 것으로 보이며, 그것이 집문당 번역의 대본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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