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논문을 책으로 정리해서 내는데 10년이 넘게 걸렸다. 속이 시원하다.
아래의 글은 책소개를 요청받아 "대학지성"에 기고한 내용이다.
http://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43
한국종교가 종교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우리는 만남이 잦은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을 만나고, 다른 나라를 여행하며 새로운 경험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새로운 만남이 주는 지적 자극을 다양하게 겪어 보았을 것이다. 낯선 정황 속에서 내 문화의 상식이 통용되지 않고 기존의 언어가 딱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든 이를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려고 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그러한 경험에 관해서이다. 다만 150년 전 한국은 지금과 상황이 크게 달랐다. 지금은 외국인이 케이컬쳐를 알아주는 것이 익숙한 일이 되었지만, 150년 전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늦게 서양과 외교 관계를 수립한 나라로, 서양인들에게는 거의 미지의 땅이었다.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도 인도, 말레이반도, 일본, 중국으로, 바다를 따라 남에서 올라오는 선교의 여정이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이 한국이었다. 한국에 관한 변변한 책 한 권 없이 한국에 첫걸음을 내디딘 선교사들, 바로 이들과 한국의 만남을 이 책에서 다루게 된다. 개신교 선교사가 이 땅의 종교를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이 느낀 망설임, 과연 이것을 종교로 불러도 좋을지 꺼림칙함은 지성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서양에서 형성된 종교 개념이 현장의 다른 문화와 부딪히는 파열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양 언어인 종교가 보편적인 개념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진통이기도 하다. 이 책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처음의 망설임을 극복하고 어떻게 한국종교를 서술하는 학문적 결과물을 내놓게 되었는지의 과정을 소개한다.
만남은 종교를 되묻게 한다
종교학은 만남에서 비롯된 학문이다. 서양인이 기독교 세계 안에서 살아가던 시절에는 종교라는 말조차 필요 없었다. 유럽인은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 바깥의 비기독교 세계와 대면하면서 비로소 ‘종교’를 묻게 된다. 인도와 중국의 고대 문헌, 성서 이전 시기를 보여주는 메소포타미아 유적,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메리카, 아프리카, 태평양, 오스트레일리아 등 세계 각지에서 수집된 이른바 원시민족에 관한 보고서가 유럽에 전달되었다. 타자들의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세계관 바깥으로 나와 ‘종교’를 보편적인 개념으로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세기 말 종교학이라는 학문이 출현하였다.
종교학이 출현하던 즈음인 1880년대부터 한국에서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선교사는 말 그대로 선교하러 온 이들이지만, 직업적 특성상 한국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믿는가를 설명해야만 했다. 그들은 원래 종교를 기독교적 맥락에서 사용해왔다. 예를 들어 종교를 “하느님과 인간의 연결”로 정의했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이 한국의 현실을 설명할 수 없음을 깨닫고 개념적 혼란을 겪게 된다. 이 경험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종교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초기 종교학과 초기 한국 선교는 겹친다. 시기상으로 비슷하기에 종교 개념과 이론을 공유하였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고, 무엇보다 서구적인 종교 개념을 확장해 타자의 믿음을 설명하는 보편적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그 과정에서 종교들을 비교의 시선으로 성찰하고 자기 개념을 수정하는 종교학적인 인식 과정을 겪었다는 점에서 그 둘은 겹친다. 이 책은 초기 개신교 선교사가 초기의 개념적 혼란을 딛고 종교에 관한 논의를 정립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종교라고 부르는 일
간단히 말하면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한 사실은 개신교 선교사가 한국 전통을 ‘릴리전’(religion)이라고 부른 최초의 사람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 사실은 당연해 보이지만 우리에게 낯선 쟁점을 포함한다. 지금 우리는 종교가 인류 역사상 존재해온 현상이기에 ‘종교’(宗敎)라는 한자어 역시 오래된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종교학은 ‘종교’가 새로운 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영어 릴리전이 지금처럼 보편적 의미로 사용된 것은 유럽이 비서구사회와의 만남을 경험한 이후인 근대의 일이다. 참고로 우리말 종교 역시 영어 릴리전을 번역하기 위해 일본에서 고안한 한자 조어이며 1880년대 이후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교사가 처음에 한국 전통을 릴리전이라고 부르기 꺼린 것은 예외적인 일이 아니라, 서구가 비서구사회를 만나는 과정에서 흔히 일어난 일이다.
개항 이후 한국을 찾은 서양인들은 한국 경험을 바탕으로 1890년대, 1900년대에 한국에 관한 책을 쏟아내었다. 선교사를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이 책을 통해 한국을 알려고, 한국에 관한 다양한 분야의 정보 중에는 종교 항목도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처음 20년 가까이 서양인들은 “한국에 종교가 없다”라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그 궁금증이 이 책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다가 1900년이 지나서야 한국에 종교가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어떤 이유에서, 어떤 논리에서 그런 전환이 가능했을까? 역시 이 책에서 설명하고자 했던 내용이다. 중요한 것은 종교라는 것이 당연히 있는 그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 서구 개념이었던 종교가 보편적 개념이 되기 위해서 지적 진통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 나타나는 비교의 인식은 종교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만남에서 빚어진 오해와 이해
이 책에서 강조하는 다른 강조점은, 종교를 이해하는 일이 그 시대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종교에 대한 관념, 전제, 이론들은 당대의 유행을 따른다. 종교에 관한 150년 전과 지금 이론의 차이는 매우 커서 선교사들의 이야기가 외국어처럼 들릴 때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종교학 전공자로서 종교학사의 이해가 필요한 내용들을 적극적으로 해설하고자 했다. 지금은 철 지난 이야기처럼 보여도 당시 종교학에서 유통되는 최신 담론을 선교사들이 활용하고자 했음을 보여주었다. 지금도 애니미즘이라는 말은 사용되지만, 그것이 어떤 문제의식에서 생성된 이론이며, 한국적 맥락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알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페티시즘이라는 말도 여전한 생명력을 갖지만, 이 역시 원래의 맥락에서 벗어나 발전한 탓에 19세기의 용법은 생소할 것이다. 원시유일신론은 일반인이라면 아예 들어보지도 못했을 용어일 것이다.
선교사가 다른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한 여러 용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우상숭배일 것이다. 우상숭배와 관련된 이미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책 소개를 마무리 지을까 한다. 필자의 책에는 선교사뿐 아니라 선교사의 종교 이해에 영향을 준 서양인의 이야기도 꽤 포함되어 있다. 그중 한 명이 한국에 관해 가장 오래되었으면서도 독특하고 중요한 기록을 남긴 헨드릭 하멜이다. 17세기 조선에서 13년간 생활한 경험을 저술한 『하멜 보고서』는 오랫동안 한국에 관한 유일한 책이었다. 선교사도 대부분 참조한 책이다. 가장 알려진 『하멜 보고서』의 판본에는 위의 그림이 실려 있다. 이 그림은 『하멜 보고서』가 얼마나 겹겹이 오해로 둘러싸여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원래 하멜은 “보고서”를 작성하였지만, 유럽에서 그의 글은 상업적인 각색을 거쳐 “표류기”로 받아들여졌다. 하멜은 조선의 종교에 관해 날카로운 관찰을 기록하였지만, 유럽의 독자들은 그런 미개한 나라에 종교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필자의 책에서 공들여 논증한 내용 중 하나는, 하멜은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 출판사의 각색을 통해 “조선에는 종교가 없다”라는 문장이 삽입되는 바람에 글에 대한 큰 오해가 생겼다는 것이다. 선교사를 포함한 후대의 독자들은 하멜이 종교가 없다고 말했다고 믿었고, 그것은 개항기 초에 ‘종교 없음’ 공론이 형성된 근거 중 하나였다. 위의 그림은 조선의 우상숭배를 보여주는 삽화인데, 자세히 보면 우리나라와는 상관없는 그림임을 알 수 있다. 야자수가 서 있는 배경에, 정체불명의 신상 앞에서 사람들이 절하고 있다. 이것은 출판사에서 한국과 아무 상관도 없는, 아마 다른 책에서 사용되었을 도판을 집어넣은 것이다. 전형적인 우상숭배의 이미지로, 독자들의 입맛에 맞는 그림이었다. 이 그림이 엉터리로 들어갔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서양인이 동아시아 종교에서 보고자 했던, 혹은 기대했던 이미지가 바로 신상 앞에 무릎 꿇고 절하는 이교도의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선교사도 이러한 이미지를 기대하고 한국에 들어왔고, 한동안 이에 부합하는 모습을 찾았다. 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여행가 홈즈가 찍은 아래의 사진이다. 이 사진은 현재 서울 서대문구 옥천암의 보도각백불에서 스님이 불공을 드리는 모습을 찍은 것이다. 불교적 맥락과는 별도로 이 이미지는 서양인이 상상한 우상숭배를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만남에는 오해가 발생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만 보인다. 경험 이전에 존재하는 문화적 전제가 경험을 제약한다. 그러나 오해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필자의 책이 실제로 다루는 것은 그 다음 이야기이다. 어떤 의미에서 오해는 이해의 출발이고, 이해의 일종이기도 하다. 종교가 없다는 오해는 비교 인식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책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것은 선교사가 당대의 종교학 논의를 활용하여 한국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 이야기가 만족스럽게 보이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종교를 서술하는 종교학 이야기의 출발임에는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