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선교사의 페티시즘 개념에 관한 글. 이 주제에 대해 옛날에 쓴 논문을 대폭 수정하고 자료를 추가해서 이번에 발표한 글이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섞어 엄청 길게 올려본다.
1. 머리말
2. 페티시즘 개념사: 만남과 물질
(1) 페티시즘의 출현
(2) 종교학의 페티시즘
(3) 경제학과 심리학의 페티시즘
3. 선교 현장의 페티시즘
(1) 전도된 물질적 가치
(2) 페티시 파괴: 개종의 세레모니
(3) 페티시즘의 학문적 서술
4. 맺음말
페티시즘 개념을 통해서 본 개신교와 무속의 만남
1. 머리말
2008년에 제작된 영화 <페티쉬>는 숙희(송혜교 분)가 무당의 딸이라는 신분을 속이고 독실한 재미교포 개신교 집안에 시집간 이후를 그린 이야기이다. 남편이 사망한 이후 숙희는 옆집 젊은 부부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고, 부인 줄리를 질투한 나머지 그녀의 모습을 모방해가며 남편에게 접근한다. 욕망과 유혹으로 가득한 이 이야기를 보면서 시청자들은 영화 제목 ‘페티시’를 성적인 의미와 연결해 이해할 공산이 크다. 그러나 뜻밖에도 영화 내의 페티시는 숙희가 시집올 때 가져온 베개 속에 간직된 무당 어머니의 방울을 의미한다. 방울은 숙희가 벗어나고자 했지만 벗어나지 못한 저주와도 같은 무당의 숙명을 상징한다. 현대 시청자의 예상을 벗어난 페티시의 의미는 어디서 온 것일까? 이것은 19세기말, 20세기초 한국에서 활동한 개신교 선교사의 용법의 흔적이다. 선교사들은 한국 민간신앙의 상징물과 무당의 무구(巫具)를 페티시(fetish)라고 불렀다. 이 글은 영화와 시청자 사이의 의미의 간극, 페티시의 19세기 의미와 21세기 의미 사이의 간극에서 출발한다.
페티시즘은 극단적으로 복잡한 의미와 용례를 가진 단어이다. 그것은 1760년에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샤를 드 브로스(Charles de Brosses)가 종교를 설명하기 위해 제안한 이래, 다양한 학문분과에서 응용되었으며 현대문화의 여러 영역에서 생명력을 지닌 개념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 복잡성은 우리말에서 사용되는 용례만 일별해보아도 금방 드러난다. 종교학과 신학 분야에서는 이 단어를 과거에는 서물숭배(庶物崇拜), 배물론(拜物論) 등으로 번역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주물숭배(呪物崇拜)로 번역하는 추세이다. 경제학에서는 물신숭배(物神崇拜)라고 번역된다. 심리학에서는 절편음란증(切片淫亂症), 이성물애(異性物愛) 등의 표현이 있으며 페티시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심리학적 용법은 미술평론에서도 사용되며, 심지어는 포르노 산업의 한 장르 명칭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페티시즘 개념의 발달 과정 서술이 이 글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중심 주제는 아니다. 이 글에서 관심을 두는 것은 19세기말, 20세기초 한국에서 활동한 개신교 선교사의 문헌에서 이 개념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이들은 어떤 의미와 맥락에서 페티시즘을 사용하였을까? 왜 개신교 선교사들은 한국의 무속을 기술할 때 이 개념을 사용하였을까?
이 글은 페티시즘 개념의 역사를 개관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 개념이 서아프리카 종교와의 만남에서 출현하여 종교학, 경제학, 심리학에서 어떤 의미를 획득하였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이 개관의 목적인 이 개념이 비롯할 때부터 이후의 발달에 이르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흐르는 핵심 주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것이 타자를 열등하게 바라보는 만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과 전도된 물질적 가치에 주목하였다는 점이다.
이 두 주제는 한국에서 선교한 선교사들의 페티시즘 용법에서도 나타난다. 선교사들에게 페티시즘은 낯선 문화를 서술하는 당대의 개념이었다. 그것은 당대의 개념이기에 비유럽 타자에 대한 서구인의 인식을 보여주고 당시 학계의 논의를 반영한다. 그리고 그것이 당대의 개념이기 때문에 현재의 독자에게 낯설게 보이는 의미를 포함한다. 선교사 문헌에 등장하는 페티시즘은 무속(巫俗)이라는 타자의 종교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데, 더 구체화해서 살피면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한국 무속과 가정신앙에서 사용되는 상징들은 선교사들에게 전도된 물질적 가치의 부여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페티시즘이 적용되었다. 둘째, 무속의 신앙 대상은 일반적으로 페티시로 불린다. 무속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선교 내러티브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이루는 것이 페티시 불사르기였다. 셋째, 파괴적 의도를 갖지 않고 학술적인 언어로서 페티시즘을 사용하려는 선교사도 있었다. 이들은 페티시즘을 통해 무속을 종교현상으로 서술하고자 하였다. 이하에서는 페티시즘의 개념적 고찰에 이어 선교사의 세 가지 용법을 차례로 살피도록 하겠다.
2. 페티시즘 개념사: 만남과 물질
(1) 페티시즘의 출현
페티시 개념은 16, 17세기 서아프리카 연안이라는 문화 간의 만남과 전환의 공간에서 출현하였다. 서아프리카 지역은 포르투갈이 15세기 말부터 식민기지를 건설하고 상거래와 노예무역을 한 접촉지대였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서아프리카인들의 종교적 대상과 신앙 행위를 ‘페이티소’(feitiço, 마법witchcraft에 속하는 대상이나 행위)라고 지칭했다. 이 말은 상호문화적 교통의 산물인 피진어(pidgin) ‘페티소’(Fetisso)로 정착되었고, 영문 자료에는 1613년부터 등장한다.
17세기 이후 북유럽 개신교 상인들이 이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페티시에 대한 경멸적 의미, 특히 우상숭배로서의 의미가 추가되었다. 이들은 “토착 종교를 믿는 우상숭배자(idolater)들이 목에 페티시라고 불리는 가죽주머니를 달고 다닌다.”라고 묘사하였다. 페티시즘은 우상숭배와 동일시되었다. 이것은 개신교가 가톨릭을 공격할 때 사용한 논리였다. 종교학자 막스 뮐러(Max Müller)는 개신교 상인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왜 포르투갈 항해사들은, 기독교인이긴 하지만 지난 세기의 대중적 가톨릭이라는 변형된 기독교인인 그들은, 황금 해안의 흑인들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부터 페이티소(feitiço)를 단번에 분간해낼 수 있었을까? 답은 분명하다. 그들 자신이 페이티소, 즉 부적에 완전히 친숙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항해를 시작하기에 앞서 신부님들께 축성 받은 묵주, 십자가, 성상을 갖고 왔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 자신이 페티시 숭배자들이었던 것이다.
서아프리카인이 유럽인의 타자였던 것처럼, 가톨릭은 개신교의 타자였다. 유럽 종교개혁기에 개신교가 가톨릭을 우상숭배라고 타자화하던 논리가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연장 적용된 것이 페티시즘의 경멸적 함의에 영향을 주었다.
서아프리카 페티시 이야기는 네덜란드 상인 빌렘 보스만(Willem Bosman)이 저술한 책을 통해 유럽 학자들에 알려졌다. 그는 페티시즘이 이익이라는 진정한 사회 질서의 도착(倒錯)으로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경제적 가치의 문제가 페티시를 둘러싼 초기 관심 중 하나였다.
페티시가 페티시즘으로 이론화된 것은 프랑스 계몽주의자 드 브로스가 1760년에 출판한 <<페티시 신 숭배에 관하여>>를 통해서였다. 다음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서아프리카 지역에 국한하여 사용되던 이 용어를 전세계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일반화하였고, 이것을 기초적인 종교 형태로서 제시함으로써 이후 종교기원론으로 발전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비록 이 용어[페티시즘Fétichisme]가 정확한 의미에서는 아프리카 흑인 종교만을 특별히 지칭하기는 하지만, 나는 이 용어를 신으로 변한 동물이나 비활성 물건—이 물건들이 신보다 열등한 경우에도—을 숭배하는 어떤 민족에도 사용하고자 한다.……왜냐하면 이러한 형태의 사유는 하나의 일반 종교에 속하는 동일한 기원을 가진 것으로 이전부터 전세계에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의 페티시와 페티시즘 개념의 형성과정의 논의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개념은 식민지에서 일어난 상이한 경제적 체계의 만남을 배경으로 탄생하였다. 그것은 아프리카인들이 물건에 부여하는 독특한 가치에 대한 평가였다. 이때 관찰자가 문화적으로 전제한 가치 체계와 관찰 대상의 문화에서 부여되는 가치 체계는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 이 독특성은 이해되지 못했고 전도되고 혼란스러운 가치 부여로 인식되었다.
(2) 종교학의 페티시즘
페티시즘은 19세기 초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에 의해 보편적 이론으로 발달한다. 콩트는 신학적, 형이상학적, 실증적 단계를 인간 진보의 3단계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신학적 단계는 다시 페티시즘, 다신론, 유일신론으로 나뉘어진다. 그에 따르면 페티시즘은 개별화된 구체성의 사유이고, 구체적 사물이 추상화되는 단계에서 다신론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나무 페티시가 모여 나무 신으로 발전될 때 다신론이 되는 것이다. 콩트의 도식은 이후 광범위한 영향을 미쳐 대중적 상식으로 자리 잡는다. 페티시즘은 종교의 원시적 형태를 대표하는 표현이 되었다.
19세기 말에 새로운 학문으로서 종교학이 등장하였고 출현했고, 학자들은 새로운 종교기원론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 종교학계에서 페티시즘은 낡은 이론이었고, 새로운 이론의 바탕이 되는 동시에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1869년에 토테미즘 이론을 제안한 맥레넌(John Ferguson McLennan)은 토테미즘을 페티시즘과 족외혼의 결합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페티시즘을 기본적인 종교 형태를 나타내는 이론적 자원으로서 활용하면서 토테미즘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안한 것이다. 1870년대에 애니미즘(animsim) 이론을 제안한 에드워드 타일러(Edward Burnett Tylor) 역시 애니미즘 아래 페티시즘을 포함했다. 그는 영혼이 물질을 통해 작용한다고 의식적으로 인정되는 경우를 페티시즘으로 보았다.
종교학 이론이 발달함에 따라 페티시즘은 점차 경쟁 이론들에 의해 밀려난 구식 이론이 되었다. 나는 낡은 설명으로 전락하였다. 초기 종교학자들은 자신이 제안하는 종교적 형태가 가장 원시적인 것임을 주장하면서 그 이전까지 가장 원시적인 것으로 알려졌던 페티시즘 이론을 공박하였다. 당시 대표적인 종교학자 막스 뮐러는 1878년의 저서에서 “페티시즘이 종교의 원시적 형태인가?”라는 제목의 장에서 페티시즘이 종교의 기본 형태가 아니라는 점을 누누이 논증하였다.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종교학계에서 페티시즘의 종교기원론으로서의 생명력은 거의 다 상실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1894년에 로버트슨 스미스는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페티시즘은 그저 유행하는 말일 뿐 정확한 의미라곤 없는 말”이며 “단지 매우 야만적이고 경멸적인 무언가를 의미할 뿐”이다. 다만 현재 이 용어는 진화론적인 맥락이 아니라 종교문화의 기본적 양태를 지칭하는 용도로 사용되곤 한다. 예를 들어 판데르레이우(Van der Leeuw)는 힘으로 가득 찬 물질적 대상에 대한 경외가 어린이의 심성, 원시종교, 고대종교 등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3) 경제학과 심리학의 페티시즘
페티시즘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라는 천재적인 사상가를 통해 원래의 종교적 맥락을 벗고 새로운 영역에서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페티시즘은 이들의 사상적 가공의 거친 결과물이다. 두 분야에서의 사용을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저술을 중심으로 간단히 정리하도록 하겠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사상에서 페티시즘은 자본주의 체제 내 상품의 속성을 설명하는 핵심 용어이다. 상품의 가치는 노동생산품의 물리적 성질과는 상관없이 사회적 관계에 의해 결정되고, 그것은 물체와 물체의 관계라는 환상적인 형태를 취한다. 인간 노동의 산물이 상품의 세계에서 스스로의 생명을 부여받고, 그 자신들끼리 또는 사람들 사이에 관계를 맺는 독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의 세계에서 인간 두뇌의 산물이 그 자체의 생명을 부여받는 양상과 마찬가지이다. 마르크스는 이처럼 노동생산물이 본연의 가치(사물들 간의 관계) 대신 전도된 가치(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부여받아 상품이 되는 현상을 페티시즘이라고 부른다. 그는 페티시즘을 다룬 당대 저서들을 두루 검토하고 서아프리카에서부터 페티시즘의 핵심이 전도된 경제적 가치의 부여라는 점을 통찰력 있게 파악하였다. 이른바 야만인들의 전도된 가치 부여를 서양 근대의 자본주의의 근간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이론에는 중요한 반전(反轉)이 놓여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야만인을 경멸하는 타자화의 수사(修辭)를 그 주요 사용자인 서양인 자신의 사회 구성의 핵심을 해명하는데 되돌려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경우, 페티시즘이 갖는 전도된 가치 중에서 가치가 경제적 차원이 아니라 성적 욕망의 차원에서 매겨진다. 그는 페티시즘의 성적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절편음란물[페티시]은 단순한 남근의 대체물이 아니라 절편음란증 환자의 어린 시절에 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가 나중에 상실되어 버린 아주 특별하고 구체적인 남근의 대체물이다. 다시 말하면 정상적인 삶의 과정에서 상실되어 버린 남근을 절편음란물을 통해 부활시키고 보존하려는 욕구가 절편음란증[페티시즘]을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하면, 절편음란물이란 남자아이가 한때 그 존재를 믿었던 여성의 남근, 혹은 어머니의 남근의 대체물이다.
프로이트 심리학에는 남성의 거세 콤플렉스가 존재한다. 유년기 남자아이는 자기 것과 다른 어머니의 성기를 보고는 충격을 받는다. 어머니가 성기가 거세된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페티시는 남자아이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잃어버린 어머니 성기의 대체물이다. 그러나 대중적인 차원에서 정신분석학적 페티시는 여성의 남근의 대체물이라는 다소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한 원래의 의미보다는 평이한 의미로 수용되었다. 즉 심리학적으로 페티시는 정상적인 성적 욕망의 대상이 주변의 다른 물건으로 전이된, 전도된 성적 가치로 이해된다. 미술을 비롯한 문화비평에서, 그리고 포르노 산업에서 사용되는 의미는 이러한 성적인 의미의 페티시즘의 연장선상에 있다. 일반적으로 성적인 욕망이 다리와 같은 신체 기관, 스타킹, 구두, 기타 속옷에 대한 관음증적인 집착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페티시즘이라고 불린다.
3. 선교 현장의 페티시즘
이제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한국이라는 근대 전환공간에서 선교사들이 페티시즘 개념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를 살피도록 하자. 선교사들에게 페티시즘은 타자의 문화를 기술하는데 사용한 그 당시의 유행어였다. 경제학과 심리학에서 재해석된 페티시즘, 지금 우리에게 잘 알려진 페티시즘 개념은 이 시점에 선교사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은 종교적 맥락에서 이 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선교사들이 당시 종교학의 논의를 그대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앞서 보았듯이 페티시즘은 1900년대 종교학계에서 이미 소멸한 이론 취급을 받았고, 미신, 우상숭배, 이교와 다르지 않은 경멸적 용어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빅토리아 시대 문헌에 페티시즘이 광범위하게 등장하였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한 시대의 언어는 학술사로만 설명되지 않으며, 페티시즘의 경우 학자들과는 별도의 대중적 차원이 존재한다. 세계 개신교 선교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급격히 확대되었는데, 선교 현장에서 이 용어가 해당 지역의 신앙 행위를 지칭하는 언어로 얻어 활발하게 사용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선교사의 용법은 당대 학술적 논의와는 다른 어조의 대중적 용법을 보여준다. 비슷한 시기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한 개신교 선교사들의 기록을 분석한 웹 킨(Webb Keane)에 따르면, 선교사들은 페티시즘을 우상숭배와 동일시하였고, 열등한 대상에 부적절한 경배나 공포를 부여하는 행위로, 인간 주체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행위로 평가하였다. 한국이라는 선교지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1) 전도된 물질적 가치
앞서 보았듯이 페티시즘에 내포된 핵심적 관건은 물질적 가치에 대한 평가이다. 한 집단이 어떠한 물질적 대상에 높은 가치를 매기고 숭상할 것에 대해, 외부인이 그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전도된 가치라고 평가할 때 페티시즘의 기본 조건이 갖추어진다. 개항기에 한국을 방문한 서양인이 한국인의 신앙 대상물에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구심을 표하고, 더 나아가 비웃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페티시즘 상황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처음에 살펴볼 사례에는 페티시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서구인의 눈에 띈 전도된 물질적 가치가 분명히 드러난다. 아랫글은 1886년부터 1889년까지 조선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로 재직하면서 서울에 거주한 영국인 길모어(William G. Gilmore)가 남긴 기록의 일부이다. 그는 귀국한 후인 1894년에 한국의 경험을 서술한 책을 출판하였다.
간간이 더 커다란 건물이 보이는데, 그것은 유명한 전사를 기리고자 세운 것일 것이다. 건물 안에서는 날카로운 눈매에 하고 세상에 없을 같은 수염을 기르고 의자에 도전적인 자세로 앉아있는, 붉은색과 금빛으로 칠한 신격화된 전사의 형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숭배자들이 헌물로 바친 아주 이상한 물건들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오래된 칼이 그곳을 지키려는 듯이 보이는 반면에, 워터베리 시계(Waterbury clock)가 조롱하듯이 짤깍거린다. 나는 전에 한 사당에서 못 신게 된 고무장화 한 짝을 신상 앞에서 본 적이 있는데, 시주한 사람이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쓰레기더미에서 주웠음직해 보였다.
길모어의 언급에서 언급된 사례는 두 개다. 첫 번째 사례는 전신(戰神)을 모신 사당에 대한 묘사인데, 이것은 아마 서울 동대문 근처에 있는, 관우(關羽)를 모신 관제묘(關帝廟)인 동묘(東廟)일 것이다. 이 사당에 모셔진 칼과 워터베리 시계의 기이한 조합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두 번째 사례는 다른 사당에 모셔진 고무장화에 대한 기록이다. 새롭고 낯선 물건이 가치를 부여받아 제단에 오르는 것은 한국 민간신앙의 유연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치 부시맨에게 떨어진 콜라병처럼, 서양인의 가치관에서 이 변용은 부적절한 위치에 부적절하게 높여진 물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워터베리 시계는 몰라도 고무장화는 명확히 경제적 가치가 떨어지는 물건에 나타난 가치의 전도였다.
개신교 선교사의 기록은 아니지만 1901년 한국을 방문한 독일 기자 지그프리트 겐테(Siegfried Genthe)의 글에서도 비슷한 관점이 나타난다. 역시 페티시는 언급되지 않지만, 그가 한국 민간신앙의 상징물들을 물건의 ‘경제적 가치’ 측면에서 분석할 때 페티시즘의 관점이 예비되어 있다.
사람의 손이 닿는 나뭇가지에는 온갖 종류의 천 조각이나 종잇조각, 그와 유사한 잡동사니들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각양각색으로 걸려 있었다. 미신을 믿는 나그네가 낡은 짚신을 신성한 제물로 바치기도 하고, 소박한 신단의 나뭇가지에 엄숙한 축성물을 걸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두려워하는 귀신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귀신을 달래는 선물이라고 해야 별 가치도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짚신 한 켤레는 여기서 8원인데, 2500원은 1달러에 달하며 3분의 2페니히가 된다. 그렇다면 낡은 짚신 한 켤레는 도대체 얼마의 가치가 있을까? 짐작컨대 신에게 바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한국 무속(巫俗)에 관한 선교사의 기록은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최초의 내한 선교사인 알렌(Horace N. Allen)은 한국의 무당들이 신자들의 믿음을 이용하여 경제적인 착취를 한다고 비난하였다. 무당의 굿이 경제적 사기에 해당한다는 견해는 이후 한국 전통에 비판적이었던 선교사들에게 공유되었다. 선교사들은 무속에 관련해서 한국인들에게 전도된 경제적 가치가 존재한다고 여겼다.
한국 민간신앙과 무교의 상징물을 경제적 가치로 평가하고 그 보잘것없음을 비판하는 시각에 잘 나타난 자료로는 노블 부인의 일기가 있다. 매티 윌콕스 노블(Mattie Wilcox Noble, 1872∼1956)은 윌리엄 아서 노블(William Arthur Noble, 1866∼1945)과 결혼한 직후 한국으로 와서 1892년부터 1934년까지 서울, 평양,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한 북감리교 선교사이다. 그녀는 42년의 선교 활동을 꼼꼼히 일기로 남겨서, 공식 기록에서는 보기 힘든 선교사의 솔직한 감정을 보여준다. 그녀가 한국에 온 지 6년째 되는 1897년 4월 8일의 일기에는 한국인 가정을 방문하여 가정신앙의 대상들을 호기심을 갖고 샅샅이 뒤져본 경험이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가정신앙의 대상물들을 ‘귀신에게 바치는 페티시’라고 번역하였다.
다른 집에서는 여전히 많은 페티시가 집안에 있었다. 하나는 벽에 걸려 있는 두 개의 작은 쌀 봉지였는데, 이것들은 아기가 태어날 때 생명의 귀신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긴 시렁 위에는 위를 덮은 바구니 두 개와 질항아리 한 개가 있었다. 나는 그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을 살펴서 이러저러한 때마다 귀신들에게 무엇을 바치는지를 알아보고 싶었다. 집의 안주인은 거기에 손을 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줘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해가 미치지 않을 것이며, 귀신들(spirits)에게 제물을 바치면서 하느님을 섬길 수는 없음을 설명해주자, 그녀는 그것들을 내려 열어 보였다. 거기에는 오랜 세월 먼지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한 바구니 안에는 올이 성긴 아마포가 담겨 있었는데, 귀신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바구니 안에는 안주인이 35년 전 시집올 때 입었던 저고리와 치마도 들어 있었다. 또 다른 바구니 안에도 수십 년 전에 넣어둔 오래된 옷들이 들어 있었는데 이 역시 여러 귀신에게 바치는 것이다. 질항아리 안에는 오래전에 부패한 밥과 떡이 귀신들을 달래기 위해 담겨 있었다.
노블 부인은 한국인 가정에서 모시는 조왕과 터주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였다. 그냥 섬기지 말라고 권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정체, 즉 물질적 실체를 확인하고 싶다는 호기심에서 꺼내 보여달라고 요청한다. 그렇게 해서 대면한 물질적 대상은 쌀 봉지, 바구니, 질항아리, 삼베, 헌 옷, 밥과 떡이었다.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분위기상 암시되는 것은, 한국인이 소중하게 모시는 것이 하찮은 물건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치 없는 물건에 대한 전도된 가치 부여라는 페티시즘의 고전적인 의미가 통용되고 있다.
(2) 페티시 파괴: 개종의 세레모니
개신교 선교사들은 민간신앙의 대상물과 무당의 무구를 페티시라고 지칭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물건들은 개신교인으로 개종한 과정에서 파괴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왜 굳이 파괴해야 했을까? 옛것과 절연한다는 의지를 보이는 행동이라고는 하지만, 특정 대상을 파괴해야 한다는 것은 그것의 가치를 인정하는 역설을 담고 있다. 페티시를 파괴하고 불태우는 행위는 한국인의 개종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장면에 속하는 것으로 개종 보고서에 자주 등장하곤 했다.
1902년에 내한하여 1922년까지 활동한 남감리교 선교사 선교사 크램(W. G. Cram)이 작성한 개종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한 무당이 개종하기로 하였다. 그러자 한국인 교회 지도자는 그 무당에게 무구를 파괴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한국에서는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에베소서」에 나온 대로 이교도 숭배에서 사용되었던 물건, 그릇, 옷 등 모든 것을 없애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언급된 「에베소서」 구절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새 사람을 입는 것”(4:22-24)이다. 무당은 지도자의 권유에 따라 집안 물건들을 모조리 불사름으로써 옛 사람을 벗어버림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1891년에 내한하여 1929년까지 활동한 미감리교 여선교사 루이스(E. A. Lewis)는 자신이 가담한 더 적극적인 활동을 보고한다. 그녀가 1906년에 보고한 글의 제목은 무려 “페티시 불사르기”(A Holocaust of Fetishes)이다. 그의 활동은 다음과 같다.
나는 장지내에서 주일학교 여성들을 만나 그들과 이웃 마을을 돌아다니며 더 많은 페티시를 치워 버리는 것을 도왔다. 이번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이 퍼포먼스를 구경했다. 속장(屬長) 박씨의 아내 마르타가 앞장섰다. 그녀는 바가지를 하나 달라고 하고 벽에서 자루를 내려놓더니 그 안의 쌀을 비워내었다. 그것을 돌려주며, “이 정도면 저녁으로 충분할거야.”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마당 한편으로 나가 빈 쌀겨(쥐가 곡식을 다 파먹었다)가 반쯤 차 있는 항아리 위에 덮여 있는 작은 짚 지붕을 뜯어냈다. 그녀는 이것을 불에 넣어 비우고, 계속해서 더러운 실로 반쯤 덮여있는 막대 하나를 부러뜨리고 쌀겨와 함께 집어넣어 모두 태워버렸다.
루이스는 경기 남부지역을 순회하면서 신자 가정에 있는 페티시들을 꺼내어 파괴하였다. 일반적으로 한국인 가정에서는 장독대 근처에 터주가리를 만들어 터주를 모셨다. 항아리에 쌀을 담아서 신체(神體)로 삼고 그 위에 짚가리를 씌운다. 한국인 신자가 주도한 일행은 주로 터주가리를 파괴하고 마당에 모아 불태웠고, 루이스는 동행하면서 찬송가를 불렀다. 그녀의 글에서 페티시를 불태우는 행위를 퍼포먼스(performance)라고 표현되고 뒤에서는 의식(ceremony)이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파괴 행위는 의례로 이해되었다. 글의 제목에서 표현되듯이 이 행위는 이교도의 신앙 대상을 불살라 하느님께 흠향하도록 하는 번제(燔祭, holocaust)이다.
지금까지 살핀 내용은 애니 베어드의 선교소설 『한국의 새벽: 극동의 변화 이야기』(Daybreak in Korea: A Tale of Transformation in the Far East)에서 종합적으로 나타난다. 애니 베어드(Annie Laurie Adams Baird)는 숭실대학교 설립자 윌리엄 베어드와 결혼하고 1891년에 내한하여 1916년 평양에서 사망할 때까지 교육에 헌신하며 많은 저서를 저술하였다. 『한국의 새벽』은 영미권 독자를 대상으로 한 선교소설로, 한국 전통사회의 굴레에서 고통받던 여성 보배가 기독교를 만난 이후 행복을 찾고 주변을 감화시키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소설에는 보배를 나락에 빠뜨리려고 하는 안타고니스트(Antagonist)로 무당 심씨가 등장한다. 소설은 심씨가 회개하고 개종하는 순간 절정을 맞이하는데, 페티시는 그 장면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우선 소설의 앞부분에 무당 심씨가 선교사의 집을 방문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심씨는 그 집에서 빈 토마토 캔을 얻어 와서 다음과 같이 행동한다. “심씨는 선교사 집에서 돌아와 토마토 깡통에서 상표를 떼어 벽에 장식으로 붙였다. 깡통은 페티시를 담아두기 위한 높은 선반에 두었다.” 서양의 새로운 물건이 제단에 모셔진다는 묘사는 우리가 앞에서 본 서양인의 관찰을 소설로 재현한 것이다. 여기엔 페티시가 경제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물건을 신앙 대상으로 삼는다는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절정 부분에서 심씨의 개종은 페티시의 파괴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은 그에 앞서 심씨의 동료인 고판수의 개종이 그가 사용하던 큰북을 파괴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것을 통해 암시된 것이기도 하다. 심씨의 개종은 기존의 물질적 환경의 전면적이고도 철저한 파괴를 통해 이루어진다.
사탄과의 관계를 단절하면서 심씨가 한 첫 번째 행동은 그를 전적으로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집안과 마당 구석구석에서 다량의 진절머리 나는 페티시들을 꺼내왔다. 최근 물건도 있었지만, 다수는 몇 년 동안 그 자리에서 상해가고 있었던 것들이다. 그중에는 낡고 해진 짚신, 오물과 함께 썩은 천 조각들, 기도와 주문이 쓰인 종이, 사람 뼈, 짚으로 만든 형상, 깨진 접시와 호리병 조각, 비단과 무명으로 만든 귀신 옷이 있었다. 귀신 옷은 귀신이 보고 기뻐하라는 뜻으로 만들어 어두운 집구석에 처박아 둔 것이었다.
심씨는 문 앞에 쌓인 이 쓰레기더미에 자신의 모든 무구(巫具), 무복(巫服), 부채, 징을 얹었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그 날 만식이네 마당에 버려 어디로 떠내려갔는지 모를 것들을 주워왔다. 어린아이 몸이라고 속여 넘겼던 털 빠진 마른 개 사체, 사람의 모든 질병을 치료한다고 속여온, 차마 말할 수 없는 재료로 만든 알약, 가루약, 고약,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슬을 가득 담은, 사실은 필요할 때마다 강물을 떠다 채운 해골이 있었다.
심씨가 개종을 위해 하는 행동은 앞의 루이스가 묘사한 페티시 번제의 현실을 소설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심씨는 이렇게 모아놓은 페티시 더미에 불을 붙이고, 구경하던 사람들도 미처 버리지 못했던 자기의 페티시를 들고 와 불꽃에 던져넣는다. 불꽃 위로 사람들의 찬양가 노래가 이어진다.
베어드는 페티시의 목록을 나열하는데 주력했다. 내용물 중에는 실제 무속에서 사용된 것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것도 포함된 것도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베어드가 공들여서 시시해 보이는 물건들을 나열했다는 점이다. 많으면 많을수록 가치 없는 물건의 무가치함은 강해지고, 불태우는 행위의 정당성이 확보된다. 페티시는 죄로 가득한 과거의 정수를 담은 물건이기에, 그것을 불사름은 죄를 탕감하는 의례적 속성을 갖고 개종 내러티브의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할 수 있었다.
(3) 페티시즘의 학문적 서술
다수의 개신교 선교사에게 페티시는 경멸적인 것이었고 파괴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페티시를 학술적인 묘사의 언어로 중립적으로 사용하고자 한 선교사도 있었다. 20세기 초 한국종교 연구를 주도했던 개신교 선교사들로는 헐버트, 게일, 언더우드, 존스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 중에서도 페티시즘 개념을 도입하고 적극적으로 사용한 이는 “한국 페티시에 대한 권위자”라고 불린 북감리교 선교사 조지 히버 존스(George Heber Jones)였다. 존스는 경멸적인 의도 없이 페티시를 한국 민간신앙의 상징물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
그는 1895년도 글에서 처음으로 페티시를 언급한다. “귀신은 페티시로 표상(represent)된다. 지푸라기 더미, 쌀 종이, 호리병, 낡은 항아리나 버려진 신발이 초자연적인 개념을 상징하기 위해 눈에 띄는 곳에 걸려 있다.” 그리고 1901년의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본격적으로 주물숭배를 한국 민간신앙의 특성으로 꼽았다.
[무속의] 영적 존재 대부분은 사람들의 눈에 어떠한 물질적 대상, 즉 페티시(fetich)로 대표되는데, 이 때문에 페티시즘(fetichism)이 한국 무속의 중요한 특성이 된다. 페티시는 무엇이 되었든 한국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특정한 신성으로 뒤덮인다. 귀신과 페티시는 숭배자의 마음속에서 동일화되어서 무엇이 더 우선성을 갖는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러나 페티시가 아무리 세월을 통해 타락하고 오염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성스럽고 한국인들은 그것을 함부로 대하기를 두려워한다.
존스는 페티시즘을 한국 민간신앙의 주된 특성으로 꼽았으며, 이 견해는 동료 선교사들에게 널리 수용되었다. 존스는 어떤 대상이든 페티시로 선택될 수 있다는, 상징과 상징물 간의 자의적 관계를 언급한다. 그리고 그 상징의 힘은 매우 강력해서 신자의 내면에서 상징 대상과 거의 동일시된다고 지적하며, 이를 통해 그 성스러움이 보존되고 있음을 말한다. 만일 페티시즘에 대해 경멸적 시선을 가졌다면 이러한 내용은 대상의 자의성, 신앙 대상과의 혼동 등의 내용으로 비판적으로 서술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비판을 삼가고 이 대상에 대한 한국인의 두려움을 들추어내려 하지도 않는다.
존스는 기본적으로 에드워드 타일러의 애니미즘을 받아들여 한국 무속을 종교로서 서술하고자 했다. 따라서 그의 페티시즘은 타일러와 마찬가지로 애니미즘에 속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그는 페티시즘은 한국 무속의 물질적 측면이라는 하나의 특성을 포착하기 위해 사용했지, 단순히 무속을 페티시즘과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도 존스를 따라 이 용어를 자주 사용하였다. 그는 한국의 고유 전통을 주물숭배라고 지칭하였으며, 무교뿐만 아니라 유교에도 이 용어를 적용하여 위패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조상에 대한 페티시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에 이르면 페티시는 한국종교의 물질적 상징을 표현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10년 이후 페티시즘의 사용은 줄어들었으며 오히려 비판적인 언급이 등장한다. 예컨대 남감리교 선교사 무스(J. Robert Moose)는 1911년 책에서 “한국의 종교는 단순한 페티시즘이 아니라 정령숭배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는 페티시즘에 대한 당대 종교학의 평가가 반영된 것으로, 무스가 낡은 이론 대신 당대의 유행이론인 애니미즘을 선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 맺음말
페티시즘은 만남에서 비롯한 개념이다. 서아프리카인과 포르투갈 가톨릭교도 상인의 만남에서 그 의례적 유사성이 인식되어 페티시가 출현했다. 네덜란드 개신교 상인과의 추가적 만남을 통해 전도된 물질적 가치와 우상숭배라는 경멸적 의미가 추가되었다. 페티시즘은 유럽의 사상가에 의해 인류 정신발달의 초기 단계, 원시적 상태의 종교를 가리키는 말로 보편화되었다. 19세기 말에 등장한 종교학은 새로운 종교 발달론을 쏟아내며 옛 이론이 되어버린 페티시즘을 그리 중요시하지 않았지만, 마르크스가 페티시즘을 통해 서양 자본주의 상품경제 핵심에 놓인 비합리성을 비판하고, 프로이트가 페티시즘을 통해 잃어버린 성기를 대신할 물건에 부여된 전도된 욕망을 분석함으로써 새로운 개념으로 탄생하였다.
19세기 말 한국이라는 근대공간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은 무속을 만났다. 그 만남의 결과 페티시즘이라는 새로운 언어가 근대공간에 출현하였다. 가정신앙의 대상물과 무당의 무구가 페티시가 되었다. 그러나 페티시즘은 대부분 부정적 만남의 언어였다. 타자의 상징체계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경제적 가치에 어긋난 것으로 비난받았고, 상대방 신앙 대상에 대한 경멸 때문에 공격과 파괴의 대상이 되었다. 가정의 페티시를 꺼내 불사르는 것, 무당이 자신의 페티시를 불태우는 것은 한국의 개종 내러티브 중에서 극적인 장면을 이루게 되었다. 예외가 있긴 하지만, 근대 전환공간의 페티시는 경멸과 파괴의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최근 종교학에서는 페티시즘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페티시즘은 근대의 최초의 종교 이론이었다. 그것은 종교 기원에 관해 신(God)을 상정하지 않는 설명을 가능하게 한 최초의 이론이라는 점에서 평가받을만하다. 다른 말로, 페티시즘은 종교사에서 신과의 관계가 아니라 물질적 대상과의 관계를 핵심 문제로 떠오르게 한 공헌이 있다.
한국의 상황을 돌이켜 보건대, 페티시즘은 기독교와 무속의 만남의 어떠한 측면이 주목받았는지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무속이 가진 물질적 측면에 대한 주목이 결국 페티시즘 언급을 가능하게 했다. 물질에 대한 무속의 태도가 ‘전도된’ 태도가 아니라 독특한 태도로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물질에 대한 관심은 그 자체로 비난받을만한 거리가 되지는 않는다. 물론 기독교는 이념적으로 정신과 물질의 대립,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에 대한 반감을 유지해왔기에, 종교에서 물질이 갖는 위상에 대해 정당하게 평가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교회 내의 물질적 측면을 기복주의라고 비난하고 그것을 무속적 영향이라고 돌려대어 왔다. 페티시즘 재고는 무속에 대한 올바른 인식, 종교 자체의 물질성과 기독교 내부에 기복의 자리를 재정립하는 문제와 연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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