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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메모

종교학 성공담?

by 방가房家 2023. 6. 4.

요즘 내가 일하는 곳에서 인문학이 왜 필요한지를 ‘설득’해야 하는 일이 왕왕 있다. 그래서 이런 책도 찾아보게 된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정보는 많지만 건질 것은 많지 않은 책이었다. 정말 중요한 내용(인문학이 어떻게 그들의 성공에 기여했는가?)은 조금 언급된 내용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저자의 인문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에 핵심에 대한 취재가 잘 되지 못한 탓이다. 게다가 종교학 사례가 책의 1장에 조금 나오는데 그친 아쉬움도 있다.(사실 내가 책을 산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는데). 종교학 사례는 다음과 같다.

 
1. 종교학 전공자 마이클은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그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분야의 일을 전반적으로 준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인문학을 전공해야 한다고 강력히 추천한다. 그는 2학년 때 비교종교학 수업에서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자신을 강타한 경험을 한다. 그러나 정작 그가 취직한 이유는 프로그램 입문 과정 수업을 하나 들었던 덕분이다. 그는 졸업 이후 신학대학원을 다니다 그만두고, 우연히 얻은 직장에서 주소 라벨을 관리하다가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든다. 이후 어셈블리어를 공부하고 컴퓨터 회사에 입사한다. 그러다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작은 기업을 창업한다...
 
2. 1974년에 졸업한 게리의 사례. 그는 유교사상에 관한 논문을 쓰고 낮은 학점을 받은 적이 있다. 몇 달 동안 중국 역사를 집중적으로 공부한 후에야 사상을 형성한 맥락을 이해하고 왜 낮은 학점을 받았는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미친 짓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훈련은 나중에 정치 활동과 직장 업무에 도움이 되었습니다."라고 회고한다.
 
책에서 열 명 넘게 등장하는 인문학 전공자들의 취업 성공담은 비슷하다. 저자가 피상적인 정보만 제공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인문학 덕분에 성공했다기보다는 인문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종교학(인문학)은 이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는가? 거듭해서 나오는 말은 인문학이 이들에게 낯선 분야에 도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었다는 것이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이들이 취업한 첫 번째 이유는 이들이 그나마 스탠퍼드를 나왔기 때문이고(어렵게나마 취업한 것은 동문의 도움이 컸고, 학교가 실리콘 밸리 근처에 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인문학"만" 한 것이 아니라 조금이나마 컴퓨터 수업도 들었기 때문이다. 나쁘게 표현하자면, 인문학이 낯선 분야 개척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인문학이 실생활과는 먼 뻘짓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분야에 적응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책의 성공담은 아이티산업의 초창기에 해당하는 것이 많고 지금처럼 분야가 확립된 이후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이런 식의 논리라면 인문학 중에서도 가장 뻘짓인 종교학이야말로 4차산업시대를 대비한 학문이라는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군대에서 한 삽질이 살아가는 데 통찰을 주었다는 위안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스탠퍼드 졸업자들도 문송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사실만 확인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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